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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여주여행]세종대왕의 원찰인 여주 봉미산 신륵사와 여주생활도자관

 

 

아~~ 언제 였던가...
이넘의 정치판에 정신을 팔면 모든 것이 뒤죽 박죽...

2010년 9월에 다녀온 여주 신륵사의 이야기를 이제사 해야하고.....못살아...^^

 

2010년 9월 15일 여주는 입추와 처서를 지났음에도 그저 살갑지 않은 뙤약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여주군청 근처에서 라이브까페를 운영하는 지인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고 찝질방에서 눈을 뜨니 그동안 여주를 참 많이도 다녔는데 여주의 명소를 간 기억이 없습니다.

ㅠ.ㅠ

그래서 여주의 유명한 절 신륵사를 가 보기로 하고 혼자 길을 나섰습니다.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남한강이 끼고 흐르는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입니다.

 

도착하니 신륵사국민관광지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니, 여주생활도자관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거대한 솟을대문[?]이 떡하니 입구에 버티고 있습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여주군 관광안내도와 상가밀집지역이 나타나고, 설치미술품과 도자기 마을답게 전통가마가 보입니다.

 

 

전통가마 길을 끝까지 가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니 저 멀리 신륵사 일주문이 보입니다.

 

 

신륵사[神勒寺]는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고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며 한때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는데 원효대사가 그 말에 따라 절을 짓기위해 연못을 메우려 하였으나 아무리 흙을 부어 넣어도 자고 일어나면 처음 모습 그대로 되어 버리는 등 전혀 공사의 진척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니 돌연 연못 속에서 9마리의 용이 나와 하늘로 날아 올라 승천을 하였고 이후 공사가 원하는대로 진척이 되어 신륵사를 지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화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정도로 받아 들여야 할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시기와 사람을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신륵사라는 절 이름 또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홀연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굴레를 씌우고는 그 용마를 다스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지는 것을 보고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 의 "神"과 굴레를 씌웠다하여 굴레 "勒"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설화입니다.

 

신륵사 이전에도 절이 있었고 다른 이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옹산사의 설화나 인당대사의 설화를 통해 신륵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때 정도의 시기에 신륵사가 창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의 경우 설화에 등장하는 용은 비와 물을 관장하는 신 정도로 여겨왔습니다.
여기서 용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신륵사를 홍수로 인한 범람이 잦은 남한강가에 절을 짓다 보니 수년이 걸리는 공사동안 여러차례 홍수를 만나는 등의 어려운 점을 용으로 풀어 낸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같습니다.

 

 

신륵사 일주문을 지나 100여미터 정도를 들어서니 제일 먼저 육각정 청자정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는 음수대가 놓여 있어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약수라고 하는데 한모금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마셔보지는 못했습니다.

입구에 약수대가 있는 것은 아마도 세속의 때를 말끔히 씻고 절로 들라는 의미인 듯...

 

 

청자정을 지나 바로 보이는 넓은 바위 위에도 육각정이 하나 더 보이는데 강월헌이라고 불리는 곳이랍니다.

남한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이곳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말이 고승 혜근(1320~1376)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혜근 생전의 당호인 강월헌(江月軒)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누각은 본래의 누각이 혜근의 다비를 기념해 세워진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지어졌으나 1972년 대홍수로 옛건물이 떠내려 가버려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인 이곳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육각정들 사이로 신륵사에 들면 우측에 작은 비각이 나타납니다.

이 비각은 1860년(철종 11) 건립된 김병기송덕비 [神勒寺 金炳冀頌德碑]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김병기가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 그리고, 그 옆에 작은 해서체로 “간역 오위장 연안김지택(看役 五衛將 延安金智澤)”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비각을 지나면 나타나는 것이 극락보전입니다.

 

 

원래의 극락보전은 당시 해체복원수리 공사중이라 임시로 극락보전을 만들어 둔 모습입니다.

