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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역사

명재, 300년을 뛰어넘은 '시대의 표상' 충청도 명문가를 찾아서 [1] 파평윤씨 노종공파 윤증


 

아래의 내용은 충남 도정신문에 기사화 된 내용에서 일부 사진을 더한 것이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37632

 

명재, 300년을 뛰어넘은 '시대의 표상'
충청도 명문가를 찾아서 [1] 파평윤씨 노종공파 윤증
[5호] 2010년 02월 02일 (화) 23:23:20 계룡도령춘월 mhdc@paran.com

 

 

 

 

[ 충청남도의 명문가문 파평윤씨 노종공파 윤증 이야기]

 

우연한 기회에 부산을 떠나 이곳 충남 공주의 계룡산에 터를 잡은지도 벌써 10년

그동안 주변의 이곳 저곳 참 많은 곳을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곳...

명재 윤증선생님의 묘소가

내가 사는 계룡면에 위치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명재 윤증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많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윤증선생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번지에 있다.

아직 한번도 가 보지는 않았지만,

항공사진으로만 보아도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증묘소의 항공사진]

 

그는 당시로는 극히 드문 나이인 86세까지 살다가 유봉정사(酉峯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음을 맞는 그의 자세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웬만한 벼슬만 지내도 화려한 수사가 담긴 검은 오석(烏石) 비문을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관례이던 시절에 그는 자신의 비문을 짓지 말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혹자들은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문제로 송시열과 다투었던 것이 한으로 남은 까닭인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의 평소 성품으로 보자면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할 듯하다.

 

이런 연유로 그의 묘소에 서 있는 비문의 내용은 아주 특이하다고 한다.

'유명조선국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名朝鮮國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 해석하면

'조정에서 부른 학덕이 높은 선비 윤증의 무덤'이란 뜻이다.
또한 비문의 하단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노서(魯西·윤선거) 선생 묘(墓)에서 석호(石湖·윤문거) 선생께서 13자를 따서 옮겼다.'

즉 윤선거의 묘비에서 13자를 따서 옮겼다는 뜻이다.


비문을 짓지 말라는 유언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묘 앞에 비문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었던 후손들의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714년(숙종 40) 그가 사망하자 숙종이 애도하는 조사를 지었으며, 1723년(경종 3) 9주기에는 승지가 파견되어 치제(致祭)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는 1746년(영조 22) 원래의 위치에서 이산(尼山) 두사촌(杜寺村)으로 이장되었다가 1765년(영조 41)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

묘소에는 비석 하나만 있고, 문인석이나 무인석 또는 석주나 석등 같은 장식물은 없다고 한다.
본래 묘소에서 세일사(歲一祀)를 지내다가 근래에는 계룡면 향지리의 파평윤씨 노종공파 종중 재실에서 거행하고 있다.
윤증은 이밖에 홍성의 (龍溪書院), 논산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처음 계룡산에서 가까운 논산시 노성면의 윤증고택을 방문하여

윤증선생의 종손으로 종가를 지키고 계시는 명재선생 13대 종손인 윤완식선생님을 만나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았다.

대단한 조상님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어떻게 해야 조상님들보다 나은 모습이 되어 사회와 역사에 이름이 남을까?

파평윤문으로서 ...
명재 윤증의 후손으로서...

 

그 어려움을 홀로 진 종손으로서의 위치...

대를 물려 가문의 명예를 지켜나가고 발전시켜야 할 중압감도 크겠지만

이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주고 있는 명재선생의 삶을 재 조명함으로 해서 앞으로의 삶을 더 밝혀 보자는 의미에서 앞으로 3회에 걸쳐 윤증선생과 그 윤문들의 삶의 철학과 사회에 끼친 공헌에 대해 기술해 본다.

 

명재 윤증은 누구일까?

 

명재 윤증 [明齋 尹拯, 1629~1714]

 

조선 숙종 때의 학자(1629~1711)로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었으며,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나라로 부터 수차에 걸쳐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모두 사양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남인에 대한 입장이 달라 서인이 둘로 나뉜 후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 등이 있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할아버지는 황(煌)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라고 한다.

