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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논산문화탐방]기호유학과 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의 묘

 

 

[논산문화탐방]기호유학과 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의 묘

 

 

논산 블로그 기자단에 합류함으로 해서 그동안 논산에 대해 알거나 또는 잘 몰랐던 부분을 하나 하나 카테고리별로 정리하며 글을 올려 보려고 합니다.

 

그 중 두번째로 기호유학의 본산인 논산의 돈암서원에 이어 沙溪 金長生[사계 김장생]의 묘역을 둘러 보았습니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선생의 묘소는 그 일원이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 고정산 자락에 위치한 광산김씨 선영에 있습니다.

 

 

사계 김장생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은 논산 돈암서원에서 대전 방향으로 약1킬로미터 정도 진행을 하면 우측에 '김장생선생묘소'라는 표지판이 나타나고 이 표지판을 따라 약2.5킬로미터 정도를 직진을 하면 우측에 김장생선생 사당이 있는 종가가 나타나고 바로 그 뒷편에 묘역이 있습니다.

 

 

묘역 입구에는 김국광(金國光)의 종가 및 김장생 사당(祠堂)과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위치해 있는데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멋스럽게 생긴 굴뚝과 배꽃이 환하게 핀 주차장을 돌아 묘소로 향했습니다.

 

 

묘역으로 가기 전, 안내판이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있습니다.

 

묘역에는 김장생의 7대 조모 양천 허씨, 그 아들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공안공 겸광(謙光).공휘(公輝).장생(長生).선생(善生) 등의 묘소가 함께 있는데 김겸광과 김장생의 신도비는 무슨 이유에선지 묘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면 관계 상 신도비는 생략했습니다만 아래의 사진에서 묘역을 바라보며 오른쪽 얕은 고개 너머 평지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북쪽을 향한 지형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김장생선생묘역은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김장생의 사당인 염수재(念修齋)와 김씨 일가의 묘소, 사당, 비들이 모여 있고 묘소 앞에는 문.무인석, 상석.혼유석.망주석 등 석물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계선생 묘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동남쪽인 손방위(巽方位)에는 대둔산(大屯山), 북쪽인 임방위(壬方位)에는 계룡산(鷄龍山), 북서쪽인 건방위(乾方位)에는 칠갑산(七甲山)이 장엄하게 시립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선생의 묘소를 둘러싼 전체적인 형세(국세)는 청룡과 백호,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등의 모든 사(砂)들이 유정(有情)하게 감싸고 있어 명당의 좋은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장생의 묘역에는 의외로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는 광김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묘, 사계의 바로 오른편 능선에는 김선생(金善生), 그 아래는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그 아래는 김겸광(金謙光), 그 아래는 김공휘(金公輝) 등의 묘소가 있습니다.

 

묘의 좌향(坐向)은 미좌축향(未坐丑向)에 간인파(艮寅破)로서 이기론(理氣論) 풍수상으로 정묘향인데[사람에 따라서는 이 묘의 좌향을 곤좌간향(坤坐艮向)에 당문파로 보기도 함] 신평(申坪)의 '지리오결(地理五訣)'에는 이 향을 계귀간위발문장[癸歸艮位發文章: 계방수(癸方水)가 간방(艮方)으로 나가면 문장가가 난다]고 했다 하는데 이는 발부발귀하고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 자리라고 합니다.

 

사계 김장생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하는 집안이라고 합니다.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산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한다는데 3대명문이라고 하면 광김의 사계 김장생, 달성 서씨의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이들 가문을 명문으로 꼽는 것은 정승 판서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인데 특히 광김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더구나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 송씨(恩津宋氏)와 광김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유일하다고 하니 대단한 가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장생 가문이 이처럼 조선의 3대 명문을 이루기까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 허씨(陽川許氏)가 큰 역활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묘역의 오른쪽 야트막한 언덕에 지어 영원히 모시며 기린다는 뜻을 가진 양천 허씨부인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를 지어 놓고 지금까지도 잘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양천 허씨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한림원의 벼슬을 하던 사계의 7대조인 김문(金問)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가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철산을 임신한 청상과부가 되었고 친정 부모의 재가 강요를 피해 유복자인 아들 철산(鐵山)을 데리고 개성을 떠나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가 광김으로는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의 시가(媤家)까지 걸어서 내려 와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 철산을 사헌부 감찰로 키웠다고 합니다.

 

 

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 겸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고 철산의 아들 중 국광의 맏아들의 이름이 극뉴(克杻)인데 극뉴는 종윤(宗胤)을, 종윤은 호(鎬)를, 호는 계휘(繼輝)를 낳았는데 계휘의 아들이 바로 사계 김장생입니다.

  

 

광김이 명문을 이룬 것은 양천 허씨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극진히 모시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연산의 시댁으로 오는 동안 산길을 걸으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고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래의 사진은 영모재에서 바라 본 김장생선생묘역의 모습입니다.

물론 묘역에서도 영모재가 바라 보입니다.

 

 

그러면 서인의 영수요 기호학파의 태두인 김장생은 어떤 인물일까요? 

 

김장생(金長生)은 1548년 7월 8일 한성에서 태어난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며 서인의 영수격으로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광산 김문으로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상례비요, 가례집람, 근사록석의를 남겼습니다. 

 

사계는 처음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선조 11년(1578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조 때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여 예학파 거두로 자리하였으며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내었으며 1631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사계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고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인간적인 가치나 명예는 던져 버리고 위치와 돈에만 집착하고 매달려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인문학이 그 자리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계가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예를 중시한 것은 엄격한 질서와 정교한 형식을 중시하여 연구하는 학문인 예학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모든 관계는 예[禮]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가족간의 관계조차도 무너져 버린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인 예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란 서로 간의 관계가 이어져 형성되는 관계인데 그 관계에 신뢰와 존중이 자리한다면 현재의 사회적 병폐는 모두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 것을 온양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줄 알면 능히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하였습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있어서 온고(溫故)의 목적은 지신(知新)에 있는 것이므로 지금부터라도 인간의 가치를 찾는 인문학이 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논산이라는 곳은 기호유학의 중심이며 인간의 근본을 깨우는 예학의 중심이니 그 긍지를 가지고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는 네 가지 성품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고 상호 신뢰의 신(信)을 더하여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3년 4월 19일 사계 김장생의 묘소를 이야기하며 그의 예학을 존중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