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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충남교육연수원 문화 창의체험 직무연수팀 초등학교 교사 30명과 함께 한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대행 김정섭)은 지난 5월11일 부터 1박 2일간 충청남도교육연수원과 함께 초.중.고 교사들의 ' 2013 역사ㆍ문화ㆍ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와 함께하는 총 6회의 행사 중 첫번째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라는 제하의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이 충남도내 초등학교 교사 30명과 함께하게 되어 계룡도령도 다녀왔습니다. 

 

때 마침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진행된 탐사라 평소 선생님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하여 더 보람된 일정인 듯합니다.

 

이날 열린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 1차 행사는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로 충남역사박물관을 관람한 후 10시경 출발하여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추사고택 일원의 기념관과 추사묘역, 추사고택, 화순옹주정려, 추사의 상징과 같은 백송을 아우르고 추사의 글이 각인되어 있는 화암사와 추사가 비문을 쓴 상산황씨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를 거쳐 서산 김기현 가옥[계암고택]에 도착해 단구대와 용유대를 보고 저물녘에 시작된 인문학 강의는 '추사 이야기'를 쓴 표윤명소설가의 추사의 생애와 추사체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시대 한류 스타라 할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가 서늘한 초여름의 밤을 밝혔고, 이어진 떡살 체험은 커다란 즐거움을 밤하늘로 피워 올렸으며 흥겨운 우리 가락을 공주 소리꾼 이걸재석장리박물관장과 제병숙고수의 무대로 함께 즐겼습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까지 지친 기색없이 즐거운 시간을 지낸 선생님들은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며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맞았고 다음날 계암고택의 종부가 직접 만든 퓨전 한식으로 든든한 아침을 즐긴 후 김기현 종손과 함께 정순왕후 생가와 추사의 암각 취석을 서산 대산리의 추사 어사비에 이어 아산 외암민속마을 추사의 처향인 건재고택을 포함한 외암민속마을 답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럼 이번 탐방 중에 만나게 된 추사 김정희는 어떤 사람일까요?

 

실사구시를 주창한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합니다.

 

조선 후기의 명문가 노론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경험한 학자이며, 굴곡된 삶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의 일가를 이룩하였는데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김정희는 북학사상의 심화단계로서[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며 실사구시학파를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청나라의 고증학을 적극 수용하여‘실제적인 일에서 옮음을 구하고, 징험 없이 믿지 않는다[實事求是無徵不信]’는 실학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대부 출신 제자 및 중인 출신 제자들은 다함께 북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되는 시대에 교량역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181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규장각(奎章閣) 대교(待敎)를 거쳐 벼슬이 사조참판(史曹參判)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고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제(自題)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 而得之 非一時之事也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 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萊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 而交?」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 自抜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 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亦 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巳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嗚呼 西京淳厚之世 以 汲 鄭 之賢賓客興之 盛衰 如下邳構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이번 탐방에서 충남역사박물관을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예산 추사 기념관에서부터 잘 생긴 소설가에 초등학교 교사인 표윤명선생님의 안내와 해설로 추사 김정희에 한발 더 다가선 일행들은 조선후기 한반도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추사를 알아가면서 초등학교 선생님들 다운 밝은 표정으로 시종일관 감동과 경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날 유난히 더웠던 날씨였지만 열의가 가득한 선생님들은 추사 김정희의 묘소를 참배하고 소나무 그늘에 앉아 왕자 못과 묘소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고 잘 손질된 꽃길을 걸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는 김정희 선생의 고택(金正喜先生古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흔히 추사고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김정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건립한 주택으로 김한신은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는데,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이에 옹주 또한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곡기를 끊고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추사고택 뒷산 묘역에는 두 내외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99칸 집이었다고 하나, 현재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가 남아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만들어진 전형적인 중부지방 반가의 모습으로 실제 쓰임새에 맞게 문과 창을 낸 실용적인 구조의 건물입니다.

 

 

활짝 핀 목단의 아름다움과 우리 건축이 주는 선의 미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택에서 교단에서 보여지는 엄격한 모습의 선생님이기 보다는 마치 봄나들이 나온 새색시마냥 들떠하며 아름다운 꽃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추사고택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장된 묘가 있고 그 곁에는 화순옹주홍문이 있습니다.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입니다.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는 1732년 김한신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고하는데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고하며 지금의 열녀문은 정조가 내린 것으로,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합니다.

 

열녀문은 약 200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운 형태인데 대문은 완전히 닫혀있지 않고 약간 열려있는데 이는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홍문에 있던 재실은 지금은 불에 타 버리고 주춧돌들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는데 남은 자료가 부족해 복원이 어려운 듯 했습니다.

