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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부산여행-부산근대역사관] 일제식민지부터 현재에 이르는 부산의 역사가 한눈에...

 

[부산여행-부산근대역사관]

일제식민지부터 현재에 이르는 부산의 역사가 한눈에...

 


 

부산근대역사관

현재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명명된 이 건물은 일제국주의의 강점기인 1929년 지어져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그 용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해외공보처인 미문화원으로 50년여 사용되다가 1990년대 들어 부산시에 반환되어 약 3년여의 보수를 거쳐 2003년부터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 부산의 역사자료 총 200여점의 유물과 2개의 전시실을 갖춘 채 간단하게 정리하여 개관한 곳이 바로 이곳 '부산근대역사관'입니다.



 

그 속에서 부산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왔을까요?

 

 

기억속의 부산

부산이 고향인 계룡도령의 기억 속 부산은 어떤 모습일까요?

 

반세기를 넘게 살아 온 역정을 거슬러 가다 보면 한올 한올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되새겨지는 계룡도령의 기억 속의 부산은 가장 먼저 전차에서 시작됩니다.

 

오십환짜리 백동전 하나로 대신동 당시 부산여고 앞에서 전차를 타고 동래 온천장까지 왕복을 했던 기억 말입니다.

 

여름에는 서면으로 겨울에는 온천천으로 놀러 다니던 그 기억들에 이어 떠 오르는 것이 외항선의 뱃고동 소리입니다.

 

산 너머에 집이 있는데도 큰배들의 뱃고동 소리는 '뚜왕 뚜왕' 참으로 크게도 들렸습니다.

 

당시 어린나이임에도 타지에서 친척들이 오면 당시 우마차가 다니던 영주터널을 지나갔다 돌아오는 관광 가이드 역활을 했던 기억도 슬며시 일어납니다.

 

부산은 계룡도령의 고향이니까요...^^

 

그리고 계룡도령의 성장기 부산은 서면 로터리로 대별되는 주변 군 정비창과 이곳에서 각종 부품들을 빼돌리려 판매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한 산업지대와 남포동 광복동을 중심으로 밀수품 위주의 소비와 패션 문화가 주도하는 양대 발전의 모습으로 변해가던 기억이 지금은 대부분의 인지도를 해운대에 빼앗겨 버린 현실에 자조적인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산은 1963년 '직할시'라는 이름을 꼬리에 달게됩니다.

 

당시에 어린나이였으니 그 기억이 새삼스러울리는 없을 것이고...

 

한동안 서울은 왜 특별한 시가 되었고, 부산은 왜 직접 관활하는 직활시가 되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 즈음에는 왜 직활시가 직할시로 변했다가 광역시로 변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참 부질없는 생각이라구요?
^^



 

항구도시 부산

다들 아시듯 부산은 항구도시입니다.

항구는 일제의 역사 속에서는 수탈한 물자를 본국인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중요한 교충지였습니다.

 

대한민국 어디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일제 강점기 그들의 필요에 의해 커지고 작아진 도시들이 유달리 많은 것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부침이라 하겠습니다.

 

부산은 단지 일본과 가까운 항이라는 이유 만으로[?] 임진왜란 이후 서서히 성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급격한 변화를 보인 대표적인 곳입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후 다른 곳들은 성장을 멈추거나 쇄락의 길로 접어 들지만 6.25한국 전쟁을 전후해 대한민국 최대의 항구 도시 부산은 미군들의 주요 입국경로가 되면서 그 성장이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일제 수탈의 상징 동양척식주식회사

처음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부산근대역사관은 당시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세운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의 부산지점 건물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는 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관리, 건물의 건설, 매매, 대차 그리고 특히 일본 소작인들에게 특혜를 주며 한국으로의 이민을 지원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펼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1917년까지는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이주, 농업경영, 토지경영, 토지개량, 임업경영이 주력 사업이었지만 1930년대 이전까지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사채시장을 잠식하듯 금융 사업을 확장하면서 산미증식계획도 추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는 1916년 쌀폭동이라고 불린 식량 부족에 따라 조선에서의 식량 수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던 일제는 1930년대 이후에는 광업 부분으로 확장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공업의 지원을 위해 광분합니다.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이라 하겠습니다.

 

자본금 1,000만 원이며 조선은 설립자본금의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해 원래는 대한제국, 일본의 양쪽 국적의 회사였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일본 국적의 회사가 되었으며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한 주요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토지와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식민지 개척 및 활동을 돕는 것 곧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동양척식회사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와 부산 두 곳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은 대한민국의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국문화원, 미국영사관으로 쓰이다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1996년 미국연방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2층의 영사관도 철수하였으나 미국은 영사관과 문화원을 폐쇄한 후 이 건물을 비워둔채 3년동안 방치하면서도 반환하지 않고, 부산시와 시민단체의 거듭된 반환요청에도 묵묵부답이였다가 1999년에서야 못이기는 척 마치 선심이나 쓰듯이 70년만에 대한민국에 완전히 반환합니다.

 

대한민국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 나는 듯했지만 청산되지 못한 친일잔재에 의한 과거에 이어진 현재 그리고 그로인해, 또는 미국의 전략에 의해 새로운 미국의 식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지...

