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풍경이야기

2012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2012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대행 김정섭)은 지난 9월 1일 부터 1박 2일간

대한민국 군의 중심인 계룡대 삼군본부 영관급 장교 가족들과 함께하는 2012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제4차 행사인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라는 제하의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이 있어

계룡도령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날 열린 4차 행사는 충남역사박물관을 출발하여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추사고택 일원의 기념관과 추사묘역,

추사고택, 화순옹주정려, 추사의 상징과 같은 백송을 아우르고 추사의 글이 각인되어 있는 화암사와

추사가 비문을 쓴 상산황씨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를 거쳐 서산 김기현 가옥[계암고택]에 도착해

인문학 강의는 '추사 이야기'를 쓴 표윤명소설가의 추사의 생애와 추사체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시대 한류 스타라 할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가 시원한 초가을의 밤을 밝혔고,

이어진 흥겨운 우리 가락 고택음악회가 열려 '큰댁어울'의 대금연주와 함께하는 뜻깊은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이어 계암고택의 종부가 직접 만든 퓨전 한식으로 든든한 아침을 즐긴 후

김기현 종손과 함께 정순왕후 생가와 추사의 암각 취석을

서산 대산리의 추사 어사비에 이어 아산 외암민속마을 추사의 처향인

건재고택을 포함한 외암민속마을 답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실사구시를 주창한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합니다.

 

조선 후기의 명문가 노론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경험한 학자이며, 굴곡된 삶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의 일가를 이룩하였는데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김정희는 북학사상의 심화단계로서[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며 실사구시학파를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청나라의 고증학을 적극 수용하여‘실제적인 일에서 옮음을 구하고, 징험 없이 믿지 않는다[實事求是無徵不信]’는 실학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대부 출신 제자 및 중인 출신 제자들은 다함께 북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되는 시대에 교량역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181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규장각(奎章閣) 대교(待敎)를 거쳐 벼슬이 사조참판(史曹參判)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고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제(自題)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 而得之 非一時之事也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 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萊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 而交?」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 自抜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 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亦 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巳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嗚呼 西京淳厚之世 以 汲 鄭 之賢賓客興之 盛衰 如下邳構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이번 행사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예산 추사 기념관에서부터 표윤명소설가의 안내와 해설로

 

추사 김정희에 다가선 일행들은 조선후기 한반도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추사를 알아가면서

감동과 경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묘소를 참배하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는

김정희 선생의 고택(金正喜先生古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흔히 추사고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김정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건립한 주택으로

김한신은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는데,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이에 옹주 또한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곡기를 끊고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추사고택 뒷산 묘역에는 두 내외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99칸 집이었다고 하나, 현재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가 남아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만들어진 전형적인 중부지방 반가의 모습으로 실제 쓰임새에 맞게 문과 창을 낸

실용적인 구조의 건물입니다.

 

이곳에 있는 우물이 복원되어 있는데 고증의 잘못으로 엉터리 복원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물맛이라 차고 시원한 물 맛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길어다 먹기도 한답니다.

 

 

추사고택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장된 묘가 있고 그 곁에는 화순옹주홍문이 있습니다.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입니다.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는 1732년 김한신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고하는데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고하며

지금의 열녀문은 정조가 내린 것으로,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합니다.

 
열녀문은 약 200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운 형태인데

대문은 완전히 닫혀있지 않고 약간 열려있어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홍문이 있는 재실은 지금은 불에 타 버리고 주춧돌들만 남아 있으며

평소 열지 않아 담 너머로만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번에 행운이 따라서인지 안까지 들어가 구경을 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홍문 재실 안에서 담은 몇 되지 않는 사진일 것입니다.
^^

 

이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희귀한 모습의 백송[白松]을 만났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백송!!!


