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역사 스페셜) 길 떠나는 쥐길동 4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아고라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파렴치하다는 것은 2MB밖에 되지 않는 길동의 돌머리로도 알고 있었다.
길동은 죽음을 각오하고는 말하였다.
“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
아고라는 대답한다.
“ 마지막 소원이라면 들어주겠다.”
길동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 내 서자로 태어나서 미친 소를 팔아먹는 비천한 생활을 하여왔지만 죽을 때가 되니 너무나 아까운 것이 있구나. 맹판서가 공직자재산신고를 피하기 위하여 나의 명의로 구입한 땅이 전국 곳곳에 있소. 그리고 도살업자가 아니면 구입할 수 없는 축사도 전국 곳곳에 있소. 내가 죽으면 이 땅들은 임자 없는 땅이 되니 어찌 억울하지 아니 하리요. 차라리 죽기 전에 이 땅들을 신우회(新右會 후세의 영문표기로는 new right)에 기부하고 싶소. 소백정인 나를 인간적으로 대우하여 준 것은 신우회의 사람들이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미친 소 먹고 헛소리 한다“고 배척할 때에도 그들은 나를 ”사문난적의 선동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애국자“라고 하였소. 어차피 임자 없는 땅이니 누가 가져간들 어떠리요.”
신우회(新右會)! 이 말을 듣고 아고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포악한 정희대왕과 백성들의 봉기로 폐위된 두환군의 폭정을 까놓고 지지하였던 극우회(極右會)가 몰락한 후 무현대왕 시절에 새롭게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다. 극우회는 폭정과 탐관오리를 비판하면 “사문난적‘,”빨갱이“이라는 표지를 붙인다.
청나라가 아라사(러시아)와 니포초(尼布楚: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후 아라사의 상인들이 조선에도 넘나들었다. 그들 중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참람되게도 “서민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임금을 폐지하라”는 천인공노할 시역의 잡설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서민들과 친하여지면 그들이 가져온 독주인 보도가라는 술을 서로 마시면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보도가라는 술은 얼마나 독한지 한잔을 마시면 그대로 쓰러질 정도이다. 그런데 아라사인들은 그런 독주를 마시고도 끄덕하지 않았고 다만 얼굴만 빨개질 뿐이다. 아라사인들은 보도가를 마시고 얼굴이 빨개진 상태에서 임금을 능멸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고 조선에서는 이런 헛소리를 하는 무리들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은 이들의 소리를 술 취해서 하는 헛소리로 생각하였지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조정을 비판하기만 하면 배후에는 빨갱이가 있다고 하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여 탄압을 하였다. 정희대왕 시절에는 긴급칙령을 반포하여 “주상 전하의 심기를 거스리는 상소를 올리거나 선동을 하는 것을 금한다”고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포함된 각 서원의 유생들이 반역죄로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일도 생겼다.
유생들은 억울하였지만 수개월에 걸친 문초에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라사의 빨갱이들의 지령하에 공화제를 수립하고 주상을 폐하려고 하였다.”는 취지로 역모죄로 몰려서 사약을 받거나 참수에 처하여지기도 하였다.
문초는 신속히 진행되어 주상의 칙허가 내려진 바로 다음날에 바로 사약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 극우회는 이러한 폭정에 대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사문난적과 빨갱이를 능지처참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주상에 대하여 험담을 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문초하였다.
“나라 상감한테도 안듣는데서는 오만 욕 다한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러한 속담이 무색할 정도였다. 종묘사직을 지킨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신들의 비리를 이야기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극우회의 망동도 결국 20년전에 백성들이 봉기하여 패주 두환을 폐위함으로써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종친에서는 태우공과 거산공 영삼을 차례로 주상으로 앉혔는바 둘다 지력이 미천하여 정사가 반듯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하다 보니 극우회의 잔당들이 계속하여 발호하였는데 무식하기로 이름이 높은 영삼공이 앞뒤 재지 아니하고 “종묘사직바로세우기”를 통하여 폐주 두환을 의금부에서 문초하다보니 극우회의 잔존세력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 영삼대왕은 성균관에서 공맹의 철학을 배웠는데 하는 행동은 즉흥적이고 철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참으로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지 온 백성이 의아해 하였다. 영삼대왕의 극우회 잔당에 대한 탄압은 올바른 역사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의 걸림돌을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극히 개인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정사는 세자인 소산공 현철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다. )
이에 대하여 극우회의 잔당들은 영삼대왕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다가 영의정에서 삭탈관직을 당한 이회창과, 영삼대왕에게 영의정을 요구하였다가 퇴짜맞아 낙향하여 “자유로운 백성의 무리(自民聯)”를 이룬 유신공 종필에게 접근한다.
극우회의 잔당들은 정희대왕 맡에서 온갖 아부를 하면서 같이 탐관오리로 살아온 유신공보다는 영삼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여 백성의 사랑을 받는 회창대감을 추대하였다. 자신들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회창대감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정희대왕 시절에 유생들과 함께 폭정을 비판한 인동초공 대중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같이 하여온 유생들의 뜻을 배반하고 종필에게 접근을 한다. 대중은 종필에게 반정에 성공하면 종필을 영의정으로 하고 2년 후에는 섭정의 자리까지 주기로 밀약을 하였다.
영삼대왕 말년에는 청나라에서 불황이 닥쳐서 조선에까지 여파가 미쳤다. 청나라 상인들의 농간으로 통화가 유통되지 않고 물자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백성의 경제를 책임져야 할 이조 판서 강경식과 이조참판 강만수는 영삼대왕에게 “경제는 좋습니다. 백성들은 주상의 덕을 칭송하고 있나이다.”라고 허위보고를 하고 머리가 2mb정도도 못되는 영삼대왕은 그것을 믿고는 “세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구나”고 안심하다가 결국은 백성들이 대중과 종필의 지도하에 반정에 가담하게 되어 스스로 왕위를 대중에게 물려 주게된다.
극우파의 잔당들과 회창대감도 백성의 지지는 얻었지만 거사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였던 전 경기도 관찰사 이인제가 배신을 하고 대중공에게 붙는 바람에 반정을 이끌 기회를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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