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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느끼는 것들

동행[同行]하며 동행[同幸]하자!!! 나누는 삶이 행복하다!!!





동행[同行]하며 동행[同幸]하자!!!

같이 가며 같이 행복하자!!!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

 

오늘 기사를 올리려고 들렀던 충남도정신문[http://news.chungnam.net]에 논산 화지중앙시장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재래시장의 현대화 모델 논산 화지중앙시장'이란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만,

[기사보기 =>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47729]

아직 정식 기사로서 글올림이 되거나 승인이 난것은 아니구요.

그냥 한번씩 충청남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지역정보를 주관적으로 정리해서 글을 올리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글을 올리고 그동안 무슨 변화가 있나 하고 궁금해 공지사항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지사항에 나에게는 너무도 감동적인 글귀가 있습니다.

바로

'동행[同行]하며 동행[同幸]하자!!!'

 

필자는 한동안 멍 해졌습니다.

우리가 잊고 살던 말이요 글...

그 잊고 살던 의미가 글로 새겨져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만 잘 살면...

내가 잘되면이라는 이기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었을까요?

 

필자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필자는 한번도 어머니 젖을 먹어보질 못했습니다.

5대독자 아들에게 젖조차 물리지 못한 내 어머니의 평생 한이기도 하구요.

분유를 먹으면 되지 않냐구요?

필자가 태어날 당시에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분유라는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든 물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50년대

미군부대에서 뒤로 나오는 물품들이 우리나라 산업[?]과 생활을 상당부분 지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수요는 넘치고 공급은 부족하니 그 당시 일본으로부터의 밀수라는 것이 성행 했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밀수의 천국인 부산에서 태어나 살았지만...

부피 크고 돈이 되지 않는 분유를 밀수하는 업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께서 내린 결론은 산양을 집에서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산양의 젖을...

그리고 밥물을 모유처럼 먹고 필자가 자랐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고가여서 함부로 먹기도 힘든 산양 젖이 당시에는 흔하게 키워서 짜 먹을 정도였다는 것이 믿어 지십니까?

 

어랏!!!

이야기가 엇길로 빠졌습니다.

 

하고 싶은이야기를 위해 서설이 너무 긴 듯합니다.

^^

 

그 산양들이 필자의 군것질을 위해 계속 번식을 했습니다.

어릴적 기억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시기에 필자가 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산양을 기르며 본 것들이지요.

 

그때 참으로 신기 했던 것은 무더운 여름에는 산양들이 서로 붙어서 지내고,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는 서로 떨어져 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궁금했습니다.

 

위 그림의 두 객체[거미와 익모초]는 누가 더 이익일까요?

 

 

그 궁금증은 곧 잊혀졌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정희 군사독재 철권 유신시대 언제인가 봅니다.

1970년대 학도 호국단이라는 것이 확대 되고 중딩 및 고삐리까지 관 주도의 여러 학생단조직이 생겨납니다.

물론 왕조와 같은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자는 술책이지요.

그렇다고 하구요. 

 

필자도 고삐리 시절 모 학생단체의 간부로 지내며,

나중에 걸레스님으로 유명해진 스님과 다른 일행이 함께하는 정담[? ㅎㅎㅎ]을 나누는 자리를 가지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산양들의 습성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전위 후위, 전생 후생, 업이나 윤회를 떠나

그 산양이라는 동물의 습성에 대해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양[그 당시 분명히 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은 질투와 시기가 많아

나라는 주체를 놓고 상대를 지나치게 견제를 합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 붙어 지내면,

나 라는 주체 때문에 대상이 더 따듯해지므로 이를 싫어해서 하는 행동이고,

여름 역시 더 시원해 질것을 걱정해 붙어지냅니다'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ㅠ.ㅠ

 

과연 그래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상징적인 이야기를 은유한 것이라 생각은 듭니다.

 

오늘 필자가 느낀 감동은 그런 것에 연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견주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친구와 길을 가다가도

주고 받은 것에 너무 집착하고 철저히 계산을 하며 살아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우리를 외치지만,

행동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은 아닐까요?

 

동업을 하면서도 신뢰는 없고 계산만 남아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니가 어떻게 했니가 있지

내가 어떻게 했다는 없습니다.

 

언젠가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계룡도령은 40대 이후부터 잘 아는 사람의 자녀나 형제가 결혼을 해 부조를 하게될 경우

반드시 친필로 글을 쓰고 그 글을 쓴 사이에 부조금을 넣습니다.

내용은 대충

'너가 나를 위해 무었이 될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너를 위해 무었이 될 것인가를 항상 추구 하라.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늘 염두에 두라'고 씁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득과 손실을 계산합니다.

너무도 급해서 절대 멀리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었일까요?

 

계룡도령 춘월이 생각하기에는 외로움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ㅠ.ㅠ

 

 

오늘 우연히 본 충남 도정신문의 인터넷 홈페이지 공지 글 중에서 본 것이지만

참으로 큰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합니다. 

 

가지려 하지 말고 놓으려고 합시다.

담으려 하지 말고 나누려 합시다.

 

 

 

[2010년 8월 18일 우연히 본 함께의 글에 취한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