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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역사

호서지방 대표 사족으로 명성 자자한 윤증이 속한 파평윤씨 노종파 역사속 인물



 

 

아래의 내용은 충남 도정신문에 기사화 된 내용이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37941

 

호서지방 대표 사족으로 명성 자자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 [2] 파평윤씨 소정공 윤곤 이후 노종파의 역사속 인물
[6호] 2010년 02월 08일 (월) 21:39:34 계룡도령춘월 mhdc@paran.com

 

 

[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 윤증이 속한 파평윤씨 노종파 역사속 인물 이야기 ]

 

 

우연한 기회에 부산을 떠나 이곳 충남 공주의 계룡산에 터를 잡은지도 벌써 10년

그동안 주변의 이곳 저곳 참 많은 곳을 다녔다.

 

그러다 발견한 딜레마

천하의 친일 매국노 윤덕영과

파평 윤문 노종파에 대한 나의 오해가 빚어낸 헤프닝!!!

 

그로 인해 한동안 윤증고택의 방문을 미뤄왔다가

몇년전 우연한 기회에 방문을 하면서 본관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 파평윤씨 노종파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심이 깊어 졌다.

 

그래서 지난 1월 24일 파평윤씨 노종파의 재실이 있는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로 향했다.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파평윤씨 노정공파 재실 안내판]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파평윤씨 노정파재실은 명문세가 답게 아주 잘 관리되고 있다.

아쉬움이라면 굳게 닫힌 문을 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영윤씨 노종파의 인물들에 대해서 우선 노정파의 계보와 재실에 기재되어 있는 인물을 알아 보자.

 

지난번에는 먼저 명재 윤증선생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명재, 300년을 뛰어넘은 '시대의 표상'   [충청도 명문가를 찾아서 [1] 파평윤씨 노종파 윤증]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37632

 

그러면 당시 뛰어난 학자를 배출한 가문은 어떤 가문인지 가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명재 윤증선생은 파평 윤문의 노종파이다.

명재 윤증선생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를 노종파의 파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노종파는 소정공파에서 분파된 파로서 윤증 선생도 노종파의 일원으로 같은 항렬이 50 여명 정도 되며 노종오방파의 문정공파를 이룬 문정공 황(煌)의 손자이다.

 

파평윤문의 노종파는 소정공파에서 분파되었는데,

15세 소정공 곤
16세 한성공 희제
17세 장령공 배
18 세 현감공(곡성공) 사은
19세 평와공 탁
20세 병사공 선지
21세 증승지공 돈(暾) 에 이르게 되며 노종파가 충남 노성지방에 자리 잡게 된 것은 尹暾(윤돈 1519-1577) 때였다.

 

윤돈은 윤선지(尹先智1501-1568)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선지는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정랑과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정주목사, 안동부사, 충청병사와 수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윤돈의 형 尹曦(윤희)와 아우 尹昱(윤욱)은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고, 윤돈 만이 통정대부 僉正(첨정) 柳淵(류연)의 2녀 문화 류씨와 결혼하면서 바로 처향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 득윤면 당후촌(현 곽석면 득윤리)으로 1538년경 이주하면서 노성지역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그는 결혼 직후인 1540~1550년대 즈음에 노성에 정착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사정을 자세히 전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런 중에도 다행히 처가로부터 윤돈이 재산을 분배받는 和會文書(화회문서-分財記-분재기)가 전해지고 있어 추측을 해 볼 수가 있다.

이 화회문서는 장인이었던 류연의 3년상을 마친 1573년(선조7년) 8월12일에 자녀들이 모여서 처가 재산을 나눈 문서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류연은 2녀1남을 두어 장녀인 한여헌(韓汝獻)의 처, 차녀인 윤돈(尹暾)의 처, 3남인 류서봉(柳瑞鳳)을 두었는데 분재 당시 한여헌과 류서봉은 이미 고인이었다.
그리하여 장녀와 윤돈, 그리고 류서봉의 처 이씨가 참여하였고, 윤돈의 아들인 尹昌世(윤창세)도 집필로 참여하였다한다.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奉祀條(봉사조)로 전답 8마지기와 노비2구.

장녀(韓汝獻 처) 몫으로는 전답 207마지기와 노비 23구.

차녀(尹暾 처) 몫으로는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17구.

3남 류서봉 몫으로는 전답179마지기와 노비(수불명) 으로 나뉘어졌다.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윤돈은 3남인 유서봉이 絶孫(절손)되자 봉사조의 재산과 다른 재산 은 윤창세의 5남 전부공 윤희(典簿公 尹熺)에게 상속 되었고, 류첨정(류연)댁 봉제사도 윤희가 담당하면서 가세가 더욱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윤돈은 59세를 일기로 1577년(선조10)에 죽었고, 그의 아들 참판공 윤창세(參判公 尹昌世,1543-1593)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현재의 노성면 병사리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다시 옮겼다.

 

[명문세도가의 위세를 그대로 보여주는 묘와 재실의 모습]

 

바로 이 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종5방파가 파생 되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설봉공 수 燧
문정공 황 煌
충헌공 전 烇
서윤공 흡 火+翕
전부공 희 熺 의 5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오방파 형성기인 16세기 ~ 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기가 흔들리는 대 혼란기로서

노종파 인물들이 척화운동을 주도, 척화가문으로서도 공과를 떠나 크게 명성을 날렸다.