아마 추사 김정희도 처음 만난 백송의 모습에 매료되어 씨앗을 가져와 심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주변에 자손들이 자라고 있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24세 때인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김정희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준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용산이라 불리며 솟은 낮은 산 아래 자리한 추사고택과

화순옹주 홍문 주변을 돌아 화암사로 이어지는 약 2킬로미터 거리의 용산탐방로가 잘 다듬어져 있어

이 길을 따라 걷거나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화암사로 가면

화암사 뒷편에 둘려진 병풍바위에 새겨진 미려하면서도 힘찬 추사의 글씨를 직접 볼수있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1752년(영조 28)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는 화암사는

양반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절집으로 처음에 주택으로 사용하던 것을 절로 개조한 것으로 보여지는 특이한 형태의 절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70평생에 벼루 열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정희선생 필적암각문(金正喜先生筆蹟岩刻文)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는데

추사고택에서 멀지 않은 위치인 오석산(烏石山) 중턱에 위치한 화암사(華巖寺) 뒤편 바위에 새겨진

김정희 선생의 글씨입니다.


화암사가 세워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암사의 뒤편 바위에는 각각 시를 읊을 만한 좋은 경치란 뜻의‘시경(詩境)’,과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글씨에 대해 대부분 인도의 옛날 선생,

즉 석가모니를 뜻하는 글이라고 해석하며 추사의 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계룡도령은 이와는 좀 다른 생각입니다.

 

추사의 503여 종 호 중에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이라는 호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천축고선생이라는 호는 추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붙여 부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자신에게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지는 않는데

천축고선생이라고 하며 거기다 남의 집을 높여 부르는 말인 댁[宅]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추사의 글이 아니라 후학이나 주변 지인들이 쓴 글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앞으로 사학에 정통하고 밝은 분이 정리해 주시길 이 자리를 빌어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약 500m떨어진 바위에‘소봉래(小蓬來)’라고 새겨져 있고

이 글자 밑에는 작은 글씨로‘추사제(秋史題)’라고 새겨져 있어, 김정희가 직접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이어 도착 한 상산 황씨의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에서

일명 한다리 김문이라는 명문가가 탄생하게된 연유를 알게되었습니다.

 

추사의 11대 조모인 상산 황씨는 경주 김씨인 김연의 계모로 고향이 서산 대교리[한다리]였기 때문에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단구자 김적, 학주 김홍욱, 정순왕후, 또 다른 줄기로

추사 가문인 김흥경, 월성위 김한신,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이 상산 황씨의 비문을 쓴 사람이 바로 추사 김정희인데

너도나도 탁본을 떠가는 바람에 비가 온통 먹칠 투성이라더니 근래에 새로이 만든 비석인 듯 하였습니다.

 

 

개심사를 내려와 사하촌에서 맛있게 산채 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착한 계암고택[김기현 가옥]입니다.

 

벽에는 '한다리 고택 음악회' 임동창 풍류 서산아리랑이 2012년 9월 15일 오후 7시 30분에 열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연주가겸 작곡가인 임동창씨입니다.

 

하루쯤은 콘크리트 집에서 벗어나 서산 김기현가옥에서 하룻밤 묵어보는 건 어떠세요?

(문의 : 041-688-1182, 010-3045-8273 http://blog.naver.com/gyeam )

 

서산고택 김기현가옥에서 한다리 고택음악회를 즐기며 깊어가는 가을의 향취를 임동창의 풍류와 함께 한다면

2012년이 보다 특별한 감동으로 남지 않을까요?

 

공연과람은 무료이니 격조높은 공연을 가족과 함께 즐겨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산 김기현 가옥(瑞山金基顯家屋)은 중요민속자료 제199호로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5번지에

효종이 김홍욱(金弘郁, 1602∼1654)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순왕후 생가와 붙어 있는 계암고택은

평야지역에 낮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북동향 기와집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행랑채의 좌측 끝에 1칸 바깥대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으며,

안채 뒤뜰에 3칸 초당(草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김기현 가옥이 위치한 한다리마을은 경주 김씨 서산파의 집성촌으로

추사 김정희가 여기 한다리 김문의 후손이며

또한 이곳에는 한림학사 용계 김지남 선생이 죽장망해로 자주 산책을 하며 시를 읊던 단구대가 있고

마치 용이 낳은 알처럼 생긴 둥근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용유단도 있습니다..