좀 더 들어서서 보고 싶었으나 온통 공사가 진행 중이고 괜한 출입으로 작업에 방해가 될까 하여 들어가지 않고 바로 불전사물이 갖추어져있는 범종루로 향했습니다.

 

 

범종루의 사물은 예불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범종은 특별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도 하고 일체 중생이 종소리를 듣고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를 더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도 합니다.

 

현재의 신륵사 범종은 서기 1978년 불기 2522녕에 봉안된 것으로 그전의 범종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법고는 축생을 제도하며 목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기와 같이 항상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운판은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범종루의 사물은 석가의 진리를 전하여 해탈·성불하도록 바라는 의미가 있어 아침·저녁 올리는 예불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서로 친다고 합니다.

이곳 신륵사의 범종루에는 2개의 법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역사가 보이는 고색창연한 법고이고 하나는 방금 들여 놓은 듯한 법고 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떠한 자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관음전 주변도 온통 공사중!!!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인지 발길을 돌리게 만듭니다.

 

 

조사당도 그저 멀리서 사진으로 남기는 정도로 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뭐 굳이 가려면이야 갈 수도 있었겠지만...

계룡도령도 플랜트나 큰 기계설비들을 설치할 때 주변에 작업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이 보이면 공연히 신경이 쓰이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해 본지라 그냥  패쑤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륵사 다층석탑 [神勒寺多層石塔]도 수리를 하는 것인지 수리 중에 혹여 다칠까 보존을 위해서인지 아무튼 철 구조물 속에 있습니다.

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흰 대리석으로 건조된 이 석탑은 기단(基壇)에서 탑신부(塔身部)에 이르기까지 각층이 모두 한 장씩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에서 지대(地臺) 상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의 중석(中石)은 매우 얇고 갑석(甲石)은 특별히 두껍게 되어 있는데 현재 8층 옥신 위에는 이 옥신 크기 만한 옥개석과, 이보다 훨씬 작은 옥신의 부재가 각각 하나씩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많은 층급(層級)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말 나옹선사(1262 - 1342)가 심었다고  하는 신륵사의 은행나무는 600년이 넘게 살아온 나무

수령 60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마주서서 한 나무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두 나무가 서로 반쪽씩 자기 영역을 지키며 바깥쪽으로 벋은 나뭇가지가 마치 한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있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마치 금슬좋은 부부같기도 합니다.

그 앞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소나무 한그루는 마치 당장이라도 남한강으로 날아 올라 뛰어 들 용처럼 비천하려는 모습으로 기울어져 자라고 있습니다.

 

 

천년 고찰로 알려진 신륵사...

대대적인 해체보수작업으로 인해 속속들이 다 볼 수있는 인연은 되지 못하였지만 돌아서 나오는 길에 반드시 다시 오마는 미련을 크게 심어주는 걸음이었습니다.

 

 

돌아서 나오는 길...

잘 꾸며진 신륵사국민관광단지에는 아니 여주생활도자관에는 따가운 햇살아래 반짝이고 있습니다. 

 

 

여주는 도자기로 잘 알려진 도시입니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은 지금 4[死]대강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칫 세종대왕릉이 침수될지도 세계문화유산지정에서 탈락 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여주군민들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업체의 관계자들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4대강 사업은 미친짓거리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들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자연과 문화 유산들이 시멘트로 덮혀 죽어가는 모습을 그져 지켜만 보는 야당과 정치인들...

시멘트와 삽질에 미쳐버린 대통령을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것인지 탄핵이라도 시켜야 할 일이 아닌지...

여당은 공사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야당은 욕먹는 대통령과 여당으로 인한 반사 이익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봉미산 신륵사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TEL : 031-885-2505
FAX : 031-885-5936 
이메일 :
srs2505@paran.com

 

 

 

 

[2011년 4월 29일  2010년 9월 15일 다녀 온 여주 신륵사와 여주생활도자관을 되돌아 보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