그중 윤황은 척화상소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전은 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했으며, 윤황의 아들인 윤선거의 처 공주이씨는 강화에서 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윤창세의 아들이 오형제, 손자인 거(擧)자 항렬이 22명, 다음 대인 才(재)변 항렬이 50여명에 이르는 등 그 수에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파평윤씨 중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주목되는 노종 오방파는 충청도 노성현(니산현)에서 세력을 일군 가계이다.


노성에 근거와 태반을 마련한 이들 노종5방파는

조선중,후기 니산(노성),금산,연산, 등 공주목의 남부 일대에서 활발한 사족활동을 전개 하였고,

이에 대해 우암 송시열이 회덕향안 懷德鄕案 서문(1672)에서

- 내가 생각하건데 호서에는 예로부터 3大族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의 김씨, 니산(노성)의 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의 송씨이다 - 라고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지목할 만큼 명성을 얻고 있었다.
(충청도를 양반 고장이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논산시 노성면의 병사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아래의 병사에서 비롯되었다고하니

지역사회에서 파평윤씨 노종파는 대단한 신망과 세도를 부린 집안임을 알 수 있다.

 

[병사라는 이름의 파평윤씨 재실]

 

파평윤씨재실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121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8.08.30에 충남 문화재자료 제299호로 지정되었으며 일명 병사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병사리가 되었다고 한다.

파평 윤씨 재실은 윤순거 선생이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었던 건물과 덕포공 진(瑨)의 재실, 성경재 영사당의 관리사 등 모두 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었던 건물은 앞면 7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영사당 또한 5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같은 장소에 위치해 있는 충헌공 윤전 재실은 충남문화재자료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전 [尹烇, 1575~1636]의 자는 정숙(靜叔). 호 후촌(後村). 시호 충헌(忠憲). 초명 찬(燦)으로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저작(著作)이 되었다가 1615년 호조좌랑으로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때는 경기도도사로 복직하였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하고 공조정랑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고, 다시 강화에 들어가 공조정랑을 거쳐 익산군수를 역임하였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 ·장령(掌令)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이로 이조판서가 추증된 인물이다.

 

이곳 파평윤씨의 재실에는 여러채의 다양한 용도의 건물이 있는데 덕포 윤진선생의 고택도 자리하고 있다.
 

[고색이 창연한 덕포 윤진선생의 고택]

 

덕포공 윤진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121에 소재한 파평윤씨덕포공 재실(坡平尹氏德浦公齋室)과 함께 1997.12.23 문화재자료 359호로 지정되었으며 파평 윤씨 덕포공파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예전에는 윤진이 거처하던 사저 건물이었고 파평 윤씨 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9호)과 동일한 주소 내에 있었는데 덕포공 종중(宗中)의 요청으로 분리되었고 건물은 ㄱ자형 구조로 지붕은 각각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과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파평윤씨의 면면을 돌아 보았는데...

노정파의 파조를 둔 소정파의 소정공에 대해 알아 보자.

 

노종파가 분파된 소정공 윤곤은 누구일까?

 

소정공 윤곤(尹坤, ? ∼ 1422)은 호(號)는 국재(菊齋), 시호는 소정. 그래서 소정공 윤곤으로 불린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생 소도공 향(向)과 함께 문학(文學)으로 기용되었으며 1392년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벼슬에 참여하여 1398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문하평리 윤승순의 아들이며 세조의 국구(國舊) 정정공 윤번의 사촌 형이며, 성종의 국구 윤호의 할아버지이며, 세종의 부마인 윤사로, 성종때의 문신 윤필상은 그의 증손자였다.
한편 고려 충혜왕비 덕비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계종은 소정공 윤곤의 증조부 윤안숙의 형이다.
따라서 덕비 윤씨는 윤곤의 재종대고모가 되니 파평윤시는 가히 막강한 권력세도가임에 틀림없다.


윤곤이 정종 2년인(1400년) 동지총제로 재임 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이때 정안대군 이방원(뒤의 태종)을 도와 협력한 공으로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1401년 추충익대좌명공신 2등(推忠翊戴佐命功臣二等)에 임명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태종 6년(1406년) 좌군도총제로 있을 때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파평현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나 복권되기도 한 그는 세종 즉위년(1418년) 평안도 관찰사로 기용되었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기생의 풍류를 폐지하여 풍속을 바로 잡는 등 공을 쌓고 돌아왔으며, 그 공으로 1419년 이조판서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가 의정부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이제 역사속의 한 인물로만 평가 받는 입장이지만 명문 세도가인 파평윤씨 들의 가슴속에는

빛나는 조상의 한 표상일 것이다.

 

[병사 저수지 건너 노란선으로 표시한 종학당의 모습]

 

파평윤문 노종파의 제실을 돌아 나오는 길


저 멀리 종학당이 보인다.

 

병사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조선500년의 역사사속에서 종사를 좌지우지하였던,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재실을 바라보며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학습에 박차를 가했을

파평윤문 노성파의 후손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역사야 돌고 돌지만 지나온 세월속의 파평윤문으로서나 이나라 종사를 위했던 사람으로서의

논공행상은 시절에 따라 달랐겠지만

훌륭한 조상을 머리에 인 후손으로서 섣부른 잘못을 저지르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그래서 지금도 명문가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이제 파평윤문 노종파의 사람들 이야기를 맺었으니

다음에는 최초의 사립학교이며 파평윤씨 문중서당으로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도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1628년경 동토 윤선거(童土 尹舜擧1956-1688)가 건립한  종학당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충청도의 명문가를 찾아...  파평윤문 노종파의 발자취를 쫓은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