성혼(成渾)의 외손인데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고,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으며,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윤휴(尹?)·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명재 윤증선생 초상]

 

어린시절의 윤증

 

어머니 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9세 때 손수 장례 치른 윤증


병자호란 당시인 1637년 정월 청의 몽고군이 강화도에 상륙하고 전세가 급박해지자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는 사우(士友)들과 앞으로의 처신을 논의하고 있는데 부인 이씨가 여종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고, 윤선거를 만난 부인 이씨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뵙고 결별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고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윤선거는 부인을 말릴 수도, 그 의지를 칭찬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어서 차마 부인의 자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사우들에게 돌아간 아버지의 소식이 끊어지고 어머니는 자결했지만 당시 9세였던 윤증은 의연했다.

 
윤증은 한 살 위의 누이와 함께 노비들을 인솔해 손수 염을 하고 입관(入棺)한 다음
임시로 거처하던 강화도 사람 정파총(鄭把摠)의 집 마루 아래 빈소(殯所)를 정했다.
윤증은 땅을 파 관을 묻고 사방 모서리에 돌 여덟개를 놓은 후 중간에 숯으로 표식을 하고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청군이 성을 점령한 상태에서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심을 한 윤증은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어 누이와 함께 어머니의 묘소에서 슬프게 곡(哭)을 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윤증은 침착함은 빛을 발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다니던 족보가 적혀 있는 작은 수첩을 꺼내 누이에게 주며 누이에게 이를 외우게 하였다.
『만일 서로 헤어지게 되면 누님은 여자이니 이것으로 서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속깊은 의도였다.

 
윤증과 누이는 그 혼란한 와중에 헤어지게 되고 말았다.
어린 윤증은 성안 사람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김포의 청군 진영으로 끌려갔고,
그의 누이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남의 여종이 되어 의주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족보를 말했는데 다행히 의주에서 만난 어사(御史) 이시매(李時煤)가 아버지 윤선거와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몸값을 대신 지불해 풀려날 수 있었고 윤증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후 풀려나게 된다.

윤증의 침착함과 재치가 없었다면 그의 누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윤증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모두 출타해 가묘(家廟)에 참배할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사당에 참배하게 하자 다른 사촌들은 마지못해 참배한 후 모여 낄낄거렸으나
윤증은 양손을 단정히 하고 용모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를 본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하니 할아버지 윤황은 『이 아이는 보통 아이와 다르다』며 더욱 귀여워하였다.

 

의(義)가 남 달랐던 윤증

 

윤증의 의로운 면을 볼 수 있는 한면이 있어 소개하자면,

윤증이 김포에서 풀려났을 때 어린 그를 업고 다닌 인물은 여종 동절(冬節)이었다고 한다.
동절은 윤선거가 강화도로 피란 와서 거주하던 집의 주인인 정파총(鄭把摠)의 소실이었으며,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관을 내주어 빈소를 차리게 한 사람도 이 동절이었다.

 

그런 동절이 늙어 죽은 후 제상(祭床)을 차릴 아들이 없자 윤증은 몸소 제상을 차려 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윤증이 기력이 남아 있던 85세 때까지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니 그의 의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85세는 그가 몸이 쇠약해져 새벽에 가묘(家廟)에 참배하는 것을 그만둔 해이니 조상을 지내는 정성으로 여종의 은혜를 기린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가 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윤증고택 전경]

 

윤증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이해

 

서기 1714년 86세의 윤증이 사망했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배신하여 사림(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수년 후 그 일이 탄로나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화가 나서 절교 편지를 보냈다.
윤증은 어렸을 때 유계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윤증이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라고...

 

하지만 윤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당시의 임금 숙종은 이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또한 『윤증연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사가 무려 2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백명의 관학(館學) 유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해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려운' 배은망덕한 인물에 대한 숙종의 추모시와 밀물 같은 조문객은 어떤 연유일까? 더구나 그의 집은 서울도 아니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그의 집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라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집 뒤로는 노성산이, 그 뒤로는 계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윤증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성(泥城)이라고 불렸던 이 한적한 농촌까지 2천여명의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했던 것이다.

