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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군산여행]탁류의 저자 백릉 채만식 생가터와 문학관 그리고 친일에 대한 이야기

 

 

풍자소설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채만식,

그의 영욕의 삶속에 함께하는 친일과 독백

 

지난 3월 20일 내리는 비를 헤치고 전북 군산의 채만식묘와 임피면 생가터 그리고 금강하구언 내흥동에 위치한 채만식문학관을 지인들과 다녀왔습니다.

문학인들의 성지순례지로 알려진 길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채만식[蔡萬植] 그는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의 비교적 부농 가정인 채규섭(蔡奎燮)의 7남2녀중 5남으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기자로 문학인으로 생활하다 6.25직전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1924년부터 1936년까지는 '동아일보', '개벽', '조선일보'의 기자로 근무하였던 그는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은선흥(殷善興)과 결혼하며 그후 일본 와세다대학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유학했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으며 그 후 장기결석을 사유로 퇴학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길로'가 추천되면서 등단하여 '카프(KAPF)'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참여하지 않았지만 1933년 발표된 희곡 '인형의 집을 나와서',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 '화물자동차', '부촌(富村)' 등에서 엿보이는 초기의 작품 경향은 카프의 경향파 문학과 심정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어 동반작가적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채만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희화 기법이 드러나는 1934년작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을 통해 지식인 실직자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내었으며 이 작품을 계기로 사회 고발적 동반작가적 문학에서 냉소적 풍자문학으로 작풍을 전환했다고 평가받았으며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고 평가받습니다.

 

그 뒤로도 그는 단편 '치숙(痴叔)', '소망(少妄)', '예수나 믿었더면', '지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게 됩니다.

 

1936년부터는 기자직을 버리고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그는 당시 농촌의 현실을 그린 '보리방아'가 검열로 인해 연재 중단되는 일을 겪었으며 이후 채만식문학의 백미라 일컬으며 역설적인 풍자 기법이 가장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 대표작인 중편 '태평천하'(1938)와 1930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냉소적 시선에 풍자와 통속성이 가미된 장편 '탁류'(1938)를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매일신보'에 연재한 '금의 정열'(1939)은 완전한 통속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일제 강점기 말에 발표한 '아름다운 새벽'(1942)과 '여인전기'(1945)는 관념적이거나 구호적인 친일이 아닌, 등장인물의 의식과 생활에 밀접히 연관되는 내재적 친일성으로 인해 채만식 문학에서는 친일의 내면화 정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 친일 소설로 알려집니다. 

 

그는 1945년 광복 후 자전적 성격의 단편 '민족의 죄인'(1947)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변명하며 친일을 최초로 인정한 작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1973년에는 유고로 중편 '과도기(過渡期)'와 희곡 '가죽버선'이 발견되어 '문학사상(文學思想)》지에 발표되기도 하였으며 저서로 '채만식단편집', '탁류', '태평천하(太平天下)', '집'(단편집)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는 '여자의 일생',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 '잘난 사람들' 등 15편의 중.장편소설, 70여편의 단편, 30여편의 희곡 촌극 시나리오 방송극, 40여편의 문학평론, 1백40여 편의 수필 및 잡문 등 시를 제외한 전 장르에 걸친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깁니다.

 

『채만식 전집』(1989) 10권으로 그의 모든 문학적 언술들이 집성되어 있는 바, 질과 양의 면에서 한국 근대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는 지금 일제강점기 대표 문인으로서 가히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군산 곳곳에는 채만식의 묘, 채만식 안내도, 채만식생가터 표지판 등이 유지되고 있으며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체만식문학관이 금강하류 하구둑 근처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군산시 임피면에 있는 채만식의 묘[?] 또는 채씨 일가의 묘[채만식의 묘라고 하여 갔으나 묘비에서 채만식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슴]

 

 

군산시 임피면에 있는 채만식 생가터 표지석

 

 

생가터의 모습

 

 

군산시 내흥동의 채만식문학관 전시관 건물

 

 

백릉 채만식문학관

 

 

전시관에서 7천원에 판매되고 있는 채만식의 대표적 장편소설 '탁류'[상하권 포함 가격]

 

탁류 작품해설

구분 장편 소설 / 저자 채만식 / 발표매체 조선일보 / 발표일 1937.10.12~1938.5.17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채만식의 작품 탁류는 신문연재소설이니 만큼 통속성과 함께 나름의 리얼리티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 소설사의 중요한 일 부분을 장식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현실 반영의 측면에 있다.

