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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논산의 명소 빼어난 건축미의 강경 미내다리

 

 

논산의 명소 빼어난 건축미의 강경 미내다리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삼거리 인근에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던

미내[渼奈]다리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다리인 미내다리는

지금은 원래의 위치가 아닌 곳에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서 있지만

그 옛날 강경이 번성할 즈음 배로 다니던 전라도와 충청도를 길로 이어주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던 다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계룡산에 와 산지가 10년에 가까운 지인이

아직도 가 본 적이 없고 알지 못한다 하여 함께 다녀왔습니다.
^^ ​

 

 

이러한 미내다리에는 재미난 전설이 있는데

옛날에는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너려면 배로만 이동해야 해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에서 다리를 놓기로 하였답니다.

 

이때 두 청년이 다리 공사를 맡기로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었는데

다리를 완성하고보니 돈이 남아 남은 돈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으나

가장 좋은 방법인 돈을 낸 마을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였으나

나누어 주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이어서 고민 끝에

나중에 다리가 부서지면 남은 돈으로 보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아무도 모르게 다리 근처에 돈을 묻어 놓았다고 합니다.

ㅠ.ㅠ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 다리는 부서지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놓은 두 청년의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어느 날 다리를 놓았던 두 청년 중 한 명이 갑자기 깊은 병에 걸려

좋다는 약을 써도 낳지 않았고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청년이 병문안을 하고

병이 깊은 것을 본 청년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다리 밑에 묻어 둔 돈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돈을 묻어 둔 장소를 파헤쳤지만

돈은 그곳에 없었다고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친구가 이미 돈을 꺼내 갔구나. 그 돈을 써서 병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였는데

청년의 짐작대로 그 돈은 이미 병이 든 청년이 몰래 써 버린 뒤였다고 합니다.

 

돈을 훔친 벌을 받아 병이 든 청년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더니

어느 날 저녁 큰 구렁이로 변해 버려 식구들은 두고 홀로 집을 나가

미내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갔으며

그 후로 구렁이는 이따금 다리 근처에 나와 눈물을 지으며 후회를 하였으나

다리 밑에 묻어 둔 돈을 꺼내 간 것이 알려지면서

누구 하나 구렁이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구렁이를 욕하였다도 하는데

어느날 구렁이를 하늘로 오르려 하다가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뭐 진짜니 아니니가 아니고 그저 신의를 소중히 하라는 전설이라고 보입니다.

ㅎㅎㅎ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미내다리는

현재 강경천 옆에 있어서 다리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다리의 길이가 30m, 너비는 2.8m, 높이는 4.5m로

지금은 자동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넓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마차가 다니는 튼튼하고 웅장한 다리로

건설 당시 삼남 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다리였답니다.

 

 

현재 강경천변에는 산책로인지 자전거도로인지 알 수없지만

여러개의 다리가 강경천변을 따라 놓여 있는데...

자동차도 지나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다리를 만들어 세울 때

좀 더 생각을 많이 해서 돌을 이용해

미내다리 형태로 만들어 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답니다.
^^

 

 

오로지 돌로만 만들어져있는 미내다리는

3개의 무지개모양 홍예가 있는데

많은 부분이 최근에 복원되어

돌의 재질과 색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색상에서부터 다듬어진 모양까지가 확연히 다르니 금방 알아 보겠죠?

 

 

원래의 미내다리 홍예 중앙의 긴 장대석에는

용머리[?]인지 호랑이머리[?]인지가 조각되어 있는데...

단순한 다리로서만의 기능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공을 많이 들여 만든 다리인 것 같습니다.

 

 

장대석의 모양이 각기 다르죠?

 

 

용의 머리인지...

호랑이의 머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모습의 장대석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 된 장대석의 모습은 딱 한 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

 

 

미내다리라는 이름은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유래하며,

'여지승람'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731년(영조 7)에 강경촌(江景村)에 살던 석설산(石雪山) 송만운(宋萬雲)이

주동이 되어 황산사람 유부업 등 3명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1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현재의 다리를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는 미내다리는 강경·황산·여산의 유지들이 재물을 모아

평교(平橋)였던 것을 3개의 홍예가 있는 돌다리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지 못한답니다.
^^

은진미교비는 자연석으로 된 비석으로

과거 미내교 옆에 있었으나 파손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논산이나 강경에서 전해지는 미내다리에 대한 이야기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이지역 출신들에게는

논산의 개태사 철확과, 관촉사의 은진미륵,

그리고 강경 미내다리를 보고 왔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ㅎㅎㅎ

 

누가 죽었다 되돌아와서 전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지역의 강경지역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던 명물이라는 이야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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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9일 다녀 온 논산, 강경 미내다리를 소개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