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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옛 선현들의 숨결과 발자취를 찾아서 떠나는 기호유학문화의 진수 충남에서의 하룻밤 '충남명가 탐방’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 변평섭)은 지난 4월 28일 옛 선현들의 숨결과 발자취를 찾아서 떠나는 기호유학문화의 진수 충남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명제의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그 첫 번째 탐방은 ‘명재 윤증을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로 카이스트 동문가족들 30여명과 함께 명재 윤증선생 고택에서 1박 2일의 문화체험행사로 진행됐습니다.

 


 

충남은 예로부터 양반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충절의 고장으로 일컬어 왔는데 이는 그만큼 충남은 유교문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유교적 색채가 강했던 곳익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한 유학자들의 흔적을 찾아 다니는 여행이라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명재윤증선생고택에 대한 소개는 이전에 올린 글이 있어 이로 대체합니다.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1] [충청남도의 명문가문 파평윤씨 노종파 윤증 이야기]

 

 

충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학자들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과 학맥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계열이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갈등, 조화하면서 새로운 유교문화의 창출을 모색하고, 기호유학은 개방적 학풍 속에서 매우 다양한 유교문화를 꽃피웠으며, 그 내용에 있어 성리학, 인물성동이론, 양명학, 기학, 의리학, 실학, 예학 등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성리학만 하더라도 율곡직계의 계열은 율곡설의 계승에 주력하지만, 우계학파나 비사승 율곡계열의 경우에는 율곡설에 매이지 않고 퇴계설까지도 용납하는 수용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예학의 경우에도 김장생, 김집과는 달리 기호예학과 영남예학을 절충, 조화해보려는 개방적 학풍을 송준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청의 유학에 대한 역사를 찾아 이해하기 위해 떠난 이번 행사는 충남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기호유학의 중심이라 할 명재고택에 도착하여 윤완식 종손과의 인사와 가족 소개에 이어 본격적인 유적답사를 통해 기호유학의 중심인 충청남도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 기호유학에 대해 알아볼까요?

역사적으로‘기호(畿湖)’란 경기지역과 충청지역을 말하지만, 더 넓게는 호남지역까지도 아우르는 말이다.

 

조선조 유학은 16세기 퇴계와 율곡이라는 거유의 등장으로 기호유학과 영남유학이라는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발전해왔다.
물론 16세기는 성리학의 전성기로서 많은 유학자가 나타나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웠으나, 기호유학과 영남유학이 구별되어 학파적 성격을 띠고 상호 대립하며 발전한 것은 퇴계 율곡 당시가 아니라, 17세기 갈암 이현일(葛癌 李玄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등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호유학은 크게 보면 율곡학파(栗谷學派)와 우계학파(牛溪學派)가 주류를 이룬다.

 

율곡학파는 다시 율곡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직계 계열과 직접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율곡을 배워 온 비사승(非師承) 율곡계열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율곡의 적전(嫡傳:정통의 혈통에서 정통으로 이어받음)은 김장생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문하에는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金集)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同春堂宋浚吉), 초려 이유태(草廬李惟泰) 등이 있어 율곡학파의 문호를 성대하게 하였다.
그런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김경여 등은 김장생이 죽은 후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도 배웠다.
김집의 문하에는 이들 외에도 시남 유계(市南兪棨), 노서 윤선거(魯西尹宣擧) 등이 있었다.

 

김장생 문하의 적전은 송시열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17세기 조선조에 있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송시열 문하의 적전은 권상하인데, 그의 문하에서 이른바‘인물성(人物性) 동이(同異)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에 중심인물이 바로 이론을 대표하는 한원진이요, 동론을 대표하는 이간이었다.

 

다음으로 우계 성혼으로부터 시작한 우계학파가 있다.
우계 성혼은 율곡과 평생 막역한 동지였고 정치적으로도 서인의 길을 함께 걸었지만, 이념적 지향은 같지 않았다.
성혼은 부친 청송 성수침(聽訟成守琛)의 가학을 이어 받았고, 성수침은 15세기 도학을 대표하는 정암 조광조(靜庵趙光祖)에게서 배웠다.
따라서 성혼의 학맥은 부친을 통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여말선초의 의리학파 내지 15세기 도학파를 계승하였다.

