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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 유홍준 교수 특강 예산 추사고택에서 열려 [2012 기호유학 인문마당]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대행 김정섭]은 2012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제4차 행사를

15일 토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소재 추사묘소 앞 잔디밭에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로 유명한 유홍준 명지대 교수를 초청해 특별강연회를 가졌습니다.

 

▲ 잘 정돈된 추사 김정희선생의 묘

 

충청남도가 주최하고 충청남도멱사문화연구원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는

지난해 '돈암서원 인문마당'의 성공 개최를 토대로

올해부터 역사학계와 문화예술단체 전문가 13명으로 '기호유교문화 인문학포럼 기획위원회'를 구성, 운영 중인데

기획위는 올해 5차례의 '기호유학 인문마당'과

6차례의 기호유학 주요 인물과 종가를 찾아 떠나는 1박2일 유적답사ㆍ종가 체험,

강연과 작은 공연이 어우러지는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 등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에 '2012 기호유학 인문마당' 네번째 행사가 열린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서 유홍준교수와 함께 한 2012인문마당 관계자들 좌로부터 정택규 추사고택기념관장, 소설가 표윤명, 충남역사박물관장 오석민,한사람건너 유홍준교수, 오른쪽 끝 예산군 관광시설사업소장 이무희

 

이날 특별 강연은 6시경 도착한 유홍준교수가 추사 김정희 기념관을 둘러 보며  참가자들과 잠시 기념 촬영을 하는 등

참석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 앞에서 기념촬영 중인 유홍준교수

 

유홍준교수는 추사 고택과 추사 김정희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후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이른 6시 28분경

충남역사박물관 오석민관장의 사회로 연단에 올라 추사 김정희 고택에서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충남역사박물관 오석민관장

 

추사 김정희선생의 묘소를 마주보고 자리한 300여명의 청중들과

충남 예산의 금빛으로 변해가는 들판을 굽어보며 특강을 펼칠 유홍준교수가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예산의 모 칫과의사분을 불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지난 2002년 이자리에서의 강연 중 시간이 부족해 다 하지 못했으니 가능하다면 와 주면 좋겠다고...

그분이 오셨을까요?
ㅎㅎㅎ
정답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완당평전'에서도 밝혔지만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세계는 일반인이 상상하고 아는 정도 그 이상의 인물이었으며

당시 중국과의 지식인 교류에서 어떤 역활을 했는지

조선의 국격을 어떻게 높였는지 들을 수록 귀가 솔깃해지는 내용을 달변으로 풀어갑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추사 김정희를 단정지어 버리는 글씨체인데,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설명을 하며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인용한 문귀는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찌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라는 것으로

그저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섭렵한 후에 정리되어 나온 것이라

아무나 따라할 수 있지만 그런 멋과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까지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묘역에서 열린 유홍준교수의 특강

 

가을의 밤은 점점 어두워가고 유홍준교수의 이야기는 열기가 더해갑니다.

 

추사 김정희의 묘소를 바라보며 자리한 300여명의 청중은 숨을 죽이고 특강을 들으며

한반도 최초의 한류인 추사 김정희를 서예가만이 아닌 시인, 예술가로 알아가는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청중들은 한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귀를 귀울여 듣는 모습에 유홍준 교수도 고무되었는지

원래 약속된 시간 즈음에서 10분간 휴식을 하겠다며 연단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명품으로 잘 알려진 맛있는 예산사과가 익어가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들녘을 바라보며 시작된

이번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회는 충청남도와 예산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최하고 충남역사발물관이 주관[관장 오석민]한 행사로

이날 유홍준 교수는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예술가인 김정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았는데 열정이 담긴 특강은 종료 예정시간이었던 8시를 훌쩍넘기고 9시경에야 추사의 벗 초의선사의 추모시 낭독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끝맺음을 했습니다.


역사와 유물,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예산의 지역역사를 톺아보는 예산관광시설사업소[소장 이무희]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그리고 충남역사박물관 팀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시간으로

작은 움직임도 없이 함께 한  청중들의 훌륭한 경청자세 또한 결실의 계절 가을을 한층 더 보람찬 시간으로 만들며

추사 김정희와 함께 함에 커다란 감동으로 자리했습니다.