 

『숙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바라본 윤증은 두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그것도 스승이 쓴 책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당하는 비양심적인 인물이다.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君師父)가 하나로 취급되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두 스승을 배신했다는 평가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두 현상은 그만큼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가운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증의 생애에 관한 상반된 두 평가 중 진실은 무엇일까?

 

사실상 윤증은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남인·노론(老論)과 함께 3대 정당 중의 하나인 소론(少論)을 이끌었던 저명한 정치가였다.
바로 이 때문에 『숙종실록』의 사관이 그의 생애를 혹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글을 기록한 사관은 반대당인 노론(老論)측 인물이었던 것이다.


흔히 국가의 공적 기록인 「실록」을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적 기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의 기록은 비록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관이 어느 당파 사람인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오늘날도 여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과 야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이 다른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윤증고택의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사랑채와 장독대]

 

 

윤증의 생애

 

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다.
송시열은 윤증의 스승인 동시에 정적(政敵)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송시열과 윤증은 은원(恩怨)으로 얽힌 모순된 존재였다.


윤선거와 윤증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부자지간과는 다른 모습이 있다.
윤선거는 윤증에게 아버지 이전에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우를 범한 존재였다.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윤선거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개인적인 인연에만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이 엮어 가는 이야기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해 있던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해법에 따른 정치적 행보는 아직까지도 윤선거와 윤증의 파평(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 그와 한바탕 다툰 데 이어 그의 아들 윤증과도 크게 다투었던 인물이다.
이렇게 말하면 두 집안이 마치 대대로 원수 사이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또 그렇지도 않다.

알고 보면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
조선에서 동문 사이는 곧 같은 당인(黨人)임을 뜻하는 것과 같다.
조선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에 있기 때문인데.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윤선거와 송시열은 같은 정당인 서인이었던 점은 당연한 현상이었고, 당시 서인은 집권당이었으므로 이 두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여당인(與黨人)들이었다.


또한 같은 당 소속이었던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다.
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문거(文擧)의 며느리, 즉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조카며느리였다.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던 조선시대에 결혼은 곧 집안끼리의 결합이다.

현재에도 재벌가와 지배층들은 혼인을 서로의 권력과 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따라서 두 집안이 사돈이란 의미는 두 집안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같은 당파이자 사돈 사이인 가까운 관계가 왜 악화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일까?

 

윤선거와 송시열이 부딪친 발단은 백호(白湖) 윤휴문제였다.
그 유명한 사문난적(斯門亂賊)의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사문난적 논쟁은 원래 윤휴와 송시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위기를 맞이한 조선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식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다.

송시열은 양란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주자학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주자는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인 효종에게까지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했을 정도로 주자를 절대시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성리학 체제로는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는 데 격분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격했다.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도 심하다."라고, 하지만 서인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반대당파 남인인 윤휴를

"그는 고명한 학자이므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감싸고 나섰다.
그러자 윤휴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린 서인들은 
충남 강경의 금강 근처에 세워진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조선시대의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은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조선 유학의 학통을 이은 대유학자들을 모신 핵심적인 서원이었다.

이 황산서원에 송시열·윤선거 등 저명한 서인학자 10여명이 모인 때는 1653년(효종 4)
팔우재에서 보이는 금강은 고요하기만 하였지만 이들의 논쟁은 한치의 틈이나 양보가 없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모는 데 윤선거가 끝내 동의하지 않자 송시열은,
"주자를 이기려 한 윤휴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는 죽음 이외의 형벌이 없소. 임금이 춘추의 법으로 다스릴 때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공(윤선거)은 응당 윤휴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라며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양단간에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당시는 주자학 절대주의의 시기였다. 

이는 이미 사상이나 학문의 차원을 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나 이념의 차원이나 마찬가지였었다.
이에 한참을 망설이던 윤휴는
"음양(陰陽)으로 말한다면 주자가 양(陽)이고 윤휴가 음(陰)이 되겠소." 
 
황산서원 회합은 외견상 송시열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히 주희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라는 개인간의 선택 차원이 아니라

조선 주자학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아닌가 라는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선택 차원의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희가 틀리고 윤휴가 옳다고 말한다면 윤휴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릴 판이었기에 윤선거로서는 윤휴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승리한 송시열은 이를 서인학자 사이의 합의를 도출한 것에 만족하고 더 이상 비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산서원 회합에서 쌓인 감정의 앙금은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잠복한 상태였다.

