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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남여행 부여 무량사]가을 빛 곱게 내린 천년고찰 무량사에서 무량한 번뇌를 벗어 보자!!!

 

[충남여행 부여 무량사]
가을 빛 곱게 내린 천년고찰 무량사에서 무량한 번뇌를 벗어 보자!!!

 

 

 

가을은 그저 가을이라서...


눈물이 나올만큼 시린 하늘을 볼 수있는 하늘이 있어 가을은 아름다운 것일까요?
아니면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나무들의 마지막 불꽃을 볼 수있기에 아름다운 것일까요?

 

가을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담을 수도 버릴 수도없는 짙은 가을색은 그저 눈으로 가슴으로 향기를 맡으라 합니다.

 

지난 9일 꿈을 키우는 신비의 섬 외연도를 다녀 오며 들린 가을색이 물들어 가는 고찰 무량사에 서 보았습니다.

  

 

신라 문성왕(서기839-856)때 범일국사(810-889)에 의해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른 무량사[無量寺]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外山面) 만수리 116번지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색의 천연고찰로 국가지정 보물 6점과 지방문화재 7점 향토유적 3점을 보유하고 있는 절집이기도 하며 조선초기의 문인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더욱 더 유명한 절집입니다.
 
만수산의 기슭, 대체로 평탄하고 산림(山林)이 울창한 곳에 위치한 무량사에는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이며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구조로 지어진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이 중심이라 하겠습니다.

 

그 극락전을 보러 가는 길은 일주문을 지나 이어져 있는데 길이 화강암으로 너무 반듯하게 꾸며져 있어 여느 절집의 운치있는 분위기와는 다른 유원지나 공원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고색찬연한 일주문을 지나 길 끝의 다리를 건너면 잠시 높은 키를 자랑하는 수목들이 색색이 물들어 가고 있고, 작은 개울을 흐르는 물가에는 키작은 풀과 나무들이 지나온 여름을 잊고 새로운 계절을 맞아 단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휘돌아 들면 몇개의 계단을 앞에 두고 불법을 수호하는 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 천왕문이 나타납니다.

 

일주문처럼 오래된 느낌은 없는 천왕문 너머로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 오층석탑과 극락전의 모습이 비칩니다.



 

넓은 절집 마당 한켠...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갈색으로 곱게 단장한 거대한 느티나무는 인간이 만든 구조물을 굽어 보듯 서 있고, 그 아래 가을을 잔뜩 이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모습은 좋은 비교가 되는 듯합니다.



 

우주의 눈으로는 티끌보다 작을 수 있는 존재인 인간...

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 연장을 사용하는 몇 않되는 영장류 중에서 최고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자연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구조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 손으로 한땀 한땀 만들어 낸, 우리 나라 여느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2층 모습의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무량사를 인조 때에 중창하며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5층 목탑 형식인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과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에서 볼수 있는 건축물이며 바깥에서 보기와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通層)인데 이렇게 2층을 형태로 올린 것은 기능보다는 위엄과 장엄함을 나타내려는 의도 같습니다.


 

극락전 안에는 163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 소조아미타삼존불 (보물 제1565호)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 아미타불(5.4m)이, 양쪽에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4.8m)이 있으며 이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락전 안에는 또 1627년 세로 12m, 가로 6.9m의 큰 모시천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가운데 모신 미륵보살의 광배를, 16화불들이 춤추듯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고 하며 괘불(미륵불)은 보물 제126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괘불은 사월초파일이나 다른 재(齋)를 올릴 때에나 절 마당에 내어 건다고하니 그때에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넓고 평평하게 꾸며져있는 극락전 마당에는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장중한 느낌의 오층석탑이 석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으로 보는 이 오층석탑은 1971년에 탑을 보수할 때 5층 몸돌에서 청동합 속에 든 수정병, 다라니경, 자단목, 향가루와 사리 등 사리장치가 나오고 1층 몸돌에서는 남쪽을 향하여 있는 고려시대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이 나왔다고 하며 전체적인 모습은 나지막한 2층 기단 위에 매우 안정된 비례로 5층이 올려져 있는데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소박한 형태로 얹혀 있어 탑이 무거워 보이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부여 정림사터 탑을 그대로 빼닮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물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 역시 오층석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상대석과 하대석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 화사석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이 통일 신라 이래 우리 나라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고려 초기 석등이라고 보고 있다고 하는데 오층석탑과는 석질이 완연히 달라 보여 제작 시기가 같다고 보는 점에 의구심은 들지만 전체적으로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석등입니다.

 

천왕문을 들어서 극락전에 이르기 전 바로 우측에 범종각이 위치해 있는데 다른 절집과는 달리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종(梵鐘)·운판(雲板)·목어(木魚)·홍고(弘鼓) 중에서 종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생경한 느낌을 줍니다.



 

범종각 맞은 편 만수산의 완만한 능선을 등에 지고 신축 중인 건축물이 보이는데 건물의 구조나 입구에 배치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요사채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무량사도 여느 절집처럼 대웅전인 극락전의 우측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라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을 모셔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라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불리는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량사에는 극락전 좌측에 특이하게도 우화궁(雨花宮)이라는 이름을 지닌 건물이 있습니다.