 

김기현 가옥에 도착하여 한옥에서의 하룻밤에 대한 설레임 속에 방을 배정받고 여장을 풀고는

계암고택 안채의 뜰에 모여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추사체에 대한 인문학 특강을

'추사 이야기'를 쓴 표윤명소설가로 부터 들으며 중국에 한류를 불어 넣은 김정희선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에 이어 열린 큰댁어울의 국악한마당은 초가을의 밤하늘에 은은한 우리가락의 선율로 감동의 향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계암고택의 종손 김기현선생님과 함께 추사에 읽힌 이야기며 한다리 김문,

그리고 한다리의 옛 정취에 대해 묻고 답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 단체 사진 중에 김기현님의 앞에 앉은 아이가 김기현선생님의 외손녀인 6살배기 김본입니다.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외할머니와 서울대에서 바이얼린을 전공한 피가 흘러서 일까요?
응접실에서 계룡도령과 놀다가 큰댁어울의 연주가 시작되자

바로 마당으로 나가 선율에 몸을 맡기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듣고 있습니다.

ㅎㅎㅎ

 

은근 중독성이 강한 캐릭터의 꼬맹이 숙녀입니다.

나중에...
아주 유명한 음악가가 된다면 계룡도령이 최초로 김본의 이름을 블로그에 올린 사람으로 남겠죠?
^^

 

 

오늘 하루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김기현선생님의 초대로 몇명만 모인 응접실에서 간단한 포도주 파티가 열렸습니다.

 

안주는 김기현선생님의 사모님께서 개발한 족편!!!

뼈를 제거하고 살과 껍질 등 콜라겐 덩어리를 굳혀서 얇게 썰어서 내어 놓으셨는데...
입안에서 그냥 살살 녹아 버립니다.

 

한옥 스테이와 인문학, 그리고 추사에 대한 이야기로 자정을 넘기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계룡도령의 코고는 소리에 주변은 초토화되었다는 전설이 남아버렸습니다.

 

ㅠ.ㅠ;

 

 

이른 아침...

6시도 못되어서 충남역사박물관 민정희 팀장의 알람 소리에 잠이 깬 계룡도령은 근처의 단구대로 향했습니다.

 

"단구대는 한림학사 용계 김지남(단구자 김적 선생의 종매부) 선생이 집에 돌아오면 죽장망혜로 자주 산책하던 곳으로 봄이면 주변일대가 복숭아 꽃으로 덮고 창안절벽 밑에 한다리천이 흐르며, 푸른노송이 달빛에 비쳐든 모습은 가히 선경인양 아름다웠으며 기암괴석이 많아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에 그 수려함을 사랑하고 아늑한 절경을 바라보면서 이 언덕을 단구라 이름 했다 한다. 당시(서기 1600년경) 절벽 밑의 대교천에는 물이 맑고 깊어 노니는 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옆에는 큰 암석이 있어 십여명이 앉을만 하고 절반 가량은 시내속으로 들어가 있는데 꽃과 풀이 돌틈에 많이 자라 있으며 푸른 소나무 10여 그루가 시냇가에 서 있으므로 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서산의 옛읍지 호산록에 소개되어 있다.

 

그 후 선비학자 김적 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여 이곳 절벽아래 암석에 대를 쌓아 단구대라 이르고 마침내 자기의 호를 단구자라 하였는데 때론 절경인 단구대 아래 대교천에 일엽편주를 띄워 연하를 벗 삼으며 벗들과 인근마을 노인과 선비들을 불러 종일토록 풍류를 즐기었는데 특히 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 선생이 함께 수학하며 거닐던 곳이라 전해온다. 또한 단구자 김적 선생은 수천석의 곡식을 임진왜란 후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 구휼에 선뜻 희사하는 등 애민주의 공적을 남긴 바 있고 후일 송곡향천사에 배향되었다. 이제 덤불속에서 단구유허를 찾아 주변을 정리하여 옛 모습을 되살리고 작은돌에다 단구대의 유래를 새겨 길이 보전코저 하는 바이다(음암면 향토발전추진회)."

