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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남여행] 인삼의 고장 금산 진악산 보석사와 신비의 은행나무

 

 

 

[충남여행] 신비의 은행나무가 있는 인삼의 고장 금산 진악산 보석사의 가을 풍경

 

 

오색의 단풍으로 영롱한 가을...
어느 솜씨좋은 화가의 붓질인양 아름다운 단풍이 어우러진 산하에는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런 가을날 훌쩍 박걸음을 옮겨 놓은 곳 바로 인삼으로 유명한 충남 금산의 진악산 아래 자리한 이름처럼 아름다운 보석사[寶石寺 ]로 향했습니다.

 

이곳 계룡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나 쉬이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

보석사는 이곳 계룡산 갑사와 함께 임란 당시 충청도 의승들의 충절의 넋이 어린 사찰입니다.

 

보석사의 은행나무 전설을 익히 들어 온지라 작은 설렘과 함께 시작된 나들이는 호국 충정의 상징인 기허당 영규대사의 사적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보석사[寶石寺 ]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진락산(眞樂山)] 기슭에 있는 절집으로 남북국 시대 헌강왕 11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창건자는 조구라 전해지며, 산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만들고 봉헌했기 때문에 보석사라고 명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하며 창건 당시와 그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대한제국의 고종 때 명성황후 민비(閔妃)가 중창하여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당시 금산군이 전라북도에 속해 있어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새단장을 한 진락산 보석사의 일주문...

불과 몇년전까지 색이 바래 고색창연하던 일주문의 모습이 일신하여 환하게 반기는 듯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좌측에 문화재자료 제23호인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나옵니다.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승장 기허당 영규대사를 기리는 비각입니다.

공주 갑사의 청련암에서 수행을 하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3일동안 크게 통곡을 한 영규대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승병 수백을 규합하여 관군과 함께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으로 진격해 옥천에서 궐기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 벌인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맞이 하게되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금산전투에서 창에 배를 찔린 영규대사는 창자가 터져 나오는 것을 손으로 막으며 공주에 있던 배신자 충청 관찰사를 죽인다며 공주로 향했으나 현재의 계룡면 유평리에서 공주를 눈 앞에 남겨 놓고 그만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현재도 계룡면사무소 앞에는 영규대사 정려비각이 있고 비각 옆에는 대소인원하마(大小人員下馬)라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도로 옆이라 오가는 관리나 행인들이 스님이라고 무시하고 말이나 가마를 타고 그냥 지나가면 비각 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위장군 기허당 영규대사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높이가 약 4미터에 달하고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에 의해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鄭堯臣)이 찾아서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안내표지문에 의하면 의병승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로서 1840년(헌종6년)에 보석사 입구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비문을 지은 이는 우의정 조인영이며 금산구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고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좌획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며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 낙봉대인 등 건립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 쪽 면에는 앞면의 '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가 썼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승병장 진위장군 기허당 영규대사를 기리는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각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아름다우 전나무숲길을 따라 조금 가면 야트막한 언덕위로 범종루를 겸한 누각이 나옵니다.



 

아랫층은 보석사 경내로 들어서는 출입구의 역활을 하고 윗층은 범종루의 형태를 띤 누각은 경내에서 보면 1층처럼 보입니다.



 

범종루를 등에 두고 우측에는 현재 대웅전이 개보수중이라 임시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등운선원[騰雲禪院]의 맛배지붕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보석사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개.보수중이라 볼 수없었습니다.

 

보석사 대웅전은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주두이상 해체 후 재설치'를 한다고 합니다.



 

여느 절집과는 다른 모습의 요사채가 영규대사가 머물렀다고 하는 의선각과 적묵당 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개.보수중인 대웅전 바로 곁에 자리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전각 기허당입니다.



 

기허당 곁 약간 높은 위치에 자리한 산신각입니다.
보석사의 경내 건축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각입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보면 자그마한 보석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산신각에서 우측으로 내려다 보면 작은 계울이 흐릅니다.

단풍이 가득한 수풀 사이로 개울을 건너게 놓인 다리 하나가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그 다리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보석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조구대사가 다섯 제자와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하며,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24시간을 운다고 하는데 6·25 등의 국난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전설보석사 은행나무입니다.



 

세월 때문인지 윗부분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보조 받침대에 의지한 채 아랫부분만이 왕성한 둘레 11m의 큰 은행나무는 1990년 천연기념물 제 36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합니다.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보석사의 경내에 있는 작은 개울과 다리 하나...
비록 물은 말라 여여히 흐르지는 못하지만 지난 여름의 왕성했던 물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은행나무 곁 개울을 돌아 보석사를 나서는 길...

들어 오며 탄성을 지르게 하던 전나무와 은행나무의 숲길은 너무도 호젓합니다.


 

보석사의 많은 자랑거리 중에 진정한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자연일 듯합니다.

수북히 쌓여 카페트처럼 느껴지는 낙엽을 밟으며 일주문으로 향하는 그 길...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찬불가처럼, 좌로는 전나무가 우로는 은행나무가 마치 불법을 지키는 신장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호젓하고 조용한 보석사는 진악산[진락산(眞樂山-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 등산로와도 잘 연계되어 있어 하루정도 마음을 비우고 즐기기에 충분한 절집입니다.


 

여느 유명절집 주변처럼 번잡하거나 어수선한 것 없이 차분하게 자리한 보석사는 이 가을 한편의 시처럼 계절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보석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041-753-1523 

 

 

 

 

 

 

 

 

[2011년 10월 15일 아름다운 금산 보석사를 다녀 온  계룡도령 춘월]

 

 

 

 

 

 

 

이 글의 일부 사진과 글은 충남도정신문 인터넷판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72172

 

 

인삼의 고장 금산 보석사와 신비의 은행나무
진악산 자락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
[97호] 2011년 11월 04일 (금) 10:25:45 계룡도령춘월 mhd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