 

'우화'란 부처님 계신 곳과 대중 앞에 만다라화 등 꽃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는 '법화경' 서품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승방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절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각'이나 '전'과는 좀 생경한 '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궁금증을 더하는 곳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어 보고 싶었으나 우화궁에서 들리는 소란스런 스님들의 목소리에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우화궁과 극락전 사이 구절초가 한무더기 피어 있는 숲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숲길에는 길과 숲을 구분짓기 위해 한 사람이 낡은 막새기와로 경계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추후 어떻게 변해져 있을지 기대를 하며 걸었습니다.

 

천왕문에서 부터 이어진 낮은 담장이 둘려져 있는 개울을 건너 삼성각과 청한당이라 불리는 요사채가 있습니다.

요사채에는 새로이 자리한 주지 석파스님이 기거하는 곳인 듯하였습니다.

 

그 요사채 바로 왼쪽의 약간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지면서 생긴 것으로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입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내며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에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의 위용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칠성(七星)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으로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고 합니다.

 

독성(獨聖)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셔두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지만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축물의 형태는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을 짓고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고 그 모심의 형태에 따라 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입니다.

 

오직 우리나라의 절집에만 있는 삼성각에서 다시 극락전 방향으로 숲길을 걷다보면 마주 보는 쪽에 건물군이 나타납니다.

 

건물군의 제일 뒷쪽인 오른쪽에 원통전이라는 제법 넓직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용도에 따라 원통보전 [圓通寶殿] 또는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신 불전(佛殿)일 경우 원통보전 또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봉오리 상태의 연꽃 또는 버드나무 가지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통전 바로 앞에는 다른 절집과 달리 영정각이 있는데 이는 조선초기의 문인으로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등을 정리했으며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쓴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작자 미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어려서 부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으며 5세 때부터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생육신으로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무량사에 있던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이를 지키기 위해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두었는데,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고 유골을 모아 부도(浮圖)에 안치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는 사후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습니다.

 

그의 부도는 무량사 입구의 좌측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산기슭에서 만나게 되는 부도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습니다.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진 영정각 좌측에는 흔히 팔상전(捌相殿)이라고도 불리는 영산전(靈山殿)이 있습니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畫)를 봉안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했던 영축산정을 영산불국(靈山佛國)으로 상징하며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羯羅菩薩)과 미륵보살을 협시(脇侍)로 봉안합니다.

 

팔상탱화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로 도솔천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모습(兜率來儀相), 룸비니공원에서 부처님이 탄생하는 모습[毘藍降生相], 동서남북의 4문을 둘러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모습[四門遊觀相], 성문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瑜城出家相], 설산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고행하는 모습[雪山苦行相],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항복을 받는 모습[樹下降魔相],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苑轉法相, 사라쌍수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林涅槃相] 등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스스로를 구원하는 명제에서 출발한 종교가 언제부터인지 현세 구복을 목적으로 한 이기적인 행태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이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어떻게 남보다 더 부자로 살 것인가로 촛점이 모아져 버린 것 같습니다.

 

위엄과 장엄함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지어진 무량사의 극락전...

 

이곳이 극락세계인가?

불교라는 종교가 부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더 낮게 숙이고 낮추어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알아 세상 만물들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법을 실천하는데 과연 위엄과 장엄함이 필요한 것일까요?

 

저나 나나 이세상을 통해 빌어 먹는 존재인데 무엇을 높이고 무엇을 낮출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그저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자세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량사 경내를 돌아 나오는 길...

무심한 듯 서있는 갈색잎느티나무는 수백년의 세월을 이고 나면서 어쩌면 이미 부처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량사의 극락전 마당 한켠의 음수대에 놓인 부처의 흉상은 계룡도령의 눈에 어찌 저리 서글픈 듯 슬픈 표정으로 비춰지는지...



 

절집 공간이 광명인지 세속이 광명인지, 승속의 경계에 지어진 일주문. 그 나가는 문의 이름 광명문을 나서며 혼돈의 시대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지극히 감상적으로 만들어 주는 가을의 향기를 털어 내려 애써 고개를 흔들어 봅니다.


 

한 차례 꿈을 꾸듯...

그 꿈 조차 꿈 속의 꿈 이련만, 삶과 죽음 역시 꿈 속의 일 이어서 의미 또한 없음인데 남을 이기기에만 바쁜 우리는 어디에 머무는 것인지...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을 뜻하는 무량... 

가을빛이 그윽히 내려앉는 무량사[無量寺]에서 무량한 번뇌를 지우려 애를 써 봅니다.

 

이 가을...

속세의 이기를 접고 그저 바람처럼 가볍게 천년 고찰 부량사를 들러 보는 것은 어떨지요.
그저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최선을 다한 삶이 있었슴을 느껴 보심은 어떨지요.

 

이기기 보다는 함께 함이, 가짐 보다는 나눔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2011년 10월 9일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 섯다 나서며  계룡도령 춘월]

 

 

 

 

 

 

 

이 글의 일부 사진과 글은 충남도정신문 인터넷판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71138

 

천년고찰 무량사에 곱게 내린 가을 빛
아름다운 충남 여행 부여 무량사에 서다
[95호] 2011년 10월 18일 (화) 16:55:32 계룡도령춘월 mhd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