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4일, 미국민들은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232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색인 출신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를 44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다. 이로써 링컨의 노예해방과 1960년대의 치열한 민권운동을 거치며 균열돼 왔던 인종주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미국은 비로소 다문화적 탈인종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됐다. 그러나 오바마 승리의 의미는 인종 관계의 변화를 훨씬 넘어선다. 오바마는 1964년 민권법 통과 이후 역대 어느 민주당 후보보다 더 많은 백인표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이 문제 안 될 정도로 미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간절했음을 뜻한다. 이는 미국이 잘못돼 가고 있다고 응답한 미국인이 85%를 넘었다는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옛소련 해체 이후 세계 유일 초강국으로 군림해 왔던 미국은 현재 그에 못지않은 격변 속에 놓여 있다. 경제적으론 레이건 정부 등장 이래 미국이 주도해 온 시장중심의 경제시스템이 무너져 내리면서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다. 공화당 정권의 규제완화와 감세정책 덕에 고삐 풀린 자본의 탐욕으로 인해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사회는 분절화됐다. 또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명분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은 승리의 가능성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유린과 광범한 도청 허용 등에서 보듯 헌법적 가치가 유린당해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미국민들의 자긍심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세계를 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네오콘식 대외정책은 세계와 미국의 갈등을 유발하고 미국의 대외 이미지 추락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사랑받지 못하는 제국이 됐다. 깊었던 변화 갈망 오바마는 깊은 실망의 나락에 떨어진 국민에게 변화의 이미지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대통령에 도전한 자신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미국인들이 잊었던 꿈을 자극했다. 부패한 정치와 미친 듯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 안의 분위기를 변화시키자면 풀뿌리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돼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풀뿌리 공동체 조직가로 공적 경력을 시작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 새로운 정치조직을 가동해 냄으로써 지난 30년 동안 미국 정치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창조해 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단합을 화두로 내세운 그의 호소에 응답함으로써 부시의 일방주의, 레이건 이래의 시장중심 자본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의 과거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제 미국도 세계도 역사의 새로운 장 앞에 섰다. 오바마는 이 장에 자신이 약속한 변화를 기술할 책임이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부시의 분열 정치를 끝장내고 인종과 종교, 계급 장벽을 뛰어넘는 화합의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고삐 풀린 시장중심주의를 대체할, 자유로운 기업과 정부의 규제가 조화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정당한 자기 이익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 사이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좀더 공평한 분배가 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의 과업이다. 정의롭고 협력적인 세계로 국제관계에서도 새로운 협력적 질서를 구축할 책임이 있다. 미국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도 세계를 적과 친구로 나누는 네오콘적 세계관에 식상했다. 더군다나 미국이 직면한 두 개의 전쟁과 금융위기는 중국·러시아·일본·유럽연합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 없이 미국 혼자 힘만으론 문제를 풀 수 없음을 웅변한다. 오바마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강대국들은 물론 힘없는 나라들과도 협력·공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땅에 떨어진 미국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도력도 회복할 수 있다. 이러한 책무를 다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빈국 출신 아버지를 두고 홀어머니의 유색인 아들로서 겪은 편견 속에서 약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 왔던 그의 경험이 정의를 소중한 가치로 지켜나갈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오바마가 미국과 세계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