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구/자연/환경

[조홍섭칼럼]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 농부는 자연파괴범인가? 사람 내쫓는 방식의 자연보호 성공한 적 없어


자연에 대해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할 내용의 칼럼이라 본인의 허락없이 옮겨 보았다.

언젠가 내가 짧게나마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지금 산에서 진달래나 나물 등 야생화가 사라지는 것은 인간의 무차별적인 훼손도 문제이지만

관리되지 않아 제 멋대로 자라버린 나무들의 영향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불이나면 제일 먼저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면서 숲이 형성된다.

하지만 너무 자라기만 하는 나무 숲은 곧 햇빛을 받아야 자라는 식물들을 몰아 내고 만다.

 

그래서 사라진 식물들이 우리가 기억하고 계산해 내는 것 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 계룡산국립공원에서 생활을 한지도 10년여...

그동안 사라지는 식물들을 보며 찾아 낸것은 인간의 손길 때문이 아니라 관리되지않은 자연 스스로의 역활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4대강 죽이기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의한 것은 영영 되살리지 못하게 하는 아예 파괴란 말이 맞을 것이고...

숲을 들어가 보면 온갖 덩굴식물들이 얼키고 설켜 빛을 차단하니 서로 경쟁하듯 위로 위로만 향하게 되어

나무 자신들에게도 좋지 못한 결과를 결국에는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야생조수들을 보호하자고 하여 잡지않게 되니

멧돼지 등에 의한 온갖 폐해가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적당한 수준[물론 많은 연구와 검토가 따라야 하겠지만]의 관리는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당히 간벌도 해주고,

덩굴식물들도 제거 해주고

햇빛이 나무 밑둥에도 닿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럼] 제 이름 뺏긴 잡초, 농부는 자연파괴범인가

 

텃밭 단상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개발 억제는 ‘헛소리’

사람 내쫓는 방식의 자연보호 성공한 적 없어
 
텃밭은 작은 경이를 안겨준다.

고추, 열무, 토마토 같은 채소를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는 것과 모종을 심고 물과 퇴비를 주어 수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농산물의 소비자와 생산자의 차이만이 아니다.

텃밭은 우리에게 자연을 느끼게 한다.

텃밭 가꾸기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행위를 넘어 맑은 공기를 마시고 흙냄새를 맡으며 밭에서 사는 온갖 생물과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농작물은 자연계 기준으로 보면 기형 식물
 
텃밭농사는 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채소를 재배하다 보면 책상 앞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먼저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일 주일만 한 눈을 팔면 밭의 주인이 바뀌고 만다.
 
억울하게도 제 이름 대신 ‘잡초’로 한꺼번에 분류되는 다양한 식물들은, 밭처럼 햇볕이 잘 들고 경쟁자가 없는 곳의 개척자로 진화했다.

잡초는 재빨리 신천지를 장악하고 신속하게 자라 번식을 하는 억센 속성을 타고났다.

농부는 잡초만 골라 제거하는 ‘자연선택’을 함으로써 작물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뿌리째 뽑혀 시들어가는 잡초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농부는 없다.
 
농작물은 자연계의 기준으로 본다면 터무니없이 연약하고 사람이 수확하는 부위가 비대해진 기형적인 식물이다.

새와 곤충, 토양생물들이 농작물을 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랑에 나란히 뿌려진 콩을 발견한 굶주린 멧비둘기의 횡재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텃밭 농부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연 파괴범인가.

텃밭을 가꿔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 화를 낼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연은 사람과 분리했을 때보다 그 속에 사람을 받아들일 때가 더 ‘자연적’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보전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모색 위한 적절한 예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때 아마존 열대우림처럼 적절한 예는 없을 것이다.

‘지구의 날’이나 ‘환경의 날’이 되면, 세계의 유력매체들은 아마존의 파괴와 훼손을 예로 들며 환경보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숲을 태워 목장과 경작지로 만드는 현지 주민과 농업자본으로부터 ‘지구의 허파’를 지키자는 것이다.
 
알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아마존은 (브라질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브라질은 아마존에 대한 권리를 적절한 국제기구에 위임해야 한다”고 했고,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아마존 지역에 대한 국제 환경운동은… …실행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 단계에서는 당연히 직접적인 군사적 간섭도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브라질의 산림파괴가 극심했던 1980년대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생각은 아직도 일반인은 물론 세계 환경론자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존 열대우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상당부분 환상에 불과하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가 아니며, 아마존 주민들의 삶을 유보하고 지구를 위해 개발을 억제하자는 주장은 좋게 말해 헛소리이고, 심각한 주권 침해일 뿐이다.
 
 


 
 
지구 산소 생산 주인공, 아마존 아니라 바다 속 플랑크톤


 
아마존 유역의 면적은 650만㎢에 이른다.

남한 전체의 65배에 이르는 넓이이다.

페루 안데스 산맥에서 흐름을 시작한 아마존 강은 적도를 따라 6450㎞를 흐른 뒤 대서양에 도달한다.

1500년 아마존 강 하구를 탐험한 핀손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강인 줄 모르고 ‘짜지 않은 바다’라고 불렀다. 하구의 폭이 322㎞에 이르니 그럴 만도 했다.
 
세계 열대우림 식물종의 절반이 분포하는 아마존에 대한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이곳에서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방출하는 산소가 지구 전체 산소생산량의 80%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아마존 숲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에 당장 숨이 막힐 듯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기에는 적당해도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아마존처럼 오래 되고 성숙한 숲에서는 산소가 생산된 양 만큼 소비된다는 것이 과학계의 상식이다.

숲의 양이 계속 늘어나는 젊은 숲은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목재 형태로 가둔 만큼 산소를 공기 속에 내뿜겠지만, 자란 만큼 죽어 분해되는 장년기 숲에서는 들고 나는 산소의 양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실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는 주인공은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바닷물 속 식물플랑크톤이다.