 

▲휴식시간에도 청중들에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는 유홍준교수

 

특강 중 잠시의 휴식시간에도 유홍준교수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를 들고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등

잠시 쉴 틈도 주지 않는 등 유홍준교수의 인기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특강 중인 유홍준 교수

 

유홍준 교수는 지난 2002년에도 이곳 추사고택에 특별강연회를 갖은 바 있어 이번이 두 번째로 알려졌는데

이날 강연에 나선 명지대 미술사학과에 재직 중인 유홍준 교수는,

성균관대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영남대 박물관 관장, 3대 문화재청장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6’, ‘조선시대 화론연구’, '화인열전' 등이 있습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귀담아 듣고 있는 청중

 

늦은 시간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류 바람을 일으킨 예술가

추사 김정희에 대해 알아 가면서 커다란 긍지와 함께 바른 삶에 대한 생각도 가지게 된 보람된 하루였습니다.

 

▲ 강연 초기에 찾았던 예산의 모아칫과 원장과 함께 한 모습
 

 

 

[김정희의 발자취]

1786년   6월초 : 예산에서 이조 판서 김노경의 큰아들로 태어나다. 손이 귀한 터에 태어나서 가족들이 몹시 기뻐함

1793년   7세때 : 집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다. 이 글씨를 보고 지나가던 영의정이 집에 들러 감탄을 표하다

1800년 14세때 : 북학의 대학자 박제가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우다.

1081년 15세때 : 사촌 형 교희의 부인인 한산 이씨의 사촌 형제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다.

1806년 20세때 : 부인 한씨가 죽다. 그후 3년이 지나서 예안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다.

1810년 24세때 : 생원 시험에 합격하다.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 부사로 임명되어 연경으로 가자, 자제군관으로 아버지를 따라가다.

                      연경에서 옹방강, 완원 등 대학자를 만나 사제지의를 굳게 맺다.

1816년 30세때 : 새로운 고증학적인 경학관을 담은 '실사 구시설'을 짓다.

                      이 글은 옹방강과 완원의 이론을 참고하여 나름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1817년 31세때 :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확정하고, 이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다

1826년 40세때 : 충청 암행어사가 되다. 아버지 김노경이 예조 판서가 되다.

1827년 41세때 : 의정부 검상을 거쳐, 예조 참의에 오르다.

1830년 44세때 : 아버지가 탄핵을 받아 고금도로 귀양을 가다

1835년 49세때 : 초의 선사와 편지로 사귀기 시작하다.

1837년 51세때 : 50세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을 거쳐, 이 때에 형조 참판이 되다.

1840년 54세때 : 중상과 모략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다. 9월 2일, 서울을 떠나서, 9월 27일에 제주로 가는 배를 타다.   

                      배를 탄 지 하루만에 제주의 화북진에 도착하다.

1845년 59세때 : 헌종이 원하여 편액을 써서 보내다.

1848년 62세때 : 귀양에서 풀려 나오다.

1851년 65세때 :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귀양을 가다.

1852년 66세때 : 귀양에서 풀려 나오다.

1856년 70세때 : 10월 10일, 과천에서 숨을 거두다.

 

[유배 생활에서 꽃피운 예술 - 소설가 문순태의 글 중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은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앞서 간 사상을 지닌 분이었다. 그 분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적이었는데, 성리학은 본디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까다로워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녔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저 양반들의 입씨름하기에 좋았다.

 

이러한 때에 양반가문의 추사 선생은 현실에 바탕을 둔 학문,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 분이 젊었을 적에 중국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건너가 배운 고증학, 금석학은 그 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증학은 성리학을 몸에 익힌 조선 학자로서 받아들이기 매우 혁신적인 사상이었지만 그 분은 그 사상을 잘 소화시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 그 사상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한 금석학에 힘쓴 결과로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 내고, 독특한 글자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추사 김정희 선생의 훌륭한 모습은 사상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룩하기까지의 자기와의 싸우는 모습이다.

 

추사 선생은 시대의 불운을 입어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그 외롭고 고통스런 날들 속에서 예술에 몰입하고, 자기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자칫 삶을 포기할 수 있는 힘든 유배 생활을 이토록 예술로써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경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추사 김정희에 대한 평가]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해서·전서·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열고있는 '2012년 기호유학 인문마당'은 다섯번째 마당으로 10월 13일(토) 논산 돈암서원에서 소설가 박범신을 초청해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라는 제하의 특별 강연을 진행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문의 : 041-856-8608(충남역사박물관 박물관운영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http://www.cihc.or.kr

 


 

 

 

 

이 글과 사진의 일부는 충청남도의 충남넷과 금강뉴스에 기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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