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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오늘 해경해체를 전격 선언한 것은 증거인멸 시도이다. 오늘 해경해체를 전격 선언한 것은 증거인멸 시도이다. ​ 오늘 대통령참칭하는 불법개표 부정선거사범인 박근혜가 해경해체를 전격선언했습니다. 이는 간판바꿔달기이며 특검에 대비한 전략일 뿐입니다. 특검을 수용한 이유가 여기 있는 듯... 특검을 실시해도 특검의 대상이 사라지고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겠죠? 그리고 마치 국민을 위헤 대단한 특단의 조치라도 내린 양 모양새도 갖추고, 책임자인 자신은 슬그머니 뒤로 숨는 아주 약삭빠른 전략 아닐까요? 해경이 해체되면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갈까요? 결국 국가안전처 만들면 해경 찌그래기들 또 다 몰려 가겠죠? ​ 하지만 특검의 대상은 사라지니 이거 끝내주는 술수 아닌가요? "수사·정보 기능을 경찰청으로 넘기고 해양 구조·구난과 해양경비 분야를 신설하는 국가안전처.. 더보기
[세월호] 해경의 교묘한 방해…이종인 대표 “적대감 느꼈다” [세월호] 해경의 교묘한 방해…이종인 대표 “적대감 느꼈다” 뉴스K | kukmin2013@gmail.com 다이빙벨 논란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어졌습니다. 비록 언론 보도가 엇갈려도 사실관계는 명확합니다. 다만 왜 이종인 대표가 다이빙벨의 성과를 확인하고도 철수를 결정했을까 이 의문에는 쉽게 답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어제 뉴스K는 이종인 대표가 수색보다 효과를 입증하는 쪽에 무게를 두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는 이대표가 사업적 성과 등을 노리고 그랬다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였고,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로 바로 이어서 해경 경비정의 다이빙벨 작업 방해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오늘 이와 관련한 추가 보도를 하려고 합니.. 더보기
[펌글] 관료와 돈, 그리고 대통령의 책임 관료와 돈, 그리고 대통령의 책임 2014년 4월 24일 물뚝심송 119 댓글 http://murutukus.kr/?p=6148 이번 사건의 원인에 대한 해석들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얘기했던 대통령과 관료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 돈으로 이어지는 해석을 해 보자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이해의 결과는 엄청난 분노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리 당부 드리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관료들의 행태와 거기에서 출발한 해석에 불과하지, 사회적 근거를 확보하고 주장하는 학술적이거나 정치적인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틀릴 가능성이 다분히 높은 개인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시작하겠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무능한 사고 대처.. 더보기
이번 세월호 사고로 주검 장사를 한 놈들 다 죄 받는다. 이번 세월호 사고로 주검 장사를 한 놈들 다 죄 받는다. ​ 오늘 우연히 아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들도 한번 보시죠. ​ 우리가 믿어야할 정부와 언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무엇? 어디? 어떤 것을 믿어야 활까요? 너무도 슬픈 이야기지만 이미 정부는 정부가 아닌 듯 합니다. 아래 글은 퍼 온 글입니다. =============================================================== ​ 여러분 SBS가 이 방송을 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고초기 구조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각 방송들과 언론들은 사고지점의 유속이 빠르고 바다물이 흐려 시계가 양호하지 못해 20센티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호들갑을 떨때였습니다. SBS리포터 한 명이 잠수.. 더보기
뉴스타파 애완견된 감시견 - 박근혜의 애완견과 '코드예산' (2014.1.10) 뉴스타파 애완견된 감시견 - 박근혜의 애완견과 '코드예산' (2014.1.10) 뉴스타파가 박근혜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각본을 입수했습니다. 기자들은 각본에 따라 배우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 "각본대로 묻고 답했다" 2. 브릿지영상 - 극장가는 길 3. 행복했던 공약, 불행한 예산 4. 박근혜 첫 예산... '코드'와 '월권'으로 얼룩 5. 뉴스타파 대자보 - 중앙대 청소노동자 윤화자 그리고 아래는 총살형을 받아야할 선거사범이면서 대통령 참칭녀 박근혜의 신년 구상 발표 기자회견 질문지입니다. 텍스트로 옮기면 2번째 질문자로 김종균 기자에서 박성준기자로 교체된 것 빼고는 기자회견 내용과 순서,질문 내용이 똑같습니다. 어떤 기자가 질문을 하던 상관 없다는 것이죠.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 더보기
