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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역사

역사바로잡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로 다시 보는 고구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느 분의 글입니다.
혹시 다시는 찾지 못할지도 몰라 담아왔습니다.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건립: 장수왕 (서기 414년 능의 동쪽에 건립한것이 라 전한다.)
*위치: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태왕촌 대비가. ‘집안은 압록강 중류 만포진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라’ 한다.
*높이: 6.93미터
*비의 4면에 비문이 기록되어 있고, 글자의 전체수는 1,775자

이상이 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이 비의 해석을 놓고 한, 중, 일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해왔다. (이 비 뿐 만이 아니지만)전문적인 설명이나 해석은 전문가나 학자들이 할 것이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얘기하려 한다.

 

모두가 고구려는 당연히 만주나 한반도북부에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혔다 하니 서쪽이나 북쪽만을 생각한다. ( 남쪽 포함해서 )
심지어는 우리 고대사가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 조차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었으면! 요하까지 갔느니, 만리장성 근처 난하 까지 갔느니, 북경까지 갔느니, 북경서쪽 멀리 태행산맥, 혹은 산서성까지 갔느니, 모두 서쪽만 보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광개토대왕은 서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동쪽, 남쪽으로 간 것이다!!!

 

우선 비의 모양을 보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높이가 6.93미터나 되는 자연석 그대로 윗부분은 잘 다듬지도 않고, 4면만 다듬어 글자를 새겨놓았다.
비는 아들 장수왕이 선왕의 업적을 기려 만든 것이다.
비의 내용에는 광개토대왕이 어디에서 누구와 전쟁을 했으며, 어디 땅을 점령했는지, 몇 개의 성을 취했는지, 그런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즉, 대단히 중요한 비란 얘기다.
그런데, 왜? 그렇게 중요한 비를 잘 다듬지도 않고 만들어 놨을까?
고구려가 쌓았다고 하는 성곽들의 돌을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돌을 잘 다뤘는지 알 수가 있는데, 성곽을 쌓은 돌들은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듯이 일정하다.

 

호태왕비가 성곽 돌맹이만 못하단 말인가?!
고구려가 정말로 만주에 있었다면 집안현은 왕도에서 멀지않은 곳이다.
지금 같으면 그 비를 멋지게 잘 다듬어서 광화문 앞 세종로거리에 지금 이순신장군 동상이나, 세종대왕동상 위치에 보란듯이 세워놨을 것이다.
그래야 정상 아닌가?그렇지 않으면 비를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고 관리를 파견하였어야 한다.
그게 자연스럽고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토록 중요한 비를,(능을) 큰 성읍근처도 아닌 외진 촌에다가 세워놨을까?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원문은 생략하고, 그 비와 능을 관리하기 위해서 인근의 촌민들을 택해서 관리를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왜? 관리들을 보내지,,,,,,.
한마디로 관청을 세우고 관리를 파견하기 수월치 않은 곳이었단 얘기다.
즉, 고구려영토나 왕도에서 그만큼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는 얘기다.
고구려 국내성이나 평양성 ( 지금의 평안남도 평양 )에서 길림성 집안현이 그토록 먼가? ( 고구려의 중심이 만주나 한반도 북쪽에 있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호태왕 비는 누군가에 의해서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고 암만 생각해도 지금의 위치는 아니라고, 잘못됐다고 느끼긴 하는 모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구려는 한 번도 집안현을 도성으로 쓴 일이 없다한다’ 정말로 광개토대왕이 서쪽, 북쪽, 남쪽으로 갔다면, 비는 당연히 서쪽 중국 땅 어딘가에, 북쪽 내몽골까지 갔다고 하니 내몽골 어딘가에, 신라를 구원하러 갔다고 하니 남쪽 어딘가에 (한반도의 남쪽이 아니다. 신라는 중국대륙에 있었다! 자세한 얘긴 나중에,,,) 있어야 한다.

