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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경주여행 동부사적지대] 대릉원 천마총 첨성대 인왕리고분군 계림 월성 석빙고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월성원자력발전소와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을 파워블로그 얼라이언스팀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KTX로 부산을 다니지만 다른 지역은 잘 다니지 않았던 관계로 KTX 기차가 경주로 가는 줄을 몰랐던 계룡도령은 대전에서 동대구까지 KTX로 가서 거기서 고속버스로 갈아타고 경주로 향할 생각을 하고 좀 일찍 대전역에 도착을 해서는 8시 17분에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탓습니다.

그.런.데....

이 기차가 신경주역을 거쳐서 부산으로 간다는 안내방송!!!
ㅠ.ㅠ
냉큼 기차표를 연장하고 신경주역에 도착을 하니 9시 30분 경입니다.

 

 

그 과정에 약속시간인 12시보다 몇시간 먼저 도착해서 둘러 본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사실...

1400년전 역사상 처음으로 신라가 당나라에 읍소하여 신하국가가 되는 것 조차 마다하지 않으면서 당나라의 군사를 끌어 들여 강성한 백제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고 이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조차 승리하면서 현 중국 동해지역 백제영토와 북쪽 드넓은 고구려 영토를 포기하고 달랑 한반도만을 하나의 국가라 선포하는 아니 중국의 신하국가임을 선포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던 뼈아픈 역사를 만들어 낸 정권이라서인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곳입니다.

 

당시 웅대한 고구려의 기상과 백제의 화려한 예술혼이 외세와 손잡고 형제를 멸한 신라 김춘추의 썩어 빠진 정신에 갉아 먹혀 버린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 노예근성이 1400여년을 이어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까지 전이되어 우리의 고대 역사를 송두리채 지워버리고 사대사관으로 바꾸어 버린 이병도 같은 자들이 한국의 사학을 재단하고 엉터리로 끼워 맞춤을 했지만 그러한 친일잔재의 척결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에 충성했던 자들이 총칼로 정권을 탈취하여 독재를 하더니 이제는 더 나아가 충일 숭미집단이 득세하며 그나마 유지되던 국혼과 민족혼 마저도 말살시키려 하고 있고 그 독재자의 딸이 반성과 속죄는 없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나서고 또 이지역 정서는 무조건 지지하는 이해할 수없는 양태를 보이는 지역이라 더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릉원[大陵苑]

 

대릉원[大陵苑]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으로 대릉원지구로 불리며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에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실 경주는 계룡도령의 고향이 부산이다 보니 너무도 자주 찾던 곳입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친일사관을 벗어나기 전의 이야기지만...

 

젊은 시절 연인이 되어 팔짱을 끼고 돌아 다니기도 하였고, 부산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통금시간이 가까워 오면 이곳 경주로 내닫던 기억과 경주역앞의 한옥 여관에서 밤새 나누던 이야기들...

한마디로 경주의 모든 곳에 계룡도령의 족적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참 그런데 통금[야간통행금지]시간이 되어 가면 경주로 왔다는 게 무슨 말이냐구요?
시대가 변해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
친일 쿠데타 독재자인 박정희의 군사독재시절 충청북도를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을 야간통행금지로 묶어두고 관광지인 제주와 이곳 경주만 야간통행금지가 없는 곳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부산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당시 나이트 클럽으로 가던지 아니면 이곳 경주로 술을 마시러 오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럴 때 단골집에 미리 전화를 해 두고는 밤새워 술을 마시러 오는 곳이란 이야기입니다.

^^

일종의 일탈이었던 셈입니다.

 

당시의 기억으로는 이런 모습들이 없었던 것 같은데...
길게 담장까지 둘러지고 대릉원의 입구가 거창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 대릉원에 들어 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개인의 경우 어른 1,500원 군인.청소년 700원 어린이 600원

단체의 경우 어른 1,200원 군인.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30인 이상]



 

입장권을 받고 들어서니 온통 여행온 학생들로 시끌시끌합니다.

아직은 뜨거운 햇살아래 째째거리며 줄을 지어 다니는 초딩들은 이곳 대릉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



 

천마총[天馬塚]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 8월 20일에 발굴되기 전까지는 155호 고분으로 불렸으며 이곳에서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 중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천마 그림 때문에 천마총이라고 이름을 바꿔부르게되었습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장니[말의 좌우 배를 가리는 가리개 -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 위에 그려진 천마도는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미술품이며 함께 출토된 금관[金冠]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어 국보 제 188호로 지정되었고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천마총 외에도 경주 황남리 고분군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라 전하는 고분을 비롯하여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미추왕릉군은 1973∼1974년 미추왕릉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여 돌담을 둘러쳐 보존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문옻칠그릇[畵文漆器] 등과, 부인띠[夫人帶]로서 침각명[針刻銘]이 있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 등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습니다.

