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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남 여행]아산 맹씨행단에서 만나는 청백리의 향기 자랑스런 충남인 고불 맹사성

 

 

[충남 여행]

아산 맹씨행단에서 만나는 청백리의 향기 자랑스런 충남인 고불 맹사성

 

아산은 충무공 성웅이순신의 삶의 터전이었고,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 맹사성의 고향이며 대한민국 온천의 대명사인 온양온천의 고장입니다.

 

이곳 아산에는 충청도의 자랑인 조선시대 최고의 청백리라 일컫는 맹사성의 생가가 있습니다. 

맹사성[1360년~1438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86년(고려 우왕 1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431년[조선 세종 13년]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으며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맹사성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고 하며, 출입할 때에는 소[牛]타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하니 그의 소탈함이 묻어난다 하겠습니다.

 

선배인 영의정 성석린이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 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고 전해지니 그의 인품이 어떠한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한 맹사성이 살던 집인 맹씨행단[孟氏杏亶]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이기도 합니다.

 


 

맹씨행단의 입구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날 좀 늦은 시간이라 굳게 잠겨있었지만 부탁을 하면 열어는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춥고 늦은 시간 혼자 보겠다고 열어 달라기에는 마음이 허락치 않아 그냥 돌아섰습니다.

이곳에 보관된 유물은 맹사성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모아 두었으며 옥적(玉笛), 백옥인(白玉印), 포도문일월연(葡萄文日月硯), 수정비녀, 목칠도형배(木漆桃形杯) 등 5점도 있다고 하는데 이 5점의 유물들이 모두 맹사성의 유품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각기 고풍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중요민속자료 제225호로 지정된 젓대는 맹사성이 생애에 음악과 깊은 인연을 맺은 점으로 미뤄 볼 때 중요한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기념관을 돌아 오르면 솟을대문이 보입니다.



 

솟을 대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民家] 맹씨행단 인데 맹사성의 생가는 원래 고려말의 무신 최영 장군이 지은 집으로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가 물려받아 수백년간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른 건물입니다.



 

여느 양반가의 저택과는 다른 소박한 모습의 맹씨행단은 청백리(淸白吏) 맹사성 (孟思誠)집안의 고택(故宅) 전체 지정 면적 7,851㎡에 드어서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집으로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두고 있습니다.



 

앞마당 한 쪽에 맹사성 정승이 심은 600여 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한 듯하나, 이 건물의 가운데 대청에서 공부하고 강학(講學)하여 생긴 이름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맹씨고택의 우측 뒤 일각문 너머에 맹씨 집안의 가묘인 세덕사(世德祠)가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뜻의 세덕사는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 아버지 맹희도, 그리고 맹사성을 모시는 사당으로 세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합니다.



 

사당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 이 곳에 신축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던 서당 건물을 해체 운반해서 이 곳에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전면 3칸, 측면 2칸 퇴 1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듯...

민가로는 가장 오래되어 고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성지와도 같은 이곳은 최근에 지은 듯한 일각문과 담장과 고색이 창연한 건물의 처마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별도의 보전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곳 맹사성 생가는 특이하게도 이중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생활 공간을 아우르는 담장과 외부공간을 차단하는 외담장으로 나뉘어 지어져 있습니다.

 

 

반듯한 돌담으로 둘러져있는 맹사성의 생가 모습입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던 맹사성의 벼슬을 생각하면 그의 품성이 얼마나 소박하고 청빈했는지 한눈에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문(旌門)이 세워질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맹사성은 청밸리의 표상이며 언제나 나라에서 봉급으로 주는 녹미[祿米]로 생활하였다고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생활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돌담을 지나면 나타나는 또 다른 일각문 너머로 얕은 구릉을 따라 넓게 들이 펼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두텁고 견고하게 둘려진 돌담에는 숱한 세월을 이고 겪은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서 있는 듯합니다.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그루가 이곳은 굽어보며 지키고 있습니다.

 


 

맹사성이 직접 심은 이 나무 때문에 행단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은행나무 그늘에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따라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많이 심었던 나무인데 오래 된 향교나 서원에서 커다란 은행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데 유학을 최고의 국가 이념으로 따르던 조선시대, 그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던 시기인 조선초 재상을 지낸 맹사성이 자신의 집 마당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그런 연유였을 것이고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뿌리 둘레에 단을 쌓아올려 이를 ‘맹씨행단’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지만 ‘행단(杏壇)’은 공자(孔子)가 학문을 설파하던 자리를 부르는 이름이니 맹사성의 높은 학식과 청백리로서의 삶을 칭송하기 위해 부른 것 같습니다.

 

맹씨행단을 돌아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오는 왼쪽에 아주 오래된 듯한 우물자리가 눈에 뜨입니다.

지금은 콘크리트 뚜겅이 무겁게 덮여있지만 뭔가 맹씨행단과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청백리 맹사성...

태종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예악을 정비하면서 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음악을 버리고 중국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맹사성은 전통음악과 중국음악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으며 유명한 강호사시가를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여진정벌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유지를 주장했으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는데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는 달리 세종의 여진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잇습니다.

세종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더 큰 재목으로 키우려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내었으며 아후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온양온천과 맹사성은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인데 세종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자주 온양을 찾았으며 ‘온양’이라는 지명도 세종이 하사한 것으로 세종은 온천치료의 효과를 직접 느끼고는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도록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을 때 가까이 살며 온천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맹사성이 세종의 뜻에 찬성하며 시행되도록 하여 조선 복지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입니다.

 

충청의 자랑인 청백리 맹사성의 고택을 둘러보며 다른 고관대작들의 으리으리한 대궐같은 고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소박함에 비록 다른 세대를 살고 있지만 그의 삶에 절로 고개가 숙여짐을 느낍니다.

 

돈을 지상 최대의 행복인양, 돈에만 얽매여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잃어버린 명예와 청백리로서의 모습은 좋은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청백리 맹사성의 향기가 두고 두고 널리 퍼져 대한민국을 더 밝고 맑게, 그리고 향기롭게 만들어주길 바래봅니다.

 

 

 

[2012년 충청의 자랑 청백리 맹사성의 생가 맹씨행단  계룡도령 춘월]

 

 

이 글의 일부 사진과 글은 충남도정신문 인터넷판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78620

 

 

자랑스런 충남인 고불 맹사성
아산 맹씨행단에서 만나는 청백리의 향기
[110호] 2012년 02월 22일 (수) 12:53:29 계룡도령춘월 mhd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