 

비문에는 여러 전쟁에서 광개토대왕이 획득한 성들의 수와 이름이 나온다.
성들의 수가 64성(城)이다.
그 당시엔 한반도에 성이 64개가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城)이란 게 아무데나 막 있던 게 아니다, 성은 그렇게 작은 단위의 구역이 아니다.
그리고 성들의 이름을 보면 우리 눈엔 낯선, 우리가 알고 있는 성들의 이름과는 좀 별스러운 그런 성들이 나온다.
성 이름도 길고,,,,,.고모야라성, *이야라성, *******리성, ****핍기구성, *******쌍성, 돈발*****루매성, 암문지성. ********성, ******성, 등등. ( *표시는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다)
어떤가? 이런 이름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옛날 이름이라 해도 이상하다.마치 전혀 새로운, 낮 설은 곳에 갔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만주지도를 보면서, 혹은 길림성등의 고구려 유적이라고 알려진 곳, 장군총, 혹은 고구려의 성들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가서, 태극기 들고 가서 ‘아! 고구려, 아! 광개토대왕’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 만주만을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땅으로 여긴다. 발해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잘못 나가도 한참 잘못 나갔다.

 

만주나 한반도의 일부가 고구려영토의 일부분이었지, 고구려영토의 전체는 절대로 아니었다.

 

중국의 옛 기록을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가야등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어디랑 어디는 풍습은 비슷하다느니, 의복이며, 말(言語)이 어디랑은 같다느니, 어디랑은 다르다느니, 자세히 나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가까이 있었으니 그런 기록이 나오지, 먼 곳에 있었다면 그런 기록을 했을까?
정말로 고구려니, 백제니, 등등 우리 선조들의 나라가 만주나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만약 고구려, 백제, 신라등의 나라가 만주나 한반도, 지금의 경상도, 전라도에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기록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 그런 나라들이 있는 줄도 몰랐을 테니까.

 

옛날 사람들의 지리에 관한 지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중원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옛 부터 ‘동쪽으로 멀리가면 큰 바다가 나온다는데, 그 바다 위에 영주산이니, 방장산이니 그런 산들이 있고, 그 산들에 신선들이 살고 있고, 그 땅에는 불로초가 있다더라‘ 그 정도였지 세세한 지식은 없었다.

 

지금처럼 지도를 서점에서 사서보고,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고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리에 관한 지식이나 상식이 지금 사람들보다 훨씬 부족하고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진시황제가 불로초 구해다준다는 서복의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한 것이다.
황제가 그 정도니,,,,,,,.

 

청나라 후기에 그려진 어떤 지도에는 조선이 아예 섬으로 그려져 있다.
청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조선과 가까운 만주에 살던 사람들인데도 그 정도 지식밖에 없었는데, 하물며 오랜 옛날에야 소상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이(東夷)족!
우리 조상들을 중원에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우린 동이족의 후예다!
중원대륙 동쪽 한반도에 산다고 동이족이라 했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겠지, 그러나그런 게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반도에 우리 조상들이 살았다면, 그런 명칭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원대륙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이라 불려 졌던 것이다.
동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남송(南宋 ;서기 424∼478년, 고려때 송나라가 아니다)의 범 뭐라는 어떤 학자다.
그가 쓴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 동이에 관한 글을 쓰고, 동이 여러나라의 약사(略史)를 기록하였고, 그 후대에 많은 학자들이 동이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는데,,,,,,,,
그 말도 이상하다!
춘추시대(기원전 7-6세기) 당시에 공자가 ‘중원에는 없는 예(禮)가 구이엔 있으니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걸보면, 이미 남송 훨씬 이전부터 동이란 명칭을 쓴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동이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 기록은 문정창 교수의 저서 ‘고조선사 연구’―1993년 한뿌리社에 펴냄―들어있는 내용임)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 부여국, 읍루(挹婁), 고구려, 동(東)옥저, 북(北)옥저, 예(濊) (韓), 왜(倭).
●삼국지 동이전 :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 진한(辰韓), 변한(弁韓), 변진(弁辰) 왜인.
●진 서(晋 書) 四夷 : 부여, 마한(馬韓), 진한(辰韓), 숙신씨(肅愼氏), 왜인, 비리국 (椑離國)등 10국.
●송 서(宋 書) 이만(夷蠻) : 고구려국, 백제국, 왜국.
●남제서(南齊書) 동남이(東南夷) : 고려국(高麗國), 백제국, 가라국(加羅國), 왜국.
●양 서 (梁書) 제이(諸夷) :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위 서 (魏 書) 열전(列傳) : 고구려, 백제국, 물길국(勿吉國), 계단국(契丹國). ⟨말갈⟩ ⟨거란⟩
●주 서(周 書) 이역전(異域傳) : 고려, 백제.
●수 서(隋 書) 동이 : 고려, 백제, 신라, 말갈(靺鞨), 왜국.
●수 서(隋 書) 북적(北狄) : 계단(契丹).
●남 사(南 史) 동이 :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북 사(北 史) 열전 : 고구려, 백제, 신라, 물길국, 계단국(契丹國), 왜국.
●구당서(舊唐書) 동이 : 고려, 백제국, 신라국, 왜국,「일본국(日本國)」 * 일본과 왜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 북적(北狄) : 계단, 말갈, 발해말갈(渤海靺鞨). *발해를 세운 고구려인들을 아예 말갈로 불렀다.
●당 서(唐書) 동이열전 : 고려, 백제, 신라, 일본, 담라(儋羅).
●당 서(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 계단, 흑수말갈(黑水靺鞨), 발해.
●통 전(通典) 동이 : 조선,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 백제, 신라, 왜, 부여.
●통 전(通典) 북적(北狄) : 계단, ‘契丹本 東胡族’. (원문에 들어있는 내용이라 한다) ⟨거란은 원래 동호족이다⟩