 

성혼의 문하에는 그의 사위인 팔송 윤황(八松尹煌)을 비롯하여 이귀, 정엽, 조헌, 이시백, 안방준, 강항, 황신, 김덕령, 신흠 등이 있었다. 본래 이이, 성혼, 송익필, 세 사람은 동향출신으로 나이도 비슷하고 우의가 돈독하여 그의 문인들도 세 문하를 자유롭게 왕래하여 사승관계가 겹치고 있다.
성혼의 학문은 사위인 윤황을 통해 아들인 노서 윤선거로, 다시 손자인 명재 윤증으로 계승되었다.
윤증은 송시열의 사랑을 받는 제자였으나 묘지명사건, 예송 등 복잡한 사건으로 반목과 갈등으로 사제의 관계를 끊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길을 달리 걷게 되었다.

 

또한 윤증의 문하에 있던 정제두는 조선 양명학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우계학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탄옹 권시(炭翁權)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등과 함께 기호유학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율곡, 성혼과 막역한 동지였던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은 예학, 성리학, 문학에 능했으며, 그의 문하에는 정엽, 김장생ㆍ김집 부자 등이 있었는데, 성혼, 이이 두 문화를 폭넓게 드나들었다.

 

그 밖에 화담 서경덕(花潭徐敬德) 계열을 꼽을 수 있는데, 문인인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고청 서기(孤靑 徐起) 등이 있어 호서를 중심으로 화담의 기학을 계승하였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자료 인용]

 

 

기호유학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 학문의 개방성과 다양성
기호유학은 개방적 학풍 속에서 매우 다양한 유교문화를 꽃피웠다.

그 내용에 있어 성리학, 인물성동이론, 양명학, 기학, 의리학, 실학, 예학 등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성리학만 하더라도 율곡직계의 계열은 율곡설의 계승에 주력하지만, 우계학파나 비사승 율곡계열의 경우에는 율곡설에 매이지 않고 퇴계설까지도 용납하는 수용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예학의 경우에도 김장생, 김집과는 달리 기호예학과 영남예학을 절충, 조화해보려는 개방적 학풍을 송준길을 통해 볼 수 있다.

 

- 禮문화의 창출과 수준 높은 문화의 향유
17세기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 민생의 위기, 광해의 패륜으로 인한 윤리강상의 위기, 당쟁의 심화로 인한 지도층에 대한 불신 등으로 민심의 이반과 유교사회의 기반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윤리강상의 재건이라는 학문적 필요성이 요청되었고, 조선의 선비들은 예학을 확립하고 예를 생활화 시킴으로써 사회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예학은 김장생, 김집 부자와 그의 문하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강학함으로써 한 시대의 학풍을 이루었다.

이는‘충청도 양반’이라든지 충청도가 예의 고장이라 부르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의리적 도학풍의 진작
도학(道學)이란 유학 내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지만, 특별히 도학이라 부르는 것은 성리학의 도덕적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일찍이 도학풍 내지 의리적 실천의 모범을 보인 이는 성삼문, 박팽년이다.

이들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규정하고 온 몸을 던져 충절을 지켰다.

성삼문의 죽음 이후 성수침, 성제원, 성제원, 성운, 성우 등 창녕 성문은‘은거자수’,‘ 성현자기’를 표방하며 위기의 학풍에 진력하였다.

이러한 창녕 성문의 의리적 도학풍은 파평 윤문으로 이어져 윤황의 척화의리, 윤전의 순절, 윤선거, 윤증 부자에서 보듯이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위기지학의 도학풍을 이어갔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자료 인용]

 

이러한 기호유학의 유적 답사는 명재고택, 공주이씨정려, 노성향교, 궐리사, 이삼 장군 고택, 지난해 서원강당이 보물로 지정된 노강서원, 병사, 종학당으로 이어져 기호유학의 흐름과 특성을 알아가는 역사 기행을 했습니다. 

 

노성향교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8번지 명재윤증선생고택과 이웃해 위치해 있습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원래 지금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세웠으나 무슨이유에서인지 1700여 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합니다.