 

이어 만난 추사가 심었다고하는 희귀한 모습의 백송[白松], 백송은 30년 이상이 되어야 껍질이 하얗게 변한다고 하는데 아마 추사 김정희도 처음 만난 백송의 모습에 매료되어 씨앗을 가져와 심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주변에 자손들이 자라고 있기도 합니다만 기후가 맞지 않아 활발한 성장을 보이지 않아 담당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24세 때인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 3개를 가지고 와서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김정희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준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용산이라 불리며 솟은 낮은 산 아래 자리한 추사고택과 화순옹주 홍문 주변을 돌아 화암사로 이어지는 약 2킬로미터 거리의 용산탐방로가 잘 다듬어져 있어 이 길을 따라 걷거나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화암사로 가면 화암사 뒷편에 둘려진 병풍바위에 새겨진 미려하면서도 힘찬 추사의 글씨를 직접 볼수있어 일행은 그리로 향했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1752년(영조 28)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는 화암사는 양반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절집으로 반가의 원찰[願刹]이었습니다.

 

 

화암사가 세워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암사의 뒤편 바위에는 각각 시를 읊을 만한 좋은 경치란 뜻의‘시경(詩境)’,과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부처를 이르는 말인 천축고선생을 통해 천축고선생의 집! 다시 말해서 절이라는 의미를 추사 나름의 해학적으로 표시한 것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70평생에 벼루 열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정희선생 필적암각문(金正喜先生筆蹟岩刻文)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는데 추사고택에서 멀지 않은 위치인 오석산(烏石山) 중턱에 위치한 화암사(華巖寺) 뒤편 바위에 새겨진 김정희 선생의 글씨입니다.

 

 

이날은 우연히 충남역사박물관 오석민관장에게 수학한 한신대학교 학생들이 탁본을 뜨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었는데 덕분에 더욱 더 또렸하게 추사의 필체를 볼 수 있어 글씨에서 느껴지는 힘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약 500m떨어진 바위에‘소봉래(小蓬來)’라고 새겨져 있고 이 글자 밑에는 작은 글씨로‘추사제(秋史題)’라고 새겨져 있어, 김정희가 직접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더운 날씨임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선생님들과의 산길 탐방 중에 만나게 되는 많은 식물과 꽃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선생님들을 계룡도령이 친절하게 설명하며 가르치는 영광스러운 시간도 가졌답니다.

^^;

 

이어 도착 한 상산 황씨의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는 한다리김씨의 원찰[願刹]로 그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던 고적한 절집이었으나 몇일전 방송에서 만개한 개심사 왕벚꽃의 모습이 알려져 토요일을 맞아 개심사를 찾은 인파들로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이곳 개심사에서 일명 한다리 김문이라는 명문가가 탄생하게된 연유를 알게되는데 추사의 11대 조모인 상산 황씨는 경주 김씨인 김연의 계모로 고향이 서산 대교리[한다리]였기 때문에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단구자 김적, 학주 김홍욱, 정순왕후, 또 다른 줄기로 추사 가문인 김흥경, 월성위 김한신,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이 상산 황씨의 비문을 쓴 사람이 바로 추사 김정희인데 너도나도 탁본을 떠가는 바람에 비가 온통 먹칠 투성이라더니 근래에 새로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비석문의 해설까지 담아 세운 비석도 같이 있습니다.

 

 

개심사를 내려와 사하촌에서 맛있는 산채 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지난 번 식사 때와는 달리 너무 많은 사람 때문인지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들어 버렸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란 쉽지 않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함께 한 충남의 각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한분 한분 모두가 초심을 잃지 않고 국가의 동량을 가르친다는 사명감으로 생활하는 듯 보여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저녘식사를 마치고 도착한 서산 계암고택[김기현 가옥]입니다.

 

하루쯤은 콘크리트 집에서 벗어나 서산 김기현가옥에서 하룻밤 묵어보는 건 어떠세요?

 

(문의 : 041-688-1182, 010-3045-8273 http://blog.naver.com/gyeam )

  

      

서산 김기현 가옥(瑞山金基顯家屋)은 중요민속자료 제199호로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5번지에 효종이 김홍욱(金弘郁, 1602∼1654)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순왕후 생가와 붙어 있는 계암고택은 평야지역에 낮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북동향 기와집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행랑채의 좌측 끝에 1칸 바깥 대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으며, 안채 뒤뜰에 3칸 초당(草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김기현 가옥이 위치한 한다리마을은 경주 김씨 서산파의 집성촌으로 추사 김정희가 여기 한다리 김문의 후손이며 또한 이곳에는 한림학사 용계 김지남 선생이 죽장망해로 자주 산책을 하며 시를 읊던 단구대가 있고 마치 용이 낳은 알처럼 생긴 둥근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용유단도 있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 온 순간...
계암고택에서 웅성이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습니다.
ㅠ.ㅠ
물어 물어 찾아 보니 모두 단구대로 향했다는 사실...