 

생각지도 않은 국가명과 민족이름이 나와서 조금 이상하다 여길 것이다.
예를 들면, 「고려」라는 명칭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그 후세의 명칭이고, 옛 중원의 역사서들 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 많이 적고 있는데, 그건 발음상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발해를 발해말갈로 적고있다.
발해 사람들은 처음에 나라 이름을 「후 고구려」라 했다.
그런데, 굳이 발해말갈이라 적은걸 보면 고구려가 다시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아니, 그 막강했던 고구려가 다시 일어난다니! 거란, 신라와 연합해서 겨우겨우 없애버린 고구려가 다시 꿈틀꿈틀 살아나려고 하다니! 아마, 인정하기도 싫고, 끔찍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갈족으로 다 싸잡아 말갈족의 나라라고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왜」와「일본」을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테니 각설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무리하고 천하를 진시황제가 통일했다고 하나, 기록에는 그 이후에도 ‘산동성일대에 동이의 나라가 약 150 여개나 있었다’ 한다.
진시황제의 통일은 전국시대 7웅(雄)의 통일이다. ‘그들만의 통일’인 셈이다.

 

고구려가 한반도가 아닌 중원대륙에 있었다고 하려다보니, 말이 길어졌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정말로 어디에 있었을까?
고구려의 중심은 어디였을까?고구려의 수도 평양성(平壤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평양! 지금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북한의수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고조선의 수도, 고구려의 수도. 북한정권은 아예 거기다 단군릉도 만들고, 동명성왕릉도 만들고, 전쟁을 일으켜 동포 수백만 명을 희생시키고, 한반도를 갈라지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고대사 왜곡까지, 참 여∼러가지 한다.
지금의 평안남도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도 아니요, 고구려의 수도도 아니었다!
지금의 평양이 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三國史)―삼국사기(三國史記)가 아니다 원래의 명칭은 삼국사(三國史)다.
일본인인지, 누군지, 아예 책의 명칭부터 조작을 해 버린 것이다!
정말 ‘사기(詐欺)쳤다’!
김부식은 삼국사 잡지지리에서 ‘서경(西京)이 옛 평양성 같다, 패수(浿水)는 대동강인 것 같고’ 라고 했다.
그래서 느닷없이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되어버렸다!
다들 고구려가 만주나 한반도의 북부에 있었다고만 알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하지만 김부식은 지금의 평양을 말한 것이 아니다.
김부식은 자신이 살던 때 서경(西京)이라 불리우던 어떤 성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김부식이 때문에 평양성의 위치가 한반도로 되어버렸다고 난리다.

 

고려 때에는 3경(京)이 있었다.
수도 개경(지금의 개성이란다), 혹은 중경이라 불렸다.
그 다음이 남경(서울의 북쪽쯤 될까?), 경주를 동경, 지금의 평양을 서경이라 불렀다 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상하다!
황해도 개성에서 평양을 보면 북쪽이 되지, 서쪽이 되진 않는다.
그런데 서경이라니!또 개성에서 경주가 어째서 동쪽이 되는가? 한참 남쪽인데,,,,,, 상식밖의 이야기다.

