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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저수지 전북김제 벽골제 이야기



내가 이곳 계룡산에 오게 되면서 자주 접하는 곳이 주로 충청 호남지역이다.

지난 1월 17일 나선 길에서 만난 벽골제와 끝없이 펼처진 김제평야를 만났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과 대해처럼 망망한 평야, 땅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금만평야,
누구나 잘 아다시피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 김제평야의 모습이다.


이 곳에서는 일찍이 삼한시대부터 쌀농사가 시작되었다.
백제 때 이곳 지명이었던 '벽골'은 볏골(벼의 고을)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4세기 초 백제 사람들이 쌓았다는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저수지 둑 벽골제(碧骨堤)가 현재 김제군 부량면 원평천 하류에 이제는 제방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저수지로서 그 서쪽은 호서, 그 남쪽은 호남이라고 불러서 오늘까지 호남이라는 이름이 있게 한 것이 벽골제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일부를 복원하고, 거창한 전시관도 세워서 후손들에게 역사를 일깨우고 유적을 보존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1600년 전의 흙으로 쌓은 제방의 일부와 5m가 넘는 두 개의 수문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 기둥 두 개가 깊이 패인 세월의 흔적을 내 보이며 서 있다.


벽골제


전북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용성리(龍成里) 소재의 비석 및 삼국시대의 저수지 둑.
지정번호 : 사적 제111호
소재지 : 전북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용성리(龍成里)
시대 : 330년(백제 비류왕 27년) 완공, 790년(원성왕 6) 증축
종류 : 저수지둑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고려·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


제방은 포교리(浦橋里)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저수지인 벽골제는 우리 나라에서 축조된 대규모의 저수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축조시기는《삼국사기 三國史記》와《三國遺事》에 각각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서기 330년)과 20년(서기 3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 흘해왕 때 축조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김제지방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의 두 기사는 착오로 인하여 백제의 사실이 신라의 역사에 잘못 기록된 것이거나 아니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론도 있다.

현재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친 약 3㎞에 이르는 제방(두 개의 수문 장생거와 경장거 포함)과 1415년 건립된 벽골제 중수비를 포함하여 1963년 1월 21일에 국가사적 제11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벽골제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더욱 이해가 빠르고 우리 조상들의 숨결에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다.

벽골제 동영상으로 알아보기 =>  http://byeokgolje.gimje.go.kr/history/restoration/movie02.jsp


 
벽골제는 김제평야의 수전(水田) 경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堤)가 축조된 후 여러 차례 수축공사가 행해졌는데,《삼국사기》권 10 원성왕 6년(760년)조에 7개주의 백성들이 동원된 대토목공사를 하였다는 기록과 설화가 있으며, 고려시대《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藍》 벽골제중수비문(碧骨堤重修碑文)에는 고려 헌종(1009∼1030)때 벽골제 중수를 한차례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인종 21년(1143년)에도 수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농본주의 정책을 표방하고 농업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조선시대에도 벽골제 수축에 관하여 논의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태종실록 太宗實錄》권 16 태종 15년(1415년) 8월 기사에 전라도 관찰사 박습(朴習)이 벽골제의 저수지로서의 우수성을 논하자 태종이 벽골제의 보수공사를 실행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20여일 동안 벽골제 수축공사를하여 약 300년만에 벽골제가 복구되었다가 5년 후인 세종 2년(1420년)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고, 이후에는 방치되어 그 넓은 제지(堤址)가 전답으로 바뀌어 갔다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벽골제의 규모는 어느 정도 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벽골제의 제방의 길이와 저수된 물줄기가 어느 지역까지 연장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벽골제는 길이가 60,843尺 약 3,240∼45m에 달하며, 5개의 수문이 있었다 한다.
첫 번째 수문인 수여거(水餘渠)는 그 물줄기가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두 번째인 장생거(長生渠)는 만경현의 서쪽, 세 번째인 중심거(中心渠)는 고부군(古阜郡)의 북쪽과 부녕현(扶寧縣)의 동쪽, 그리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수문인 경장거(經藏渠)와 유통거(流通渠)는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그 물줄기가 뻗어 나갔다고 한다.


이 유적이 갖는 의미는 4세기 삼국사회의 토목·측량·석공 등 제반기술의 발달수준은 물론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벼농사를 위하여 수리시설을 갖추었던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것이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총 463호의 사적 중 ‘실제기능을 수행한 유일한 산업구조물’인 벽골제는 오천년 농경사의 측면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고대농업사 및 정치, 토목건축사와 수공학, 동아시아고대사 및 지역학 등 벽골제를 두고 풀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지금은 2,500m의 제방과 2개의 수문 장생거와 경장거 만이 남아있어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다.



또한 이 벽골제에는 아름다운 전설 하나가 전하여 온다.
신라 원성왕 때 벽골제 보수공사를 위하여 이곳에 온 원덕랑은 김제태수의 집에서 지내며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태수의 딸 '단야'는 점차 원덕랑을 짝사랑하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고향에 '월래'라는 약혼녀가 있었다.
또한 부근의 용추에는 청룡과 황룡이 살고 있었는데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그 중 청룡이 성을 내어 둑 한 군데를 무너뜨렸다.


처녀를 용에게 받쳐야 공사가 무사히 끝 날 것이라는 공론이 돌던 때에 마침 월래가 원덕랑을 만나려고 김제에 왔다.
김제태수는 월래를 몰래 보쌈하여 용에게 받칠 음모를 꾸몄고,


이를 안 단야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 둑을 완성시키고, 자신이 사랑하던 원덕랑이 월래와 혼인할 수 있게 했단다.

이러한 내용을 놀이로 만들어서 벽골제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쌍룡놀이' 가 이 지역 농민들의 소중한 연중행사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현 벽골제단지에는 벽골제와 농경문화를 대주제로 전시 및 자료수집과 연구조사를 진행하는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김제를 발원지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아리랑의 자료를 전시하는 아리랑문학관,
그리고 전북미술계의 거목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나상목선생의 벽천미술관과 김제 우도농악관 등 문화시설과 각종 야외전시장이 있다.


사적 벽골제와 각종 박물관들은 오래된 고을, 김제의 지역정체성 및 문화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의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 백년지대계 김제를 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복합적 위상을 지닌 국가사적 벽골제와 그 배경인 김제만경들녘의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하여 김제시는 1975년 벽골제 부분발굴을 필두로 하여 1980년 유적정화공사, 1990년 개발위원회 구성 및 추진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였다. 

벽골제의 부속 공간들을 보자면 단야각/단야루를 비롯하여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아리랑문학관, 벽천미술관, 우도농악관, 창작스튜디오, 테마연못, 야외전시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매년 지평선축제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지평선 축제 때 다시 한번 더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기대해 본다.

벽골제로 가려면 아래의 약도를 참고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