 

조선 인조 9년(1631)에 대성전을 보수하였다는 명륜당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대성전,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삼문(三門) 등이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맹자·안자·자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동무에는 송나라 1현(賢)과 우리나라 9현을, 서무에는 송나라 1현과 우리나라 9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는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노성향교가 명재윤증선생고택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다면 우측으로 100여미터를 가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노성 궐리사[魯城 闕里祠]입니다.

 

노성 궐리사 [魯城 闕里祠]는 1978년 충청남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곳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294에 있는 공자(孔子)의 유상(遺像)을 봉안한 영당(影堂)으로 궐리[闕里]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생장한 ‘궐리촌’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국내에서 '궐리'라는 명칭을 쓰는 곳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은 충청도의 이산(尼山 현 노성)과 경기도 수원(水原 현 오산) 그리고 진주(晉州)에 있으며, 노성(이산)의 궐리사의 경우 유생들에 의해 건립되었고, 수원의 궐리사는 공자의 후손인 공씨(孔氏)가 우리 나라에 건너 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라 하여 정조 16년(1792) 10월 정조가 궐리사를 짓도록 명하여 지어진 곳이고 진주 궐리사는 연대가 불명확하다고 합니다.

 

 

원래 노성의 궐리사는 1687년(숙종 13) 송시열(宋時烈)이 궐리사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1716년(숙종 42)에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俊), 이건명(李健明) 등 제자들이 노성산 아래 궐리촌(闕里村:현 위치의 서쪽)에 궐리사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송조5현(宋朝五賢)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1805년(순조 5) 관찰사 박윤수(朴崙壽) 등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 이건 당시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명 춘추사(春秋祠)라고도 불렸다고합니다.

궐리사 외부에는 공자의 중국 후손들의 청에 의해 부지가 조성되어 공자외 석상 등이 한국으로 왔으나 석질이 좋지 못해 이송 중 파손으로 인해 한국에서 다시 제작한 석상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유림에서는 선인들을 높이 받들고 가르침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모여 석전(釋典)을 봉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충남에만해도 몇 곳의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제례가 봉행된다고 하는데 같은 날 치뤄지는 제례가 왜 한곳에서 통합되어 집행되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국가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제례가 통합되어 한 곳에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이삼장군고택입니다

 

 

이삼장군과 고택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로 대신합니다.  

 

이삼장군고택과 백일헌영당 [기호유교문화의 진수 충남에서의 하룻밤-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삼장군고택에서 다시 명재윤증선생고택으로 돌아 온 계룡도령과 일행들은 떡 전골, 가지소박이, 국말이, 타래과 등 명재고택과 이삼 장군 고택의 전래 종가음식을 만들며 가족 간의 협심과 이해도를 높였고, 명재고택의 노서서재에서 전통 매듭 공예를 통해 규방공예의 세심함도 느껴 보았습니다.

 

특히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하셔서 일일이 지도해 주신 이삼장군의 후손 종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후 명재고택 사랑채에서는 건양대 교양학부 김문준 교수가 ‘기호유학과 우리의 생활’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으며 고택음악회 ‘흥겨운 우리 가락’에서는 대한민국1호 쌍둥이 가야금 가수 ‘가야랑’ 이예랑씨의 가야금연주와 이사랑씨의 설명으로 참가자들이 우리의 국악에 한걸음 더 다가서는 기회가 가졌고,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의미깊은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명재고택에서 일어나 주변 노성산성을 산책하는 등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며 아침 식사 후에는 가족과 함께 배우고 즐기는 선비체조를 배워 보는 시간을 가진 후 명재고택의 사랑채에서 노서 14세 종손 윤완식선생으로부터 듣는 ‘종손과의 대화’시간에는 윤증선생의 종손인 윤완식 선생이 들려주는 고택이야기를 통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기도 했는데 다시 만나기 힘든,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계룡도령과 일행들은 작년인 2011년말 서원강당이 보물로 지정된 노강서원[魯岡書院]으로 향했습니다.

 

노강서원[魯岡書院]은 1974년 9월 1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12월 30일 보물 제1746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김수항(金壽恒)의 발의로 1675년(숙종 원년)에 창건하였으며 1682년(숙종 8)에 ‘노강’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윤황의 위패를 모시다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를, 그후 1723년(경종 3)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윤선거(尹宣擧)를 추가 배향하였다고합니다.