 

단구대에 도착을 해보니 반석은 간데없고 주변을 제방으로 막아 놓은 모습에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둑방을 조성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반석을 다 살려 놓고 조금 돌아가도록 길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더 상류에 있는 용유대로 향했습니다.

작은 개울이 합쳐지는 합수부에서 조금 윗쪽에 자리한 용유대는

성암지로부터 4.3km, 용비지로부터 8.3km지점 유계리 앞을 도도히 흐르는 도당천의 한가운데

알처럼 거대한 둥근바위가 모여있는 풍경인데

말 그대로 용이 노닐던 곳이라고 이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용유대는 단구자 김적(1564~1646)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껴 "평릉도찰방"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낸곳으로

큰바위에"단구김선생유상고허적"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벼루로 이용하였다는 네모진 자국도 있다고 합니다.

 

 

김기현가옥에서 사모님이 정성스레 준비한 현미밥과 어우러진 퓨전 한식으로

맛있고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김기현선생님의 안내로 이웃한 정순왕후 생가를 방문해

후손인 김기흥 전서산시장[민선1.2기] 사모님으로부터 화단에 있는 다양한 야생화 중에서

두루미천남성 3촉을 선물로[어거지로 얻은 것인가???]로 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곧 답으로 타래붓꽃을 가져갈 생각입니다.

^^

 

정순왕후 생가에 이어 추사의 암각이 있는 취석을 보고

당시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추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자리를 떳습니다.

 

이어진 일정은 서산 대산리의 추사 어사비...

다음으로 일정의 마지막으로 들린 외암민속마을의 건재고택입니다.

 

 

건재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처향으로 현재 경매의 과정에 놓여있는 문화재입니다.

 

 

외암민속마을을 끝으로 차에 타자 곧 소나기가 쏱아집니다.
ㅎㅎㅎ

왕 재수!!!

다행히 비를 맞은 일행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번 [2012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에 참여한

삼군본부 영관급 장교 가족들은 다양한 연령층의 자녀들과 함께 해

민족적 자긍심과 미래 지향적 사고로의 전환을 위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으며

전통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고 다들 행복해 했습니다.

 

외암 민속마을을 돌아보며 마친 이번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난 탐사여행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주관한 것으로

지난해 '돈암서원 인문마당'의 성공 개최를 토대로

올해부터 역사학계와 문화예술단체 전문가 13명으로 '기호유교문화 인문학포럼 기획위원회'를 구성, 운영 중인데

기획위는 올해 5차례의 '기호유학 인문마당', 6차례의 기호유학 주요 인물과 종가를 찾아 떠나는

'1박2일 유적답사ㆍ종가 체험',

강연과 작은 공연이 어울리는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탐방은

9월 8일∼9일에 KAIST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사계김장생, 우암송시열에 대해 논산 명재고택에서 고동환(KAIST 교수)로 부터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10월 6일∼7일에 대전문화연대와 함께

추사 김정희에 대한 추사 이야기를 서산 김기현 가옥[계암고택]에서

표윤명(소설가, 예산出)씨로부터 듣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호유학 인문마당은

9월 15일(토) 예산 추사고택에서 유홍준(전 문화재청장)과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한 특강이 있고,

10월 13일(토) 논산 돈암서원 박범신(소설가)의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를 특강으로

진행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문의 : 041-856-8608(충남역사박물관 박물관운영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http://www.cihc.or.kr

 

 

 

 

이 글과 사진의 일부는 충청남도의 충남넷과 금강뉴스에 기사화되었습니다.

충남넷 바로가기

http://chungnam.net/mediaMain.do?article_no=MD0000467094&med_action=view&mnu_cd=CNNMENU00014

금강뉴스 바로가기

http://www.k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