 

평양(平壤)의 ‘평’ 자는 평평하다, 바르다, 곧다 라는 뜻이고, ‘양’ 자는 흙, 부드러운 흙, 땅 경작지란 뜻이다.
그러니까 평양이란 말은 평평하고 경작하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지금은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옛날의 사람들은 작물 농사하기 좋은 평지란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니 평양이란 곳이 꼭, 한 군데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오래된 중원땅 지도, 오래전 우리나라 학교에서 쓰던 사회, 역사부도 책에 보면, 다른 곳에 있는 「평양」이란 이름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982년도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 사회과부도(교학사 발행) 에 나와 있는 지도다. 아래쪽 에는 양양도 있고, 강릉도 있다.

 

그런가 하면 중원대륙 멀리 남쪽에도 평양이 있었다.
「삼국사」신라본기 에는 신라 18대 실성이사금 12년 8월에 ‘평양주(州)에 큰 다리를 새로 놓았다’ (新成平壤州大橋)란 기록이 있다.
실성이사금 12년이면 서기 414년이다.
고구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을 때다.
그것도 고구려 번성기 장수왕 시절이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가 고구려수도 평양에 다리를,,,,,,,. 아마 신라의 한 건설회사가 그 공사를 했나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평양이 아니라 평양주라 한 걸보면 신라 영토내에도 평양이라 부르던 곳―주란 넓은 지역에다 쓰는 이름이다― 이 있었다는 얘기다.

 

수서 열전 동이 고려 (隋書 列傳 東夷 高麗)⟨여기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
⟩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고구려는 도읍은 평양성이며, 또 장안성도 있었는데,,,,,,,,,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하고......, 고려 땅에는 ⟨국내성⟩이 있고 ⟨한성⟩이 나란히 있다,,,,,,,,, 도읍이 모여 있는듯하여 나라의 가운데라는 뜻이며 이곳에는 3개의 서울이 있는데,,,,,,,,,.'

 

국내성과 백제의 한성이 나란히 있다’?
백제의 한성을 학자들은 지금의 서울이라 하는데, 그래서 잠실 쪽에 있는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한성백제시절 수도라 하고 있으니, 고구려 국내성이면 북쪽에 있었을텐데,,,,,,, 거기에 한성이 나란히 있었다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북사北史 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며 역시 장안성이다.,,,,,,,, 굽이굽이를 돌아서 남쪽으로 패수성(浿水城)에이른다’ (패수에 패수성이 따로 있었다면 평양성은 뭔가? 성이 두 개 있었다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불렀단 얘기다.
평양성=장안성!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의 장안성을 차지하고 도성으로 쓰면서 마치 원래부터 자신들의 도성인양 조작한 것이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수나라, 한나라등 대대로 많은 왕조들이 장안성을 도성으로 썼던 것처럼,,,,,,,,,
사기(詐欺)다!
역사는 승리한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고구려가 사라진 뒤 마음껏, 입맛에 맞는대로 조작,왜곡해 버린 것이다.
잘 기억하시길!
고구려의 수도는 바로 섬서성 장안성(지금의 서안) 이었다!!!

 

그리고, 패수(浿水)! 고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강이다.
그래서 어디에 있었는지 논란도 많고, 오래전 중원의 ‘상흠’이 수경(水經)주에서-중원에 있는 모든 강, 하천등에 대해 쓴 책이다-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패수는 「낙랑군」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임명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 어 간다’
중원땅의 강들은 남쪽에 있는 강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한반도의 강들은 어떤가?
다들 아시다시피 두만강, 형산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지형상 한반도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때문이다.
대동강을 패수라 해왔다.
이 패수란 지명은 허깨비같은「한사군」이나, 평양성의 위치, 또 한의 낙랑군등을 추정할 수 있는 이름이라서 중요하고 그 만큼 논란도 많은 지명이다.

 