 

고개들어 멀리 내다보니 이미 단구대에 거의 다 도착을 한 상태라 부득이 이웃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내달렸습니다.
^^ 

겨우 일행을 따라 잡고 합류를 했는데 아뿔싸...어딘가에서 계룡도령의 애기인 데스막투의 아이피스가 사라진 것입니다.
ㅠ.ㅠ 

 

잠시 자전거는 뚝방길 가의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두고 일행과 합류하여 단구대로 향했습니다.


해질녘 걸어 도착한 단구대에는 진홍의 영산홍이 가득 피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유연자적하던 김지남 선생의 단심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단구대는 한림학사 용계 김지남(단구자 김적 선생의 종매부) 선생이 집에 돌아오면 죽장망혜로 자주 산책하던 곳으로 봄이면 주변일대가 복숭아 꽃으로 덮고 창안절벽 밑에 한다리천이 흐르며, 푸른노송이 달빛에 비쳐든 모습은 가히 선경인양 아름다웠으며 기암괴석이 많아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에 그 수려함을 사랑하고 아늑한 절경을 바라보면서 이 언덕을 단구라 이름 했다 한다. 당시(서기 1600년경) 절벽 밑의 대교천에는 물이 맑고 깊어 노니는 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옆에는 큰 암석이 있어 십여명이 앉을만 하고 절반 가량은 시내속으로 들어가 있는데 꽃과 풀이 돌틈에 많이 자라 있으며 푸른 소나무 10여 그루가 시냇가에 서 있으므로 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서산의 옛읍지 호산록에 소개되어 있다.

 

그 후 선비학자 김적 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여 이곳 절벽아래 암석에 대를 쌓아 단구대라 이르고 마침내 자기의 호를 단구자라 하였는데 때론 절경인 단구대 아래 대교천에 일엽편주를 띄워 연하를 벗 삼으며 벗들과 인근마을 노인과 선비들을 불러 종일토록 풍류를 즐기었는데 특히 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 선생이 함께 수학하며 거닐던 곳이라 전해온다. 또한 단구자 김적 선생은 수천석의 곡식을 임진왜란 후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 구휼에 선뜻 희사하는 등 애민주의 공적을 남긴 바 있고 후일 송곡향천사에 배향되었다. 이제 덤불속에서 단구유허를 찾아 주변을 정리하여 옛 모습을 되살리고 작은돌에다 단구대의 유래를 새겨 길이 보전코저 하는 바이다(음암면 향토발전추진회)."

 

 

조금 더 상류에 있는 용유대로 향했습니다.

 

작은 개울이 합쳐지는 합수부에서 조금 윗쪽에 자리한 용유대는 성암지로부터 4.3km, 용비지로부터 8.3km지점 유계리 앞을 도도히 흐르는 도당천의 한가운데 알처럼 거대한 둥근바위가 모여있는 풍경인데 말 그대로 용이 노닐던 곳이라고 이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용유대는 단구자 김적(1564~1646)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껴 "평릉도찰방"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낸곳으로 큰바위에 "단구김선생유상고허적"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벼루로 이용하였다는 네모진 자국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용유대까지 들러 돌아 나오는데...

 

계룡도령이 세워 둔 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허걱~~~!!!

순간 머리는 복잡해 집니다.

김기현선생님댁의 자전거도 아니고...

이웃집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임차한 것인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이래서는 않되는 것 아닌가? 등등...

몇백미터 정도의 길을 되돌아 오면서 황당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누군가의 장난인지 자전거는 계암고택 입구에서 잘 세워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만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ㅠ.ㅠ

 

 

김기현 가옥에 도착하여 단구대와 용유대를 다녀 온 일행들은 한옥에서의 하룻밤에 대한 설레임 속에 방을 배정받고 여장을 풀고는 계암고택 안채의 뜰에 모여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추사체에 대한 인문학 특강을 '추사 이야기'를 쓴 표윤명소설가로 부터 들으며 중국에 한류를 불어 넣은 김정희선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에 이어 오석민 충남역사박물관장의 짧은 강연이 이어졌는데 싸늘한 날씨에도 모두가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하는 열의에 감동을 했습니다.