‘호남벌을 타고 일크러져 나와 서해로 빠지는’ 금강 연안 하층민들의 탁류와 같은 현실이 당대 민중현실의 궁핍상을 제시하기 위한 모델로서 추출된 것이며, 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 일가는 당대 몰락계급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 반영의 측면에서만 재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소설 내적인, 미적 가치의 문제가 여기서 제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탁류」의 구성적 성격이란 일종의 비극적 운명의 성격을 띠고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초봉’의 일생을 중심으로 한 비극적 인생 유전의 성격이 그것이다.

초봉의 성격은 심봉사의 딸 심청과 흡사하게 인신매매 주지를 실현하기 위한 희생자의 역할을 아무런 대속없이 수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단지 생활무능력자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초봉의 비극적 인생 유전이 발단하는데, 알고 보니 난봉꾼‧사기꾼에 불과한 첫 남편은 신혼기도 채 넘기지 못하고 비명횡사하며, 그리하여 남의 첩이 된 초봉은 점차 전락하여 결국에는 살인자가 되고 만다.

자신의 운명을 끝없이 파탄시키는 장형보를 찔러 죽이고 마침내 고립무원의 죄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순진무구의 희생자적 성격에서 살인과 고립으로 나아가는 구성적 전개는 비극적 운명 형식에 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심리적 효과에 있어서 공포와 연민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판에 박힌 비극의 멜로드라마적 구조에 집착하지 않고, 말하자면 초봉의 동생인 ‘게봉’과 그녀의 애인이 되는 긍정적 인물, ‘남승재’ 등을 통하여 내일에의 희망을 부각시켜 놓은 것은 채만식다운 세계관의 굴절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희망과 절망,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는 채만식다운 세계관의 양의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는데, 이러한 면모는 통속성과 비극성이 함께 연루되는 그로테스크 미학성을 너무 지나치게 연출함으로써 작품의 미적 합리성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적으로 당대 민중의 현실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미적 복잡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한편 주인공 ‘초봉’의 인생유전에 주목할 경우, 당대 여성의 사회적 운명에 대한 채만식 특유의 페미니즘적 관심이 적극적으로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 출전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교수 편 - '작품해설' 정보'

 

 

태평천하 작품해설
 
구분 장편 소설집 / 저자 채만식 / 발표매체 조광 / 발표일 1938.1~9

1938년 1월부터 9월까지 『조광』에 연재되었던 채만식의 장편소설.


최초의 제목은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었다.

발표 시기가 대체로 겹쳤던 「탁류」(1937~1938)와 함께 채만식의 2대 장편으로 분류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몰락’이 중요한 주제적 동력학을 이루나, 여기서의 몰락은 「탁류」와 다르게 지주 계급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중적 소망을 반영한다.

「태평천하」 이전에 부르주아계급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의 관념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낙일」(1930)이 있었다.

미학적으로도 이 작품은 상당한 연구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치숙」(1938)과 흡사하면서도 그와는 다르게 작가-화자의 구어체 간접화법의 진술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판소리 사설 투의 연희전달, 극적 묘사 효과를 높이는 미학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호남지방의 살아있는 구어가 풍부하게 수용되는 것도 이 점과 연관되며, 화자의 능청스러움이 「치숙」 못지 않은 반어적 풍자 효과를 낳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구어체 간접 진술 방식의 채택과 관계 깊다.

 

구성상으로도 이 작품은 「탁류」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극적 긴장을 획득하고 있는데, 극적 아이러니라는 풍자극의 구조로서 ‘윤직원’ 일가에 일어난 만 하루 동안의 일상사가 삼일치의 원칙에 충실하게 재현되는 양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구성적 외관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적 척도에서도 이 작품은 중요하게 평가된다.