위의 수경의 기록에서 보듯, 패수있는 곳에 낙랑군이란 명칭도 나오고, 고구려가 낙랑군을 쳐서 멸망시키고 세력을 키웠다는둥, 그러니까 패수있는 곳에 낙랑군도 있고 고구려의 평양성도 있고 그렇단 얘기다.
패수를 대동강이라 했으니 대동강위치 까지. 대동강이 패수라고?
분명히 수경에 패수는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평양을 보자.
대동강은 서해로 들어가지 동쪽으로 흐르진 않는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대동강은 절대로 패수가, 수경에서 말하는 패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역사학자 이병도는 ‘수경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기록하는 이가 동(東)과 서(西)를 잘못 적었을 것이다’ 라고 했다 한다.
동, 서가 바뀌다니!
동쪽과 서쪽도 제대로 분별 못하는 놈이 쓴 기록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책을 쓴 상흠은 ‘이 책에서는 ’장강이북 장성이남(長江以北 長成以南)사이의 물‘에 대해서 적는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양자강과 만리장성사이의 물에 대해서만 기록 했다는 말이다.
다른 먼 나라니, 뭐니 하는 곳의 물에 대한 얘기가 아니란 애기다.
잘 알지도 못했을 테지만,,,,,,
뒤집어 얘기하면 패수란 강은 한반도가 아니라 양자강과 만리장성사이(지금의 만리장성이 아니다) 즉, 중원대륙 안에 있었단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패수고 낙랑군이고 평양이고 다 한반도가 아닌 저∼중원땅에 있었단 피할 수 없는 증거물인 것이다.

 

우리가 또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수, 당과 고구려간의 전쟁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작은 나라 고구려가 중원의 큰 나라, 수와 당을 물리쳤으니 장하다, 대단하다.
더구나 수 양제의 110만 대군을 물리쳤으니, 을지문덕장군이 살수대첩에서 어쩌고 저쩌고,,,,,‘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자.
중원은 한(漢)이 망하고 위,촉,오 삼국시대를 진(晉)이 마감한다.
그리고 곧 이어 5호16국 /위, 진 남북조 시대가 거의 3백년 가까이 지속된다.
중원주변의 다섯 오랑캐?- 흉노, 선비, 말갈, 강, 저 이런 민족들이 중원땅에 들어와서 진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16개 나라를 세웠다가, 없어졌다 하다가 나중엔 북쪽에는 북위, 남쪽에는 진이 남았단 얘기다.
수나라는 이 혼란기를 정리하고 통일을 했다? 는 것이다.
물론 ‘그들만의 통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주변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등은 둘째 치고, 강성한 민족, 국가들이 꽤나 있었다.

 

강족(현재의 티벳)이며, 저, 돌궐등, 통일이, 통일이 아니었다. 왜냐면 수양제가 고구려에 패한 뒤 수나라는 즉시 분열되고, 수나라 각지에서 난이 일어나 너도 왕, 나도 왕, 너도 황제, 나도 황제 그야말로 온 천지가 난리였다.
수양제 양광은 수나라 장수 우문술의 아들들에게 죽고, 수나라는 망한다.
고구려와 전쟁 한번 잘못했다가 나라세운지 35년 만에,,,,,
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 당고조 이 연인지, 이세민인지 우문술의 아들들을 죽이고 당(唐)을 세웠다.그리고는 이 연은 고구려와 계속해서 싸운다.
그 혼란한 시기를 제대로 정리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결국, 고구려를 이겨보지도못하고 죽으면서 아들 이세민에게 유언을 남긴다.
‘고구려를 쳐라!’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돌아온 이세민은 결국, 그때 얻은 병으로 죽게 된다. 그러면서 아들 당 고종 이 치에게 유언을 남긴다. ‘고구려를 치지마라’)고구려는 수 ,당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존재다.
고구려는 수 백년간 중원의 강자, 중원의 주인이었고, 수와 당은 이제 막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세력이었다.
그런데 왜? 수 와 당은 자기들 주변도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하고서는 그렇게 고구려와 전쟁을 했을까?
수양제의 아버지인 수 문제 양견 때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들끼리는 싸울 일이 별로 없다.
전쟁하러가는 길도 당연히 멀 테고, 군대를 먼 곳에 보냈는데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면 어찌할 텐가?
군대도 지금 같진 않았을 것이고, 가까이 있으니까 싸우는거다.
이 땅이 원래 우리 땅이다, 니네 땅이다,등등 여러이유로. 만일 수와 당이 장안성에 있고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 만주에 있다 하면 도대체가 싸울 일이 없다.
거리가 얼마인데,,,,,,
수, 당은 지금의 중국처럼 중원대륙 전체를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했다.
물론 지도에는 진(秦)이건, 한(漢)이건, 수건, 당이건, 요나라, 금나라에게 힘 한번 못쓰던 송(宋)이건 간에 지금의 중국처럼 만주, 티벳, 서쪽의 신장성, 남서쪽 운남성등지나 동남쪽 끄트머리까지 대대로 전부 장악한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왜곡이다. 지금 중국인들의 희망사항 일뿐!