 

1717년(숙종 43) 사액현판이 철거되었다가 1722년(경종 2)에 회복되었고 1781년(정종 5)에 나라에서 중수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라고 합니다.

 

 

강당은 지붕의 형태가 2중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건물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이지만 박공 아랫부분에 내림지붕을 덧붙여 둔 것이 특징입니다.

 

중앙의 3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그 좌우에 각각 2칸 규모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고 툇마루 밑으로는 함실아궁이를 두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부터 안내를 해 주신 분은 논산문화원 류제협원장이신데 쉽고 간결한 해설에 다들 귀기울여 듣게 되었는데.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곳 노강서원 역시 유림들에 의하여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선현들을 위한 제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계룡도령의 생각으로는 여러장소에서 각각 제사를 거행할 것이 아니고 여러 서원을 돌면서 하든지 한곳으로 통일해서 제사를 봉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논산시나 여러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해결하면 좋지 않을까요?

설마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느라 통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쥬???

이곳 노강서원을 나온 계룡도령일행은 노서학파(?)의 중심이라 할 윤선거(尹宣擧) 후손들의 중심이 되는 제실인 병사로 향했습니다.

 

이 병사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올린 적이 있어 참고하시게 링크를 올림으로 대신합니다.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2]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 윤증이 속한 파평윤씨 노종파 역사속 인물 이야기]

 

 

병사를 둘러 본 계룡도령은 병사저수지 건너편에 위치한 종학당으로 향했습니다.

 

종학당은 조선 중기의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사학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배우는 모든 이들이 장학금(?)을 받고 다닌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곳 역시 지난번  올린 글이 있어 이로 대체를 하렵니다.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3] [최초의 사학이라 할 파평윤씨 노종파의 종중학교 종학원이야기]

 

이날 이곳에서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찾아 그 가치를 엿볼 수 있게 하였지만, 아쉬운 것은 관리 소홀로 인해 화재가 발생 해 주요건물들이 복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실수가 아닌 의도로 많은 유적들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4대강사업을 들 수 있는데, 그저 공사의 편리성을 추구하다 보니 발견된 유물을 의도적으로 파괴해 버리가나 훼손해버리는 경우를 목도해 왔습니다.

 

돈에, 생산성에 미쳐 돌아가는 현실을 볼 때 우리 조상들의 은근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이 시대에 다시 배워야 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날, 종학당을 끝으로 '기호유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막을 내렸습니다만,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는 짧지만 긴 1박2일간의 여행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민속놀이 체험의 성적에 따라 고르게 나누어 준 상품들로 다들 웃음을 머금는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계룡도령이 깨소금이라고 불렀던 이쁜 아이가 상을 받는 모습입니다.


애초부터 등수란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모든 가족에게 고루 상품이 돌아가도록 배려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남역사박물관 진행팀들의 배려가 돋보였습니다.



 

충남 역사박물관 오민석 관장은 “1박 2일간 진행된 프로그램에 참여자 모두의 적극적이며 진지한 모습에 놀랐고 앞으로 담당자들이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보답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1박2일간 진행된 프로그램은 참여자 모두의 찬사를 받는 알찬 내용이었으며 참여자 모두의 진지한 태도에 프로그램에 참여한 진행자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5월 12일에 떠나는 두 번째 탐방은 기호유학의 대표적 유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처향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 신청된 아산 외암민속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을 찾아갑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지성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정옥자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에 대한 특강을 펼칠 예정이며, 국악계를 대표하는 명창 안숙선 선생과 함께하는 ‘우리 소리 여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일정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일정
-일 시 : 5월 12일 오후 5시 30분∼8시 30분
-장 소 : 아산외암민속마을(교수댁) 특설 야외무대
-강 연 : 정옥자 교수에게 듣는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5시 30분∼7시)
-공 연 : 안숙선 명창과 함께하는 우리 소리 여행(7시 30분∼8시 30분)
-주 최 : 충청남도, 아산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아산외암민속마을
-주 관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참가 비용 : 무료
-문의 : 041-856-8608(충남역사박물관 박물관운영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http://www.cihc.or.kr

 

 

이제 이번 여행에서 가진 여러가지 체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전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2년 4월 28일부터 1박2일간 충남명가 탐방을 다녀 온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