윤직원‧윤두수는 당시 신흥 지주계급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상민 혹은 서민 출신 부재지주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계급이 식민지 지배 당국과 결탁하여 이른바 ‘식민지 지주제’라는 독특한 반봉건의 지주적 현실을 만들어내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성장한 계급이기에 그 일가의 일상적 삶은 윤리적으로 타락을 면치 못한다.

비록 하루 동안의 일상적 사태 전개 안에서나마 이 집안의 가계와 그 현재적 풍모가 고스란히 서술됨으로써 염상섭의 「삼대」에 버금가는 일제하 대가족 윤리의 붕괴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왜곡된 계급의 사회적 운명이 몰락으로 향하고 있음을(또는 그래야 마땅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하여 극의 종말에서 집안의 기둥인 ‘종학’이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피검소식을 전보로 알리고 사라진다.

 

이처럼 타락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알리고 사라져버리는 미학적 존재의 성격을 우리는 ‘숨은 신’의 개념으로 조명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이룩하고 있는 이같은 풍자적‧극적 아이러니의 미학적 달성이란 연극적 전통이 박약한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한 소설적 달성이라 할 수 있을 터이며, 여기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적 풍자극의 관념이 그의 의식 속에서 뿌리깊게 형성되어 왔음을 「낙일」을 위시한 그의 초기 소극 작품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 출전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교수 편 - '작품해설' 정보'

 

 

평소 축구를 즐겼고 활약도 뛰어 났다고 알려진 채만식, 그는 글을 쓸때에도 언제나 양복을 차려입고 있을 만큼 겳ㄱ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에서도 토씨하나 기호하나까지 철저하게 챙겼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남긴 많은 글 중에서 어덯게 친일을 하는 글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해방 후 그는 스스로 자책과 변명의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바로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입니다.
 
민족의 죄인 작품해설 
 
구분 중편 소설 / 저자 채만식 / 출판사 백민 / 출판일 1948.10~1949.1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백민(白民)』에 발표된 채만식의 중편소설.


광복 후 채만식 문학이 정신사의 맥락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유력한 자료의 하나이다.

일제말 이래 채만식의 전기적 행적이 구체적으로 회고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적인 형식이나 그 자체가 일제 말기에서 해방공간에 이르는 시기, 우리 정신사의 공백지대를 메워줄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광복 현실을 아무런 유보없이 감격으로 맞아들였다는 역사의식의 불감 상태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결국 견딜 수 없어 솔가하여 고향에 내려와 있던 작가는 광복이 되자 다시 기쁜 마음으로 서울 생활을 꿈꾸며 환도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 정국의 서울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친일 부역의 오점을 지닌 문인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했던 질시와 냉소의 시선이었다.

아마도 자의식이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한순간 역사의식의 몰각 상태에서 과거 행적에 대한 준열한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된 작가는 자기합리화의 논리 구축이라는 유혹에 빠져든다.

이를테면 죄인의 민족론, 혹은 생존의 윤리학으로서의 극한적 상황론이 그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민족 전체가 죄인의 상태에 빠져있었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부역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역사 속의 추상적 민족 배반 행위는 면책되어도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아마도 이런 자기변명의 논리는 특정 개인의 논리만이 아니고, 대다수 지식인, 혹은 지배계급 전체에 만연된 자기 합리화의 논변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이 변명의 논리 구축에 머뭇거리던 작가는 결국 제2의 낙향을 결행하게 된다.


부유한 자만이 당시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고 하는 상대주의적 면책의 논리로도 결국 궁극적인 자기정당화에 이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작가로서 선택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처세 방식이란 결국 ‘서울’이라는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피력된 채만식의 자기고백적 언술이 이 작품의 형식이자 곧 내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망은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연루된 민족적 역사 존재학의 긴급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논급되지 못한 친일 부역 행위에 대한 거의 유일한 역사반성적 형식의 소설이라는 데 있다.