 

자! 다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상황으로 돌아와서. 수양제 양광은 무려 11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일까?
수나라가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큰 나라였을까?
그 정도 능력이 됐을까? 그것부터 의문이다.
원래 중국인들은 허풍이 세다.
희망사항이겠지, 어쨌든, 그 110만 군대를 쏟아 붓고도 고구려의 성하나 점령하지 못한다.
그러자, 양광은 우중문, 우문술 두 장수에게 병력30만을 주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라 명한다.

 

자! 우선 첫 번째로, 웃기는 게 수나라군의 공격로(路)다.
수나라가 제대로 중원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면, 그렇게 먼 길을 육로로 오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육로로 가느니 산동반도에서 배타고 건너오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시간 도 오래 걸리는 방법을 썼을까?
이해가 가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우중문, 우문술은 30만을 이끌고 평양으로 직행, 아니 고구려군의 수비벽을 우회해서 평양성으로 간다.
그런데, 그 길이 대단히 험한 길 이었나보다. 도중에 쓰러지는 자들이 많고, 도망병이 숱하게 나온다.
우리가 배운 대로라면 고구려군의 방어선은 요동반도북쪽의 소흥안령 산맥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들이다.
우중문의 군대는 어디로 우회했을까?

 

우중문은 평양을 공격하긴 했다. 텅 빈 성을,,,,,, 이미 성안의 사람들은 다 피해버린 뒤니까.
고구려군은 자기들 뒤에서 적군 30만이 돌아다니는데 뭘 하고 있었을까? 병력이 부족해서?
그리고 소흥안령 산맥에서 평양 (지금의)사이가 그토록 험한 길인가? 사람이 죽을 만큼?
도대체가 우중문의 군대가 어떻게 고구려군의 방어선 뒤쪽으로 갈수가 있다는 것인지,,,,,,배로? 전쟁 초기에 이미 수나라의 수군(水軍)은 고구려 수군에게 궤멸된 상태였다.
그러면, 우중문의 군대는 공수부대? 정말 이해 안 된다.

 

우리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약간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 있다.
흑치상지, 연개소문,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이다.
흑치상지 장군은 흑치국 출신이다, 어디 출신이다, 어디 출신이다,흑치국이 어디에 있다, 말도 많고, 연개소문은 원래 이름이 개금이다.
그러면 을지문덕 장군은?
우리나라에는 현재 ‘을지’ 란 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몽골에는 지금도 을지라는 성이 많다.
을지문덕은 몽골 출신인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에 지금의 내몽골지역이나 몽골의 일부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한 것인지, 그런 것 같다.
광개토대왕도 내몽골까지 갔다 하지 않는가?

 

그리고, 살수(학자들은 청천강이라 한다). 이 이름은 고구려역사에 딱 한번 나온다. 왜 그럴까?
만약에 살수란 강이 소흥안령 산맥을 지나서 평양 가는 길목에 있었다면, 살수는 몇 번은 더 나와야 한다.
최소한 한번이라도, 왜냐면 마지막 전투-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이나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야 했을 테니까.
그런데, 을지라는 몽골의 성을 가진 장수가 나오고, 딱 한번 살수라는 강 이름이 나오고, 우중문의 군대는 생소하고 험한 길을 갔다.
그 지역이 어디일까?
고구려의 수도를 장안성-지금의 서안에 맞춰놓고 보면, 우중문의 군대는 고비사막을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나라는 중국의 전체를 통일한 통일왕조도 아니요, 중원에 있는 고구려의 서쪽에 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 강역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고. 양광은 우중문이 패하고 돌아오자-30만군 중에 2,700명만이 살아남았다-철수를 해 버린다. 왜? 110만-30만, 아직도 80여만의군대가 남아있는데 왜 철수를 했을까?
0만이 적은 병력도 아닌데, 그렇게 멀리까지 갔는데,,,,,, 그러니까 110만이 허풍이란 얘기다.
중국인들의 허풍, 희망사항 일뿐!

