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왜 '민족주의'를 미워하는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⑥ 2008-08-26 오전 9:28:29 서언에서 내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내 주장이 뉴라이트와 통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독자들의 지적도 있고, 마침 뉴라이트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기도 해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얼마간 살펴본 끝에 지금 내놓고 있는 '따져보기'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들과 내 관점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여기 있으며, 그들 주장의 가장 큰 위험도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족'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보다 익숙한 민족주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그리고 바로 이어서 '민족 지상주의' 이야기를 한다. 민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두 가지 방향으로 쓰인다. 근대 유럽에서 나타나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역사적 현상으로서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도 쓰이고, 민족을 중시하는 모든 사고와 정서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도 쓰인다. 민족주의 문제에 민감한 일본 지식층에서는 영어 'nationalism'으로 표현되는 범위를 '국가주의', '국민주의' 등으로 구분해 보려는 노력이 있다. 그밖에도 '국수주의', '애국주의' 등이 민족주의와 부분적으로 겹쳐 쓰이는 말들이다. 다민족 통합 국가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정치적 느낌을 띠는 '주의'란 표현을 피한 것으로 이해되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주의'란 말을 남용하는 풍조도 반성해 볼 만한 일이다. 우리가 '민족주의'란 말을 쓸 때, 사실 별다른 정치적 의미 없이, '민족심'이나 '민족 정서' 같은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뜻으로 쓸 때가 많다. 내 가정을 사랑한다 해서 가정 이외의 사회 조직 원리를 모두 배격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도시를 아낀다 해서 다른 도시에 꼭 불을 질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라 하는 것은 참으로 독단적이고 난폭한 규정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은 어디에 있는가? 같은 언어를 쓰고 하나의 국가에 속해 있으면서 주변의 중국인, 일본인, 여진족과 대비되는 정체성을 스스로 의식하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말하는 "구래의 조선인"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면 무엇이었단 말인가? 1906년 핀란드의 여성 참정권 도입 전까지는 유럽에 민족이란 것이 없었단 말인가? 프랑스에는 1944년 여성 참정권을 시행하고서야 민족이 생겼단 말인가? ▲ 이번 올림픽은 대한민국 영웅의 모습에 개성의 스펙트럼을 크게 넓혔다. 이용대의 뇌쇄적 윙크, '우생순' 아줌마들의 무한도전 정신, 우커송 구장의 연속 드라마 등등이 연이어 우리를 감동시켰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손잡고 함께 자라난 성과인 이 풍성한 스펙트럼을 하나의 퍼레이드에 쓸어담는 것이 아깝다. 개인 일정대로 귀국하면서 다양한 환영회를 자발적으로 열게 하는 것이 촛불의 나라 대한민국에 어울릴 텐데. ⓒ서울방송(왼쪽)·뉴시스(오른쪽)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국사 해체' 주장" 국가 권력에 조종된 민족주의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적대적 공범 관계'를 통해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규율하는 문제를(<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24~28쪽)나도 심각하게 생각한다. 왜곡된 민족주의에 민주적 가치가 억눌리는 현상에서 그의 문제의식이 출발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대안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시달린 끝에 그는 이렇게 입장을 정리한다. 서론 격인 그의 글 바로 뒤에 실린 것이 위에도 인용한 이영훈의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이기 때문이다. 민족사를 넘어서려면 문명사를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임지현이 대안 없이 비워놓은 자리를 기껏 차지하고 들어앉는 것이 문명사의 명찰을 단 자본주의화 역사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 그의 '해체' 집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해소하는 데는 국사의 '재구성'이 더 온당한 길이 아닐까? 앞서 한 차례 옮겨놓았던 글을 다시 내놓겠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이영훈은 위 인용 내용에 이어 이렇게 말한다. "민족주의는 1945년 이전 구제국주의 시대의 어두운 정신사에 속한 것입니다." 이영훈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의 분열까지 획책한다. 독자들에게 지루하겠지만, 그의 의도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조금 길게 인용하겠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라고 이름붙일 만한 사람은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 좌파 민족주의자일지 머릿속에 상상도 되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의 바탕이 된 것도 그냥 민족주의지, 어느 쪽 민족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를 통째로 빨갱이로 몰아붙일 수가 없어서, 쪼개서 따로따로 욕해야 하게 된 것이 그래도 좋은 세상이 온 덕분이다 싶어 기쁘다. 현실 인식에 보수적이라 해서 뉴라이트처럼 민족주의를 등질 필요가 꼭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기회주의라고 매도할 것은 또 뭔가. '기회주의'란 말이 보통사람들에겐 매우 모욕스러운 말이라서 나는 이승만에게 그 말을 쓰면서도(<밖에서 본 한국사> 290, 292쪽)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이영훈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뉴라이트가 신봉하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쉽게 말하면 극우파 이념이다. 촛불 사태를 둘러싸고 뉴라이트계 단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민족주의가 박지향의 규정처럼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선동과 조작에 의해 그런 성향을 나타내기 쉬운 것은 사실이고, 그런 선동과 조작에 나서는 것이 늘 극우파였다.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반일'을 내세우면서도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외세 의존적인 방향으로 짜놓았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 가치를 억누르는 데 민족주의를 활용했지만, 외세 의존적인 틀을 바꾸지 못했다. 그런 경험을 배경으로 민주화를 진전시킨 한국 사회에는 '관제 민족주의'를 세울 여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뉴라이트가 적대해 온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길을 열어준 긴장 완화를 (이영훈이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다수 국민이 반기고 있다. 이미 자연스럽게 열려 있는 이 길에는 더 이상 선동과 조작의 여지가 없다. 민족주의를 무기로 이용할 여지가 없는 바에야 적군이 이용하지도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정면 돌파 전략이다. 자원 공급 감소라는 현실 변화 앞에서 계급 간 화해 노력을 포기하고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촛불 사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정면 돌파 전략에 뉴라이트 계열이 앞장서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큰 위협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가치와 민주주의 가치가 더 투철하게 화합할 계기가 된다면 전화위복의 의미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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