 

이불을 덮어 쓴 모습은 초상권 침해의 우려가 있어 올리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ㅠ.ㅠ

 

 

이어 명가 전래의 떡살체험이 이어졌는데 먹을 거리가 나와서 일까요? 모두의 눈이 반짝 반짝~~~!!!

ㅎㅎㅎ

 

손은 떡 만들기와 입에 넣기로 바쁘기 그지 없습니다.

 

 

어때요?
전문가가 만든 듯 멋지게 만들지 않았나요?

 

떡살 체험을 마치고 이어진 작은 공연은 흥겨운 우리 가락을 공주 소리꾼 이걸재석장리박물관장과 제병숙고수의 무대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이걸재관장이 찾아 내어 알리고 있는 공주아리랑은 대부분 처음 듣는 것이라 귀를 곧추 세우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전통 고택 한옥에서의 하룻밤이 깊어가고 모두들 행복한 꿈나라로 들고 다시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은 계암고택 종부님의 퓨전 한식!!!


모두가 손을 모아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


특히 신혼 15일차를 맞은 부부선생님의 행복한 미소가 담긴 두부전은 고소함이 넘쳐납니다.

 

보이시죠?
ㅎㅎㅎ

 

 

김기현가옥에서 사모님이 정성스레 준비한 현미밥과 어우러진 퓨전 한식으로 맛있고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김기현선생님의 안내로 이웃한 정순왕후 생가를 방문해 후손인 김기흥 전서산시장[민선1.2기] 사모님의 분재 등 으로 가득한 안뜰과 화단을 감탄 속에 구경하며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로 새로운 역사를 맞이 합니다.

 

매번 들릴 때마다 달라지고 많아지는 화분과 식물들을 보면서 유난히 식물을 좋아하는 계룡도령이라서인지 참 좋은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이곳 정순왕후 생가에서 야생화회원전이 열린다고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네요. 

 

 

정순왕후 생가에 이어 농로를 따라 걸어 추사의 암각이 있는 취석을 보고 당시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추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자리를 떳습니다.

 

 

이어진 일정은 서산 대산리의 추사 어사비...

 

다음으로 일정은 이번 탐방의 마지막으로 외암민속마을 추사 김정희의 처향인 건재고택입니다.

 

  

이번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에 참여한 충남도 초등학교 교사 30명은 "한류의 원조 추사를 알게 되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전통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조상들의 지혜를 읽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고 말하며 "이 느낌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외암 민속마을을 돌아보며 마친 이번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난 탐사여행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주관한 것으로 지난해 큰 성원과 관심 속에 치뤄진 2012년 ‘기호유교문화 인문학포럼’에 대한 후속 방안으로 충남에 산재한 기호유학 관련 역사문화자원의 현장에서 강의와 토론, 음악회 및 답사가 병행되는 고품질 인문학 프로그램을 개최하여 해당 시군과 연합 행사로 확산시킴과 동시에, 다양한 계층을 타켓으로 삼아 기호유교 문화자원의 잠재력을 각인 충남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있고, 향후 충청유교문화권 개발사업에 있어서의 추진 동력 확보를 위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하는 행사입니다.

 

충남역사박물관(관장 오석민)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하는 강연과 국악 공연이 어우러지는 야외 강연인 '기호유학 인문마당'이 총 5회, 답사와 종가문화체험 그리고 작은 공연이 있는 종가 탐방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 명가 탐방'이 총 6회, 특정 문중 및 학예사 대상의 고문서·유물 강의 '기호유교문화 아카데미'가 총 10회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 과정 중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 명가 탐방'의 경우 충청남도교육연수원과 함께 초.중.고 교사들의 ' 2013 역사ㆍ문화ㆍ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와 함께하게되어 더 큰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사의 수업 능력 및 창의적 체험활동 지도 능력 함양하고 직무연수 강화로 학교 현장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 체제 구축하기위한 방편으로 참여 중심의 체험식 연수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개인 역량 강화를 통해 창의적 체험 활동 지도 역량 강화로 학교에 대한 교육가족의 만족도를 제고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그리고 '기호유학 인문마당' 첫번째 마당이 아래와 같이 펼쳐집니다. 

 

                         일 시 :2013년 5월 25일(土) 오후 5시 30분∼8시 30분

            장 소 : 아산외암민속마을 교수댁 특설무대

                                                              특 강 : '우리삶의 자존감을 말한다 우리 음악의 매력' 임 동 창(풍류피아니스트)

음 악 회 : 노름마치, 흥야라 밴드

                          문의 : 041-856-8608(충남역사박물관 박물관운영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http://www.cihc.or.kr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연수에 함께하게 된 유쾌발랄한 모든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

 

 

[2013년 5월 11일 1박2일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을 다녀 온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