 

그 후, 당태종 이세민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 때가 서기 645년. 그런데, 그 몇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티벳, 그때엔 ‘토번’이라 불렸다.
지금의 티벳은 중국에게 강제로 합병된 나라지만, 수, 당시절에 아니 그보다도 오래전 5호16국 당시에는 강한 국가였다.
중원에 들어와 왕조까지 세웠을 정도니까,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한 뒤에도 토번은 막강한 힘을 유지해왔다.
당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 고구려출신 고선지 장군을 등용시켜 겨우겨우 토번을 막아낸다.
한번은 설인귀가 10만 군대를 이끌고 토번에 쳐들어갔다가 토번군한테 10만군이 몰살을 당했다.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측천무후가 설인귀를 삭탈관직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 토번에 당시 송첸캄포왕이 있었는데, 당나라로 쳐 들어가서 당나라 도성은 함락 되고, 이세민은 송첸캄포 왕에게 항복을 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송첸캄포왕의 며느리로 시집보내고. 그런 이세민이가 무슨 힘이 남아있어 그 먼 고구려까지 원정을 갔단 말인가?
군대의 숫자도 어떤 책엔 ‘10만이다, 다른 기록엔 30만이다, 50만이다, 70만이다’ 아주 제 각각이다.
10만이 됐건, 50만이 됐건, 70만이 됐건, 그 정도 병력이 있었다면, 나 같으면 멀리-천리, 만리 떨어져있는 고구려를(한반도에 있었다면) 칠게 아니라 송첸캄포를 치러가겠다.
그게 당연하지, 그런 치욕을 당하고서는 병력을 모아서 난데없이 고구려를 친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세민이도 동 과 서를 구별 못했나 보다.
기록에는 송첸캄포왕이 쳐들어오자 ‘이세민이가 송첸캄포왕을 크게 꾸짖자 송첸캄포왕이 사죄하고 돌아갔다‘고 적어놓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가 한번 꾸짖었더니 그냥 돌아갔다?
얘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말했다.
『이세민이가 송첸캄포 왕에게 칼로는 지고, 붓으론 이겼다』고. 이세민이는 그 당시 어딜 쳐들어가고, 뭐고 할 여력도 없고, 그럴 정신도 없고,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고구려와 전쟁을 했다고 했을까?
이세민이나 그 억지를 부린 자들은 송첸캄포왕에게 당한 치욕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기 위해 상황을 조작한 것인가?―어쩌면 고구려가 당으로 쳐 들어 갔는지도 모르고.

 

옛날부터 ‘중원의 역사를 기록할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한다.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감춘다’ 라 던지 ‘국내의 일은 소상하게, 국외의 일은 간단 하게‘ 등. 그래서 그런 억지기록을 만들어낸 것인지 모른다,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당을 ‘서쪽나라’라고 부르고 있다.
당은 중원에 있던 고구려가 보기엔 그 전의 수나라처럼 그냥 서쪽에 있는 나라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 당나라를 통일왕조니, 대당제국이니, 고구려가 없어진 다음에 막 부풀리고, 꾸미고 해서 거대한 국가로 날조한 것이다.
중국의 희망사항!

 

위에서 말 한 적이 있는 5호16국시대, 그 시대에는 ‘선비(鮮卑)족’의 세력이 강했다.
연(燕)나라도 세우고, 위나라도 세우고, ‘선비족에는 3종류가 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동부, 서부로 나누어서 불리기도하고, 척발선비, 우문선비, 모용선비 이렇게 불리기도 했다.
수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중원북쪽의 북위는 선비족이 세웠던 나라이다.
수나라도 원래 북주(北周)였다. 그리고, 수나라도 역시 선비족의 나라였다.
당나라도 마찬가지고, 위에서 말한 대로 ‘수 양제 양광과 당 태종 이세민은 사촌간’이란 말도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이세민이 어느 곳을 지나다 사당을 하나 발견하고는 그곳 사람에게 묻는다.‘이 사당이 누구의 사당인가?’ 사람들이 대답하길 ‘이 사당은 선비족 척발씨의 사당입니다‘ 그러자 이세민은 ’척발씨는 나의 선조이다‘ 하고는 제(祭)를 지내고 갔다는 것이다.
이세민 스스로가 자신이 선비족―척발씨(氏)임을 증명하고 있다.
선비족(鮮卑族)! 그저 중국 북변의 한 오랑캐 종족 정도로 알고 있지만, 기록에 전하길 ‘선비는 본래 동호(東胡)인데, 흉노(匈奴)에게 패한 뒤 선비산에 숨어 보전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호는 어떤 사람들일까?‘동호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사기(史記)로 유명한 ‘사마 천’이라한다.
사마천은 한 나라때 사람이다.
그는 고조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예(濊), 맥(貊),―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를 말한다.―사람들을 동호라 불렀다.
흉노를 호(胡)라하고, 동호나 호나, 호 동쪽에 호가 또 있으니 자연스럽게 동호라 부를 수밖에. 그리고, 예 와 맥, 아예 『예맥조선』이란 기록도 있다.
예 와 맥이 동호고, 그 동호의 후예가 선비족이라면 선비족은 고구려, 부여와 같은 종족이다.