이후 효종의 죽음이 계기가 된 예송논쟁은 이 감정의 앙금이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심각한 문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표면적 모습은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성인인 맏아들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복을 입게 돼 있었고 기타의 경우는 1년복을 입게 돼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윤휴는 송시열의 1년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기 때문에 1년설을 주장한 것이라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실각한 송시열은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까지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던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증오를 키웠고,

송시열은 그 누구보다 효종과 가까웠던 자신을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으로 모는 데 분개했다. 

조선시대,

어찌 보면 사소한 예법이나 감정싸움으로 인한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물고 물리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윤휴가 처형되고 이어 무려 1백여명의 남인들이 사형·유배·삭탈관작 등의 화를 입는 결과를 낳았다.

 

 

[윤증고택의 상징인 돌오리솟대와 장독대 그리고 복원한 외사랑채와 도서관인 노서서재]

 

 

윤증의 생애

 

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다.
송시열은 윤증의 스승인 동시에 정적(政敵)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송시열과 윤증은 은원(恩怨)으로 얽힌 모순된 존재였다.


윤선거와 윤증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부자지간과는 다른 모습이 있다.
윤선거는 윤증에게 아버지 이전에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우를 범한 존재였다.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윤선거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는 개인적인 인연에만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이 엮어 가는 이야기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해 있던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해법에 따른 정치적 행보는 아직까지도 윤선거와 윤증의 파평(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 그와 한바탕 다툰 데 이어 그의 아들 윤증과도 크게 다투었던 인물이다.
이렇게 말하면 두 집안이 마치 대대로 원수 사이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또 그렇지도 않다.

알고 보면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
조선에서 동문 사이는 곧 같은 당인(黨人)임을 뜻하는 것과 같다.
조선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에 있기 때문인데.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윤선거와 송시열은 같은 정당인 서인이었던 점은 당연한 현상이었고, 당시 서인은 집권당이었으므로 이 두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여당인(與黨人)들이었다.


또한 같은 당 소속이었던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다.
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문거(文擧)의 며느리, 즉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조카며느리였다.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던 조선시대에 결혼은 곧 집안끼리의 결합이다.

현재에도 재벌가와 지배층들은 혼인을 서로의 권력과 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따라서 두 집안이 사돈이란 의미는 두 집안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같은 당파이자 사돈 사이인 가까운 관계가 왜 악화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일까?

 

윤선거와 송시열이 부딪친 발단은 백호(白湖) 윤휴문제였다.
그 유명한 사문난적(斯門亂賊)의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사문난적 논쟁은 원래 윤휴와 송시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위기를 맞이한 조선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식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다.

송시열은 양란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주자학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주자는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인 효종에게까지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했을 정도로 주자를 절대시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성리학 체제로는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는 데 격분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격했다.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도 심하다."라고, 하지만 서인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반대당파 남인인 윤휴를

"그는 고명한 학자이므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감싸고 나섰다.
그러자 윤휴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린 서인들은 
충남 강경의 금강 근처에 세워진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조선시대의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은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조선 유학의 학통을 이은 대유학자들을 모신 핵심적인 서원이었다.

이 황산서원에 송시열·윤선거 등 저명한 서인학자 10여명이 모인 때는 1653년(효종 4)
팔우재에서 보이는 금강은 고요하기만 하였지만 이들의 논쟁은 한치의 틈이나 양보가 없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모는 데 윤선거가 끝내 동의하지 않자 송시열은,
"주자를 이기려 한 윤휴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는 죽음 이외의 형벌이 없소. 임금이 춘추의 법으로 다스릴 때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공(윤선거)은 응당 윤휴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라며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양단간에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당시는 주자학 절대주의의 시기였다. 

이는 이미 사상이나 학문의 차원을 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나 이념의 차원이나 마찬가지였었다.
이에 한참을 망설이던 윤휴는
"음양(陰陽)으로 말한다면 주자가 양(陽)이고 윤휴가 음(陰)이 되겠소." 
 