교통사고 중 타이어가 뻐져 달려와 내 차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중 타이어가 뻐져 달려와 내 차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살아 오면서 어떤 교통사고를 경험하셨나요? 계룡도령은 오늘 정말 황당한 교통사고를 경험했습니다. 다름아니라 교차로에서 달리던 자동차의 타이어가 빠져 달려와 계룡도령의 애마를 들이 받는 희한한 경우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운전을 해 오면서 겪은 일 중에 가장 황당한 사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ㅠ.ㅠ 오늘 공주시내로 계룡도령의 2G 휴대폰의 수리를 위해 가던 중 소학삼거리 부분에서 갑자기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위 사진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달리던 자동차에서 갑자기 타이어 2개가 분리되어 계룡도령의 자동차로 달려 옵니다. 그 중하나는 달려 오다가 그냥 쓰러졌고, 나머지 하나는 거침없는 행보를 하더니 .. 더보기
대한민국 정치를 꿰뚫어 본[?] 예언 적 글 한토막이 주는 파장 2008년 8월 8일 모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린 글이 새삼 회자되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보는 한 시각입니다. 일면 공감도 가고, 일면 어이가 없지만 그저 무시하고 흘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래와 같은 글들이 난무합니다. 나도 민주당이 올바른 정치적 이념을 가졌다고 하면 당연히 민주당편이지ㅇㅇ 근데 현실은 북한에 나라팔아먹는 핵대중에 문죄인93% 박그네6%인 ㅂㅅ같은 지역감정 조장에 현실성 없는 복지정책에 나라망하는 지름길 아니겠노? 민주당의 정책은 당장 지금은 좋지만 길게보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다ㅉㅉ 그리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선동질로 야비하게 표얻으려는 근본없는 집단이라니까? 그리고 국정원녀에 십알단.. 더보기
박근혜의 애비 친일쿠데타 독재자 박정희의 친일 행각 재 조명 정의가 사라진 나라!!! 박근혜의 애비 친일쿠데타 독재자 박정희의 친일 행각 재 조명 박정희 전 대통령 혈서 쓰고 만주군 지원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창립 당시부터 일본인이 고문을 맡아 조종하였고,군대의 이동과 연습,장비 교체,인사 이동과 같은 주요 결정에 관동군(만주 주둔 일본 육군부대)의 승인을 받는 지휘체계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 뒷받침 신문 기사 공개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이 오는 8일 공개되는 친일인명사전에 실리는 데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뒷받침하는 신문 기사를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연구소는 5일 만주신문 1939년 3월 31.. 더보기
5.16을 맞아 생각하는 박정희시절의 고도성장? 박정희의 경제 실정에 대한 이야기 박정희 정권이 외환위기를 네 차례나 초래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첫째 위기는 1963년에 발생했다. 금융기관 동결, 정치자금 조성이 빚은 증권파동, 화폐증발 및 물가폭발과 그에 따른 화폐개혁 등이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발생시켰다. 미국의 긴급 지원을 받았음에도 위기가 지속되자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하여 외환을 구걸하였다. 둘째 위기는 1968년에 발생했다. 물가상승률이 매년 20% 전후에 이르자 국제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국제수지 적자가 커졌고, 결국 외환보유고가 고갈 직전에 이르러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셋째 위기는 1971년에 발생했다.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 누적되자 차관을 들여와 소위 차관기업을 147개나 설립했는데, 과도한 정치자금의 조성이 대기업을 포함하여 60% .. 더보기
박근혜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의 스위스 비밀 계좌와 이후락 부정축재 박정희 정권 시절 10년간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10월31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임자인 김형욱 중정부장과 함께 박 대통령 심복을 자임하며 온갖 공작정치로 유신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은 이후락씨는 한국 현대사를 암흑으로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권력 전면에 등장한 이후락씨는 그 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하자 39세의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6년간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1970년 6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아 다시 3년 동안 악명 높은 정치 공작을 벌여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