바닷물 한 방울에 수십만 마리가 들어있는 프로클로로코쿠스 속 등 1988년 처음 발견된 극미소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지구 산소의 절반을 생산한다.
 
 

 img03.jpg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야생의 땅이란 신화일 뿐


 
사실 아마존에 관한 더 심각한 오해는 사람의 손길을 차단해야 아마존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 언론과 환경단체에 널리 퍼진 이런 생각의 뿌리는 깊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마크 런던과 브라이언 켈리는 25년 동안의 아마존 취재 기록을 담은 책 <마지막 숲>(한국어 판은 <숲 그리고 희망>/조윤경 옮김/예지)에서 아마존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베티 메거스의 1950년대 연구가 아마존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연구는 요컨대, 아마존의 토양은 양분이 폭우에 씻겨나가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화전을 일구는 이주농민 말고 지속적인 문명을 건설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메가스는 자신의 이론을 확장해 아마존이 건드리면 쉽게 파괴되는 놀랄 만큼 복잡한 모래성 같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 아마존 횡단 고속도로 건설 등 아마존의 산림이 황폐화되는 사태가 빚어짐으로써 아마존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마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경험적인 연구결과들이 잇따라 나왔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아마존에 살아왔으며, 따라서 아마존은 잃어버린 낙원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란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지리학자인 위리엄 데너번이 <미국지리학회지>(AAAG) 1992년 9월호에 실은 논문 ‘원시 신화: 1492년 아메리카의 풍경’은 대표적인 학술적 성과로 꼽힌다.

이 논문의 초록을 옮겨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야생의 땅이란 신화가 완고하다.

아메리카는 인간에 의한 교란이 거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 거의 모든 곳에는 인간이 만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

인구도 많았다.

숲의 조성은 변형됐고, 초원이 만들어졌으며, 야생 생태계는 훼손됐고 침식이 곳에 따라 심각했다.

어딜 가나 흙으로 만든 성채, 도로, 밭, 주거지가 있었다.

구세계에서 옮겨온 질병 와중에도 인디언의 노력으로 많은 곳에서 환경이 복구됐다.

사람의 존재는 1750년보다 1492년에 더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원주민이 이미 환경과 조화 이루며 개발해와
 
말하자면 유럽인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원주민들은 아마존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종종 파괴적이기도 했지만) 개발해 왔다는 것이다.

마크 런던과 브라이언 켈리는 앞의 책에서 “인간은 결코 아마존을 그대로 둔 적이 없다. 1만 년 이상 된 열대우림 대부분은 순수하지도, 원시적이지도 않았다”며 “유럽인들이 질병을 퍼뜨리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기 전, 초기 문명이 성공적으로 아마존에 정착했다면 다시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묻고 있다.
 
콜럼버스 일행이 가혹한 기후와 질병을 무릅쓰고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 이미 수 만 명의 원주민이 문명을 이루고 잘 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유럽에서 이주한 청교도들이 한 번도 도끼질을 당해본 적이 없는 수 백 년 된 참나무를 베어내 집을 지었다는 얘기도 신화이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오하이오 대학 지질학과의 그레고리 스프링거 박사 팀은 국제학술지 <홀로세> 3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했다.

미국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동굴에서 채취한 석순 속 방사성동위원소를 분석해 지난 3천년 동안의 환경변화를 살펴보니, 북미 동부 산림은 인디언이 4~20년 주기로 지른 산불의 영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디언들은 주식인 히코리, 밤, 도토리 등을 얻기 위해 불을 질렀다. 이들 견과류는 산불에 강하기 때문이었다.

산불은 또 그늘을 드리우는 숲을 없애 풀이 자라도록 하고, 이를 먹기 위해 사슴 등 사냥감을 유인하는 효과도 낸다.

따라서 이 지역에 225년 전 처음 도착한 유럽인이 목격한 것은 인디언이 조성한 인위적 자연이지 원시자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9년 째 출입 통제됐던 지리산 칠 계곡의 교훈
 
지난 2007년 9년째 출입이 통제됐던 지리산 칠선계곡의 개방을 앞두고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이장 선시영 씨(당시 47세)를 만났다.

민박이 주 수입원이 주민들은 산에 갈 때마다 주머니에 담배꽁초를 주워 오는 등 자연보호 의식이 높다.

그러나 그는 국립공원에서 풀 한 포기도 손대면 안 된다는 국립공원 당국의 시각과는 다른 자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연도 사람과 마찬가지여서 관리 안 하고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무도 적당히 가지를 쳐 주고 솎아베기를 해야 햇빛이 들어와 풀이 자라고 초식동물이 꼬인다는 것이다.

“화전을 했을 때는 멧돼지 등 동물이 많았는데 지금은 숲만 우거졌지 동물이 없다”고 했다.

해마다 풍성히 열리던 머루와 다래도 햇빛이 적으니 웃자라느라 해걸이를 한다고도 했다.
 
물론 우리나라 상황에서 국립공원을 주민들 방식대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연구해 볼 문제다.

그러나 공원당국은 칠선계곡 주민들을 탐방안내원으로 채용함으로써 이들이 이곳 자연에 관한 전문가임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자연보전을 입에 올리기는 쉽다.

사람의 접근을 막으면 자연은 저절로 살아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사람을 내쫓는 방식의 자연보호는 성공한 적이 없다.

자연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법을 아는 이들이 사라지면, 자연에 무지하고 냉혹하게 이윤만 추구하는 도시인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을 어떻게 현명하게 관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땀방울을 떨구며 텃밭을 가꾸는 사람에게서 바로 자연을 지혜롭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원문보기 http://ecotopi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ep_blue2&uid=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