황산서원 회합은 외견상 송시열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히 주희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라는 개인간의 선택 차원이 아니라

조선 주자학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아닌가 라는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선택 차원의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희가 틀리고 윤휴가 옳다고 말한다면 윤휴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릴 판이었기에 윤선거로서는 윤휴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승리한 송시열은 이를 서인학자 사이의 합의를 도출한 것에 만족하고 더 이상 비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산서원 회합에서 쌓인 감정의 앙금은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잠복한 상태였다.

이후 효종의 죽음이 계기가 된 예송논쟁은 이 감정의 앙금이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심각한 문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표면적 모습은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성인인 맏아들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복을 입게 돼 있었고 기타의 경우는 1년복을 입게 돼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윤휴는 송시열의 1년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기 때문에 1년설을 주장한 것이라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실각한 송시열은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까지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던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증오를 키웠고,

송시열은 그 누구보다 효종과 가까웠던 자신을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으로 모는 데 분개했다. 

조선시대,

어찌 보면 사소한 예법이나 감정싸움으로 인한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물고 물리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윤휴가 처형되고 이어 무려 1백여명의 남인들이 사형·유배·삭탈관작 등의 화를 입는 결과를 낳았다.

 

[윤증고택의 항공사진]

 

 

윤증이 제기한 3가지 조건,

즉 '3대 명분론'에는 남인과 서인의 화해, 척신 정치구조의 타파, 당색과 지역색을 배제한 고른 등용이라는 당시 조선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해법이 그대로 적시되어 있다.

이는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투쟁의 정치에서 화해의 정치로, 증오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로 나가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으며, 이 시대의 현실과도 그대록 적용되는, 또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윤증은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엄격한 선비였던 것 같다.
그는 평상시에도 항상 일찍 일어나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손수 방과 마루를 쓴 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고 한다.
혼자 있을 때도 손님과 함께 있는 듯이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한번도 태만하게 누워 쉬는 법이 없었다는데,
사람을 맞을 때도 노소귀천(老少貴賤)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했다고 한다.

또한, 윤증은 검소한 삶을 스스로 실천했다.
집안은 아주 검소하면서도 거처하기는 편안하게 했으니 실질을 숭상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현미밥과 거친 옷을 입는 것을 분수에 맞다고 여겼다.
그리고, 집안 여자들에게도 절대로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름난 효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지낼 때는 종이 주머니에 소금과 후추만으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새벽에 가묘에 참배하고 제사를 스스로 받드는 것을 보고 걱정을 하자, 윤증은 『내 근력이 아직 제사를 받들 만한데 어찌 자식에게 대신케 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새벽에 사당 참배하는 것을 중지한 것은 죽기 1년 전인 85세 때였다.

숙종 35년, 그의 나이 81세 때는 정1품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윤증은 그때까지 숙종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예는 윤증이 전무후무하다.
물론 이때도 윤증은 18번이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31세 때부터 평생 20여번 이상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사양의 상소를 올리는 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쏟았다는 우스개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시대...

우리가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모습 중에서 단 한사람의 윤증이라도 찾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운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자라는 청소년들이나,

세상의 의협이나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퍄평윤문 노성공파의 윤증은 어떤 인물로 비춰질지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돌고 도는 역사가 올바른 인물을 재 조명하고 이르 교훈으로 삼아

진정 국강와 민족, 국민을 위하는 정치의 표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의 충청도 명문가의 탐방 제 1신인 명재 윤증은 그러한 해답을 고스란히 가진

그래서 이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명문가라는 것은 그 무게 만큼이나 후손들과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할 것이다.

 

삶이란 그저 흔적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 올곧게 기록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의 명문가를 찾아...  명재 윤증선생의 발자취를 쫓은  계룡도령 춘월]

 

 

참고 문헌[출간년대 순]

조선유학사 : 현상윤, 민중서관, 1949

이조당쟁사연구 : 강주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1

당의통략(黨議通略) : 이건창,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72

동국붕당원류(東國朋黨原流) :,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73

명재 윤증의 무실학 〈철학연구〉 26 : 유명종, 한국철학연구회, 1978

조선후기 당쟁사연구 : 이은순, 일조각,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