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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희망이다

아버지는 정말 보수인걸까

[세상읽기]아버지는 정말 보수인걸까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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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 시인 
 
  

근래 촛불집회를 향해 쏟아진 황폐하고, 무섭고, 한심한 말들을 떠올린다.

조갑제·이문열·주성영씨, 거기다 사탄 운운하는 목사님들 말씀까지 보태지면 귓속이 별안간 우울해진다.

이분들이 우리 사회 자칭 보수의 대표급들이라 생각하면 더욱 심란하다.

중·고생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다양하고 다채롭게 발현된 촛불 민심을 ‘친북·빨갱이·반미·좌파’라는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몇 개의 단어로 사유하려 드는 그들의 무지성과 오만. 우리 사회의 자율과 진보의 스펙트럼이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는 것에 비하면 이분들, 참으로 초지일관이시다.

변화란 생명력의 방증이다.

이분들의 무성찰, 무변화가 ‘반생명’ 이데올로기와 연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섬뜩하다.

쇠고기, 대운하, 각종 민영화, 활로 없는 교육정책 모두 ‘반생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지방 향교에 몸담고 계신 유림이고, 보수적 성향이 다분한 분이다.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면 비슷한 견해를 보이는 40%, 다른 입장이지만 서로 이해 가능한 부분 50%, 의견 조율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는 대목이 10%쯤 드러난다.

그런데 20대엔 아버지와 도저히 견해 차이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지점에서 아버지도 나도 조금씩 변했다.

나는 ‘알맞은 보수’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버지는 딸이 가진 진보적 성향의 필요에 대해 인정한다. 변화가 생명의 필연이라는 것을 서로 알게 된 탓이다.


보수와 진보. 이것은 예부터 어느 사회나 존재해 온 두 경향이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탁월한 비유를 하나 들자.

씨앗이 있다.

씨앗은 씨앗으로 존재하려는 경향과 싹 틔워 다른 생명을 촉발하려는 경향을 동시에 가진다.

현실태에 만족하면 씨앗은 안정적인 씨앗 하나로 존재하다 사라진다.

미래지향의 경향성은 씨앗 하나의 안정성 너머를 꿈꾼다.

씨앗이면서 동시에 씨앗을 부정하는 이 경향성은 씨앗에서 싹을 틔운다.

이렇게 한 알의 씨앗은 수많은 생명으로 확산된다. 단순화하지는 말자.

현실태 없이 미래태는 불가능하므로, 한 알의 씨앗을 씨앗으로 안정화시키는 보수적 경향도 씨앗의 현실태와 미래태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하다.

문제는 안정화의 경향이 미래를 향해 열려 있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닫힌 체계를 이룰 때 씨앗은 발아하지 못하는 죽은 씨앗이 된다는 것.


아버지께 촛불집회에 대해 물었다.

국민의 뜻을 전하게 된 좋은 계기라고 선선히 평하신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친북좌파 세력이 있다고 말하는 보수도 있다고 말씀드리자,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무릇 사람은 평생 공부가 필요하고 공부가 게으르면 과거의 말만 하게 된다고 하신다.

그들 중엔 작가라는 사람도 있던데 너도 그 작가를 아느냐고 물으신다.

현직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 2000년대에 접어들며 그가 내놓는 소설이란 게 정치적 처세술 수준의 책이어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의 한 말씀. 작가정신이 없다면 작가가 아니구만!


전화를 끊으며 잠시 헷갈렸다.

내가 보수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정말 보수인 걸까.

보수의 스펙트럼도 이렇게 넓어진 걸까.

자칭 보수라는 몇몇 극우수구 세력이 우리 사회의 평범한 보수들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향력 있는 몇몇 거물급 수구 세력에게 평범한 보수주의자인 지방 촌로 아버지의 한 말씀을 들려드린다.

무릇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모르고서 바른 인간, 바른 정치인 되기 어렵다.


김선우 시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951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