계룡도령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현실앞에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해방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하에 국내 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켰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위의 글은 계룡도령이 쓴 것이 아니라 1982년 고신대학교 등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국문화원을 방화한 사건으로 그 와중에 한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었는데 그 사건 당시의 성명서 내용입니다.

 

30년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이 시기에도 어울릴 만한 내용 같지는 않으신지요?

 

80년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사건은 지금은 많은 이들로 부터 잊혀졌지만 1982년 3월 18일, 대학생 몇 명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인근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수백 장의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면서 시작되었고, 사건 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주모자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하였으며 이로인해 경찰에 체포된 인원만 11명에 달하고, 다음날에는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 등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킨 김현장을 방화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하는 한편,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를 무시 무시하며 무소불위의 능력을 지닌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 은닉 혐의로 체포하였습니다.

 

재판에서 문부식, 김현장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김은숙 등 여대생은 무기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뒤 감형되어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전두환살인마폭압정권하 였고, 반미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온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1980년대의 광주·대구 등 잇따른 문화원방화사건과 1985년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 소속 대학생들에 의한 서울 정동 미국문화원농성사건 등이 일어남으로써 반미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를 간첩 등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조작하였습니다.

 

아무 연관이 없는 한사람이 도서관에서 사망하는 등 방화라는 테러리스트적 투쟁 방식으로 인해 크게 국민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부산역 화재와 영도다리  

1953년 11월 27일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던 부산역은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화재의 이유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피운 풍로 때문이라고 합니다.

3명의 사망자와 47명의 부상자를 만든 이 화재로 지금의 부산역 자리로 역사가 옮겨져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계룡도령의 기억속에는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사진 어딘가에는 있었을 계룡도령의 기억속에도 선연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러 갔던 1966년 8월 31일 영도다리의 마지막 드는 모습은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3월에 착공하여 3년여 만인 1934년 11월 도개교(跳開橋)로 개통된 부산의 영도다리는 폭 18.3m 총길이 214,6m로 들어 올려지는 다리 길이는 31.3m이었습니다.

 

하루에 7차례씩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1,000t급의 배가 다리 사이를 통과 하도록 한 다리로 당시 부산을 방문하는 외지인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습니다.

 

영도다리의 명성은 들어올려지지 않는 동안에도 지워지지 않아 계룡도령도 수차례 친지들을 안내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그 깊은 수심에도 불구하고 발가벗고 해수욕을 즐겼는데...

지금은 볼 수없는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명성[?] 때문일까요?

여러가지 이유로 투신 자살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한 때는 다리 곳곳에 '잠깐만'이라는 팻말이 세워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거도 소용없자 궁여지책으로 경비경찰관까지 고정배치 되기도 하는 등 했습니다.

 

그런데 도개교(跳開橋)가 들림을 멈추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이유는 늘어나는 차량으로 인한 교통문제 때문에 1960년 초부터는 하루에 두 번씩만 들어 올리다가, 1966년 9월 영도로 수도관이 연결되는 바람에 고정교(固定橋)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당시에는 수중으로 수도관을 보내는 방법이 없었나 봅니다.

^^

하지만 지금 이 영도다리가 다시금 도개교(跳開橋)로 변신을 꾀하는 것 같습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영도다리 복원 개보수작업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위에 있는 김진숙위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보니 현재 임시 교량을 만들어 두고 원래의 교량은 완전히 철수를 한 상태이며 동작을 위해 개.보수작업 중이라고 합니다.

 

6.25한국전쟁당시 오갈 곳없는 피난민들이 헤어진 가족들과의 만날 약속을 이곳에 정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초승달아래 하염없이 기다리고, 두고 온 고향산천을 그리며 향수를 달랬던 곳으로 유명한데 이렇듯 애환이 서린 이곳에 딱 맞아 떨어지는 노래비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바로 202년 작고한 현인의 노래인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박시춘 작곡 강사랑 작사인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드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 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음 받고서 살어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 다오 북진통일 그 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 보자

 

 

 

 

영도다리 난간이라는 단 한줄의 가사 덕분에 노래비까지 세워진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산의 역사가 드문 드문 재 구성되어 있는 '부산근대역사관'

계룡도령이야 고향이 부산이니 그런 기억들과 어우러져 재미난 곳이겠지 생각지 마시고 한번 들러 보세요.

입장료도 없는 무료관람입니다.


 

단지 하나, 실적이라는 것을 내세우려는 것인지 입장을 하면 반드시 방명록에 서명해 줄 것을 종용합니다.
^^

사실 부산 사람들이야 몇이나 이곳을 방문하겠습니까만...

시설이라는 것이 이용이 적으면 언제 또 어떻게 변하게될 지 모르는 것이니 현재와 같은 역활만이라도 할 수 있게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타지에서 가시는 분들은 개략적인 부산의 근 현대사 정도는 아시면 좋을 듯하지 않으신지요?


어제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라서 이겠지만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져 있는 전시실을 계룡도령 혼자 이용하기에는 너무 겸연쩍었습니다.

^^

 

 

 

 

 

 

 

 

[2011년 9월 28일 부산여행 중 일제식민지부터 현재에 이르는 부산의 역사를 되돌아 본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