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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역사

역사는 제대로 아시고 독립운동을 하시는가요

 

 

 

 

 

"역사는 제대로 아시고 독립운동을 하시는가요?" 

 

장개석이 이시영 임시정부 전부통령에게 한 질문이인데 중경(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총통이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일행을 위로하며 연 초대 만찬에서 자기 고향(양자강남쪽 절강성)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1902-1999)박사가 문교부장관 재직시에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림어당(1895-1976) 선생을 만나 여담으로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림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東夷族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경(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하는데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고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 말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장개석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어서 임정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인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김구 주석이 듣고 배웠던 당시의 역사책에도 이런 기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화와 사대주의에 절어 지내던 조선시대의 잘못된 역사관에 기인 한 것으로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생각 보다는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삶을 받아 들인 결과인 듯합니다.

 

특히 중국에서 넘어 온 유교를 받아 들이면서 조선을 위한 유교가 아니라 유교를 위한 조선이 됨으로 해서 중국을 대국으로 칭하며 중국에 거스르는 역사나 문화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며 이제라도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바르게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백제는 242년 이후 고구려가 위, 연 등을 공격하며 요동경략에 나서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해(발해만)를 건너 중국의 남부 및 요서지방으로 진출한다.

246년 고이왕(古爾王) 13년 서한(西漢)의 낙랑(당시 낙랑군은 북경 부근의 서한의 낙랑, 평양의 최리의 낙랑국이 있다)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분서왕(汾西王) 7년(298) 낙랑군의 서현을 취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 및 분서왕 7년조) 이어 346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여현과 북경 사이를 정복, 요서(遼西), 진평(晋平) 두 직할군을 설치하여 660년 백제 멸망때까지 250여년간 통치하였음이 당시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요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를 취했다. 백제가 다스리던 지역을 진평군과 진평현으로 불렀다." 『송서』 「백제전」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이었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처음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

 

이외에도 백제의 요서경략 기록은 『남제서』, 『남사』 등 동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사서들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사에 대하여 일본 및 중국의 일부 학계에서는 관련 전거가 남조계 사서들에만 있고, 북조계 사서인 『수서』, 『북사』 등에는 없는 점과 우리 정사인 『삼국사기』 등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점을 들어 이를 회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이들은 이 당시 송, 제, 양, 진 등 남조계 왕조들이 중국내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백제의 관할지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의문은 다음의 다른 자료들을 함께 고찰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먼저 618~628년 당의 영고 등이 주(周)의 효문제~정제(557~581)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 「백제전」에는 당시 백제와 송, 제, 양, 진 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양자강을 사이에 두었다는 대목(自晋, 宋, 齊, 梁 居江左)이 나온다.

이 당시 백제의 강역이 양자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는 가운데 東北室新羅, 西渡海室越州, 南渡海室倭라 하여 서쪽 경계가 옛날 오(吳), 월(越)이 있던 양자강 유역(월주)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이 때(490) 흉노와 돌궐이 또 다시 수 십만명의 기병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파견한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에게 대패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이 당시 백제가 중원 땅에서 저 북쪽의 흉노 돌궐족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같은 책 권 58 <열전>39에 보면 백제 동성왕이 제나라에 대해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을 각기 왕 또는 제후로 임명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490~495년)간 중국내 백제 7군인 광양(光陽), 조선(朝鮮), 낙랑(樂浪), 성양(城陽)을 다스리는 장군을 태수(太守)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미송위사(未松偉私) 등 일본 학자와 이병도 등 국내 일부 학자들은 이때의 백제 7군이 광주, 나주, 신안, 고흥, 옥구 등 전라도 일대에 있었으며, 이 때 책봉된 왕 또는 제후, 태수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4~6세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어불성설의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당시 거대한 제국이나 패권국이 아니고서야 어찌 왕 또는 제후를 임명할 수 있으며, 직할지를 통치하는 태수를 둘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대륙진출과 일본지배 기록이 분명치 않은 점 때문에 소극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렇듯 백제는 통전과 북사, 수서에 기록된 이름 그대로 100개 부족이 연합하여 널리 바다를 다스리는 나라(百家濟海)였으며, 이를 꽃피운 동성왕 이후에는 중국 요서 지역과 양자강 유역, 일본의 대마도 구주 일대에 22명의 담로(憺魯: 백제의 행정구역 또는 봉건영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왕족들이 파견되어 통치했다함.'담을 두르다'→'다무르다'→'담로'→'다물'로 어휘가 변화하였다는 설도 있다)를 파견하여 250년 이상 동북아시아 남서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해상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