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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세계

우리는 지금 닭을 닭이라고 못 부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미네르바]

 

 

[시평]닭을 닭이라고 못 부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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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31일 (수) 11:39:56박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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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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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강압통치 시절인 1970~1980년대, 당시 대학생들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를 즐겨 읽었다.

두 잡지는 영어공부를 위한 훌륭한 교재이기도 했고, 다양한 외국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했다.

물론 빨간 색이 두드러진 타임지 겉표지를 밖으로 드러낸 채 들고 다니며 ‘장식용 소품’으로만 이용한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 타임지와 뉴스위크 등 외국잡지엔 새까만 매직 팬으로 블라인드 처리된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한국의 군사정부를 비판적으로 다룬 기사 내용을 검열 당국이 수작업으로 지운 자국이었다.

이 땅의 언론자유를 통제하던 원시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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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일 청와대에서 정부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이명박 대통령(사진 가운데). ⓒ청와대

 
 

2009년 새 아침을 맞는 이즈음, 30여 년 전 원시적 언론통제의 망령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베일 속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오랜만에 올린 글이 블라인드 처리되는 수난을 겪었다.

며칠 전 미네르바는 인터넷포털 다음 아고라에 올린 ‘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정부가) 긴급업무명령 1호로 29일 오후 2시30분 이후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고 긴급 공문을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글이 올라오자 기획재정부는 즉각 “미네르바의 글은 사실 무근”이라는 해명자료를 냈다.

곧이어 미네르바의 글은 화면상에 보이지 않도록 블라인드 처리됐다.

다음 쪽은 “미네르바의 글이 올라온 뒤 해당 글을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서면으로 접수됐다”고 밝혔다.

오랜만에 내놓은 미네르바의 글이 마치 불온 삐라라도 되는 것처럼 잽싸게 제거된 것이다.

미네르바는 “속상하다, 그리고 사과드린다”라는 글을 아고라에 올렸다.

그의 글을 블라인드 처리한 근거는 정보통신망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정보통신망을 통해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권리를 침해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

또,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지체 없이 삭제, 임시조치 등을 해야 한다.

도대체 미네르바의 글이 누구의 사생활을 침해했을까.

또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을까.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무능을 폭로한 게 죄라면 모를까.

미네르바의 독백이 섬뜩한 여운으로 남는다.

닭을 닭이라 부르고,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죄인가….

상황이 이럴진대 한나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7대 미디어 관계법마저 더해진다면 어떤 세상이 올까.

사이버 모욕죄가 도입되면 인터넷 공간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고, 방송법이 통과되면 재벌과 족벌언론들이 지상파 방송마저 틀어쥠으로써 TV와 라디오에선 보수 세력 목소리만 흘러나오는 세상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땅의 언론인들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다던가.

언론인들이 ‘7대 미디어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속속 결집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한나라당의 7대 미디어 관계법 저지를 위해 지난 26일부터 닷새 째 총파업 중이다.

전면 제작 거부를 선언한 MBC, EBS, CBS 등 지상파 방송사와 부분 제작 거부를 결의한 경인일보 등 언론사들은 물론 참여연대, 미디어행동, 민생민주국민회의, 인권단체연석회 등 10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MB 악법 저지 비상국민행동’, 언론노조의 총파업을 지지하는 일반시민과 네티즌 등이 대거 악법 저지 전선을 구축하고 나섰다.

‘낙하산 구본홍 반대와 공정방송사수’ 투쟁을 벌이고 있는 YTN 기자들은 160여 일 동안의 지난한 싸움에도 지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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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주 논설위원. 
 

KBS 기자들도 구경만하고 있지는 않았다. KBS의 평기자 104명은 30일 언론노조 총파업 출정 현장에서 악법저지에 힘을 보탤 것을 선언했다.

이들은 실명을 내걸고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모든 방송인이 어깨를 겯고 싸우는 현장에서 유독 KBS만 모습을 감춘 탓”이라고 개탄했다.

자괴감을 느끼는 언론인들이 어디 KBS의 젊은 기자들 뿐 이랴.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사주와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곡필‘하고 있는 적지 않은 사이비 언론인들이 함께 겪는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양질이다.

한자리 차지해보겠다고 적극적으로 ‘지록위마(指鹿爲馬)’하는 사이비 언론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2009년 새날이 밝아온다.

새해엔 닭을 닭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맞게 될 지도 모른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