‘반민특위’의 문제가 바야흐로 조야를 들끓게 하던 바로 그 무렵에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사실 역시 채만식의 시사적 감각을 다시 한번 말해준다.

 
* 출전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교수 편 - '작품해설' 정보'

 

 

채만식은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2년까지 밝혀진 친일 작품은 소설 2편을 포함하여 총 13편이었으나 이후 《아름다운 새벽》이 추가 발굴된 바 있다.

관념적이거나 구호적인 친일이 아닌, 등장인물의 의식과 생활에 밀접히 연관되는 내재적 친일성으로 인해 채만식 문학에서는 친일의 내면화 정도가 높다는 평가도 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에 평의원으로 가담함으로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 중 친일단체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채만식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다시 말해 한국전쟁 직전에 타계하기까지 ‘작품으로 말하기’라는 작가 윤리를 자신의 생애 윤리[?]로서 실천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지식인의 자의식을 날카롭게 투시한, 예컨대 지식인소설 유형으로 독자적인 면모를 획득하였으며, 지식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이 민중적 현실과 폭넓게 접촉하였을 때는 비극적 리얼리즘의 창작방법을, 그렇지 않고 대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희화화의 정신이 현실 가공의 미학적 정신을 철저하게 지배하게 되었을 때는 강렬한 풍자적 리얼리즘의 소설세계를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계급적 관념의 현실 인식 감각과 전래의 구전문학 형식을 오늘에 되살리는 특유한 진술 형식 창조는 그의 소설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라 할 것입니다.

소위 동반자작가로서의 의식적 출발을 마련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역시 1930년대 지성사의 맥락에서 정신의 한 보편 굴절 양상을 살피게 하는 유력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의 동향에 민감했던 것 역시 그의 문학적 특징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데, 소설을 통한 정치적 민감성이 일제말과 해방공간 전 기간을 통해서 우리 소설사의 공백을 메워준 유력한 언술체 생산의 한 기저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설 양식뿐만 아니라, 희곡 양식 창작을 겸비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예의 검토될 만한 작가이며, 무엇보다 광복의 현실로부터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가는 1940년대 후반기 우리 역사의 굴절을 냉정한 묘사가의 시선으로 그려낸 여러 소설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 소설사에 한 예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일제말 시대적 상황을 해방이 요원하게 느껴져 불가항력의 기간이라고 채만식과 같은, 아니 더 적극적이었던 친일 부역자들은 말합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몰락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친일 부역자 그들은 그들의 금력과 지식, 사회적 위치를 악용해 국내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정권과 함께 미군측에 붙어 지금까지 권세와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사회지도층입네 하는 자들이 다 그런 친일부역자들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구나 독립군을 말살하려 들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관동군 장교 박정희가 대통령까지 지내고 일제시대 법원서기를 지낸 자의 자손이 대통령 후보로 오르는 현실은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올바로 정리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지금 뉴라이트연합이라는 친일 망국 단체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현재의 친정부시위나 친일 수구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일장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앞세우고 수행하는, 일당에 팔리는 그들의 의식을 만들어 내었고, 돈에 환장한 지금의 세대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었이며 바르게 죽는 것이 무었이지를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이미 국가관이나 양심, 명예와 자존이 함께 사라져 버렸거나 묻혀 버린 것입니다.

 

작금의 채만식문학관의 경우도 그가 아무리 훌륭한 소설가였을지언정 문학관까지 만들어 가면서 앞으로의 세대에 알려지게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라도 해야겠다면, 적어도 친일에 대한 것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친일이 이정도, 저정도 쯤이야로 넘어 간다면 민족 정신은 다시는 바로 서지 못할 것이며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서 부와 명예만 얻어 놓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식이 확산되어 민족정기는 말살되고 말 것입니다.

 

몇년 전부터 임피를 지날 때 마다 채만식에 대한 얘기를 들어 왔고, 그가 친일부역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마음 먹고 채만식의 행적을 쫓았습니다.

 

혹여 잘못된 인용이나 서술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2011년 3월 20일 군산에서 그의 흔적을 만난 친일작가 채만식에 대하여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