 

첨성대[瞻星臺]

 

대릉원을 나서면 맞은 편으로 작은 야산이 보이는데 이곳이 월성인데 월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문대로 알고 있는 첨성대[瞻星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 첨성대[慶州瞻星臺]는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는 당시의 건축기술로 볼 때 천문대로서 지나치게 높이가 낮고 오르내리는 별도의 통로가 없이 건축된 점, 또한 측정이나 관찰 기구들을 놓기에는 상부의 정자단이 너무 좁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첨성대 주변은 낮은 철재담장이 둘려저 있는데 입장료를 내는 줄 모르고 사진 몇장 담고 나오는데 웬 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아저씨 왜 입장료도 내지 않고 들어가요! 입장료 주세요!"합니다.

흐미~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 대하듯 합니다.

ㅠ.ㅠ

 

입장료 500원을 주고서야 풀려났습니다.



 

경주 동부 사적지대[慶州 東部 史蹟地帶]

 

첨성대와 인왕동고분군이 있는 일대를 경주 동부 사적지대[慶州 東部 史蹟地帶]라 하여 특별 관리되고 있습니다.

 

사적지대[史蹟地帶]란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으로 여러 유적들 사이에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지하유적과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는 사적지를 연결 선정하여 관리하는 것인데 동부 사적지대[東部 史蹟地帶]는 동서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인왕리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

 

그 사적지의 한곳...

첨성대에서 계림으로 향하다 만나게 되는 경주 인왕리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 ]

다른 곳보다는 규모가 좀 작은 고분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경주 동부 사적지대 [慶州 東部 史蹟地帶]에는 뭔지 어떤 건축물의 흔적인지 알 수없는 주춧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계림[鷄林]

 

인왕리고분군을 지나면 우측으로 자그마한 숲이 하나 나타납니다.

이곳이 바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탄생설화지 숲인 계림[鷄林]입니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鷄林]이라 하게 되었다고 하며 한동안 신라의 국명으로 사용되던 명칭입니다.



 

계림[鷄林]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 또는 신월성[新月城], 반월성[半月城] - 사이에 있는 숲으로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울창하게 서 있으며, 신라왕성[新羅王姓]인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閼智]의 탄강전설[誕降傳說]과 관계 깊은 숲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김알지[金閼智] 탄강신화[誕降神話]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여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고하니 왕이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게되었는데 그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는데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금]씨라 하였는데 태자 알지는 후에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으나 알지의 7대[6세] 후손이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알지[閼智]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熱漢]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阿都]는 수유[首留]를 낳고 수유[首留]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郁部]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俱道]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는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위[王位]에 올라 신라 13대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추왕으로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여겨 신라의 국명으로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습니다.

 

월성[月城] - 신월성[新月城] 또는 반월성[半月城]


계림을 나서 계속 가다보면 경주 최부자가옥으로 가는 길과 월성, 석빙고로 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바로 직진해서 가게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월성입니다.

 

월성[月城]은 신월성[新月城] 또는 반월성[半月城]으로도 불리는 곳으로 고구려나 백제의 성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북문격인 귀정문[歸正門]·북문·인화문[仁化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平門]·준례문[遵禮門] 등의 문과 월상루[月上樓]·망덕루[望德樓]·명학루[鳴鶴樓]·고루[鼓樓]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 都堂],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 삼궁[三宮 : 大宮·梁宮·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 보물 제66호]만 남아 있습니다.

 

석빙고[石氷庫]

 

석빙고[石氷庫]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작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빙고를 지나면 서쪽으로 작은 언덕을 내려가 월성을 벗어나게 되는데 큰 길로 나서면 바로 맞은편에 동궁과 월지[안압지]가 나타납니다.

이즈음에서 시간이 12시에 가까워 져서 부득이 약속장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당시 초가을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이 적은 분지형태의 지형이라 엄청 더웠으며 비지땀을 흘리며 약속장소로 가는데 떼로 날아 다니는 곤충들 때문에 여간 고통스러운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날파리인 줄 알았으나 날파리가 아닌 번식기에 접어든 날개 달린 개미 즉, 날개미라고도 불리는 개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날개미는 일 년 내내 나오는 곤충은 아니고, 번식기인 5월 중순에서 7월 중순에 혼인비행을 위해 날개가 돋아나고 몇 일동안 혼인비행을 하게되는데 어쩐 일인지 9월에 떼를 지어 날고 있었습니다.

여왕개미가 혼인비행을  하면 선택되기 위해 숫개미들도 비행을 하는데 일생에 단 한번 여왕개미의 혼인 비행이 끝나면 필요 없어진 날개를 잘라내고 알을 낳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숫개미는 일단 날개가 돋아나 날기 시작하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날아 다닌다고합니다.

 

그런데 9월 13일에 만난 날개미는 아마도 짝을 찾지 못한 불운한 숫개미이거나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여왕개미를 찾아 다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둔 날개미 숫컷들의 날개짓 속의 천년 고도 경주에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월성원자력발전소와 한국방사선폐기물관리공단에 대한 팸투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012년 9월 13일 월성원자력발전소 견학을 다녀 온  계룡도령 춘월]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주최 팸투어 참가 하여

한국원자력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된 포스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