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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기호유학의 본산 논산 돈암서원[논산문화탐방]

 

 

 

기호유학의 본산 논산 돈암서원[논산문화탐방]

 

 

논산 블로그 기자단에 합류함으로 해서 그동안 논산에 대해 알거나 또는 잘 몰랐던 부분을 하나 하나 카테고리별로 정리하며 글을 올려 보려고 합니다.

 

그 중 처음으로 기호유학의 본산인 논산의 돈암서원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돈암서원 홈페이지 바로가기

 

돈암서원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1년 9월 24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남역사박물관의 인문학 강좌 "우리 삶의 자존감을 말한다."의 첫째 마당인 ‘조선 선비와 진경산수화 이야기’란 주제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특강과 함께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과 소리명창 송도영, 젊은 연주단체 飛쳄버오케스트라의 음악회에 초대를 받으면서였으니 알게된 지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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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평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서원 중의 하나이며 논산평야를 배경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들판에 위치해 있는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 창건.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학파(禮學派) 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면적 5,590㎡에 세워졌으며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선조~인조 때 문신이었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인조 11년(1633)에 창건되고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서원으로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려준 서원으로 사계선생을 중심으로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등 네분을 위패모시고 있으며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인 연산면 임리 74로 이건하였는데, 이는 원래 서원이 있던 자리의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와도 막을 수 없이 피해를 당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 좌측으로 담장을 따라 돌아 들면 넓게 확 열려있는 입구가 나타납니다.

 

 

담장을 열러 만들어 둔 입구를 들어서면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산앙루입니다.

 

 

산앙루는 최근에 세워진 건축물로 그 역사성을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돈암서원 건물 배치나 높이 등을 고려해 볼 때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건축물이라 하겠습니다.

 

현재의 서원은 동쪽을 향해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으며 서원 경내의 건물과 시설물로는 사당인 사우(祠宇) 숭례사(崇禮祠), 양성당, 동재와 서재, 응도당(凝道堂), 장판각(藏板閣), 정회당(靜會堂), 산앙루(山仰樓),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과 송덕비가 있습니

 

 

그런데 재미난 것이 산앙루에서 입덕문으로 가다 보면 두개의 비석이 특이하게도 어슷한 방향으로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듯하게 담이나 건축물과 평행 또는 직각으로 세워지는 것이 보통인 비석이 이렇게 틀어진 듯 세워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힌트 예전의 돈암서원의 모습을 찾아 보면 되는데...

정답을 찾아 보세요.

^^

 

사계 김장생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사림의 시대에 걸맞게 조선 예학(禮學)을 정비한 예학의 대가입니다. 

 

김장생은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 1526∼1581)가 세상을 떠나자,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가례대로 하였는데, 이듬해에 김장생은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일반인이 쓰기에 편하도록 정리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하였으며, 52세(1599년)에는 관혼상제의 예를 고찰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는데 김장생이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보고, 그것을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입덕문을 들어 서면 바로 마주보고 위치한 강당인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전후에 퇴를 둔 대청이며, 좌우에는 온돌방 각 1칸씩을 두었으며 강당 앞 마당에 돈암서원 원정비를 사이에 두고 동재(정의재-精義齋)와 서재(거경재-居敬齋)가 서 있습니다.

 

 

돈암서원 내 강당 건물인 양성당(養性堂) 앞에 사각의 높은 비좌(碑座: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가첨석(지붕돌)을 올려 송시열(宋時烈)이 비문(碑文)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김만기(金萬基)가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써 1699년(숙종 25에 세운 돈암서원 원정비가 있습니다.

 

비문에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위패를 모신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 김장생의 행적 등에 관해 기록해 놓았고 1880년(고종 17) 서원을 옮겨짓기 이전에는 지금의 건물 배치와는 다르게 사우(祠宇) 앞에 강당인 응도당(凝道堂)이 있었고, 그 좌우에 서재(정의재-精義齋)와 동재(거경재-居敬齋)를 각각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위치와는 달리 강당 앞 오른쪽인 동남쪽에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으며 1880년(고종 17) 서원을 이전할 때 옛터에 남아 있었는데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하는 돈암서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응도당(凝道堂)이 자리하고 있는데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10일 보물 제1569호로 변경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사원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크고, 옛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라서 지은 건물인데 여러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황산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며 돈암서원 비문에 의하면 방, 대청과 툇마루, 행랑을 갖춘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건물인 응도당이 있었고, 그 왼쪽에 거경재(擧敬齋), 오른쪽에 정의재(精義齋)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원의 이름이 된 '돈암'은 서원이 처음 창건되었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던 바위의 모습이 돼지를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서원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는데 계룡도령이 아직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응도당 앞에는 그와 같은 모양의 바위를 만들어 세워 두었으니 본 것이나 진배없을 듯합니다.
^^

 

그리고 응도당의 기둥에는 소금기가 짙게 배인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 소금은 언제적 소금일까요?

한번 알아 보시렵니까?
^^

 

 

응도당은 성리학자들에게 중요시되는 예제(禮制) 중에서 묘침제(廟寢制)에 근거하여 영건된 점에서 돈암서원에 모셔진 김장생의 예학을 반영하는 건물로 주목을 받는데 묘침제는, 사묘 건물에서 제례를 행하는 묘(廟)는 봉향 대상이 되는 침(寢) 앞에 세우도록 규정하며 건축 형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서원의 강당은 묘(廟)에 해당한다고 하며 돈암서원은 양성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창건했던 강경(江景)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옛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1557년(명종 12) 낙향하여 연산 대둔산(大屯山) 고운사(孤雲寺) 경내에 정회당(靜會堂)이라는 서재를 설립해 후학 양성과 향촌 교화에 전념하였고, 1602년(선조 35) 연산으로 내려온 김장생은 자신에게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을 모아 강학하던 서재인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현재 원래의 그 정회당은 없어지고 정회당이라는 편액은 돈암서원 한쪽의 독립 건물[아래사진의 좌측 위 건물]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장판각[위 사진의 좌측 아래 건물]에는 김장생, 김집, 김계휘(金繼輝)의 문집과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 전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원 경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당인 숭례사(崇禮祠)는 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하지만 앞쪽의 담이 아름다운 꽃담입니다.

 

사당 내부에는 주벽인 서벽 중앙에 사계, 왼쪽인 북벽에는 안에서 밖으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오른쪽인 남벽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하며  네 사람은 모두 문묘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先正)서원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응도당 맞은 편에 위치한 경회당은 현재 문화해설사들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는데 우측에 수령이 아주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어 여름 한철 붉게 핀 배롱나무의 꽃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서원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제와 례를 올릴 때 이용하거나 관리사로 이용되었을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홍살문의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이곳 전사청의 풀입문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돈암서원이라는 서원의 역사와 역활, 가치 그리고 건축물에 대해 알아 보았으며 돈암서원은 예학을 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시면서부터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는데 지금의 모습이 올바른 돈암서원의 고증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지금 우리가 잃어 버린 인문학을 그 중 예학을 가까이 하고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다 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사계 김장생의 묘소를 둘러 보며 그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2013년 4월 15일 지난 9일 다녀 온 사계 김장생을 향배한 돈암서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