 

중국의 역사를 땅의 역사라 한다.무슨 뜻이냐면,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 됐건 중원에 왕조를 세우면, 다 중국의 역사란 것이다.
선비족이 됐건, 흉노가 됐건, 몽골이 됐건, 만주족이 됐건 자기들 땅에 세워졌던 모든 왕조, 나라들의 역사를 자기들 역사라 하는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면 중원의 거의 모든 역사는 북방의 유목민족이라던가, 몽골, 만주족에게 점령당해 그들의 지배를 받은 피지배자의 역사일 뿐이니까!
선비족, 고구려, 요, 금, 원, 명, 청등. 중국인들은 ‘원(元)나라의 역사를 역시 자신들 중국의 역사’라 하고, 칭기스칸을 ‘위대한 중국인’이라 한다.
그러면 몽골인들이 발끈한다.
‘어째서 원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고, 칭기스칸이 중국인이냐’고. ‘원나라의 역사는 몽골 의 역사고, 칭기스칸은 위대한 몽골인‘ 이라고.

 

우리는 어떤가?
고조선―아니 그 이전부터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가야, 옥저, 동예, 맥 등 여러 나라를 우리의 선조라 하고, 신라와 발해, 다음으로 이어지는 고려, 조선,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제국멸망 후 정통성은 일본이 세운 총독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어디에 나라를 세웠건, 어디에 존재했건 간에 우리 선조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역사라 한다.
그런데, 중국은 그게 아니다.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면, 중국인들은 전(前)왕조 명나라의의 정통성이 청나라에 있다고 하는 게 된다.
다른 민족이 세운 요, 금, 원, 명, 등(선비족이 세웠던 연이니, 북위니, 수, 당 포함해서)을 자기들의 역사로 받아들이듯. 자신들이 피지배자였던 시대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아닌데,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은 역사인데, 전에 있던 왕조는 망하고. 한국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역사적인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의 우리 젊은 세대들은 물론 아니겠지만, 당당하고 그런 콤플렉스 따위는 어울리지도 않고, 그러나 오래 전엔 그랬다.
일제의 36년 강점기가 있었고, 중원 왕조들에게는 조공을 하고, 왕이나 세자를 정할 때도 일일이 (전부는 아니지만)책봉 이란 걸 받고, 참 자존심상하고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서양을 배우고, 그 잘난 힘을 우리가 아주 어려울 시기에 휘둘러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힘이 일본보다 더 강했을 때 일본처럼 힘을 썼다면 일본 벌∼써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옛날부터 종교 는 물론이요, 많은 문화, 문물을 전해주고(하다못해 농사법, 천자문, 붓 하나까지)했더니 기껏 한다는 게 쳐들어 와?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다니, 우리 선조들이 잘못 가르쳤나 보다.

 

몇 년전 TV에서 인터넷상에서 중국인 네티즌들이 한국을 혐오하고 비하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 중국 네티즌이 한국을 비하하면서 ‘우리한테 조공을 받치던 놈들이 어쩌고저쩌고,,,,,,‘열 받지들 마시길. 사신이란 게 원래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로도 가지만, 큰 나라에서도 작은 나라로 가기도 한다.
조선조 때도 명이니, 청이니, 일본이니 사신이 많이 왔다. 대만에서도 오고.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도 가지만, 미국 대통령도 한국도 오고, 일본도 가고, 동남아도 가고 아프리카도 가고, 중국도가고 그런 건데, 중국인들은 자기네한테 오는 과거의 모든 사신들을 모두 조공하러 온 것으로 만들어 논 것이다.
그럼, 조선에 왔던 명, 청의 사신들은 모두 조선의 왕에게 조공하러 온 것인가?
일본은 선진문물을 전해 주려고 간 조선의 ‘조선통신사’들을 모두 조공을 하러 온 것으로 왜곡해 버렸다.
그것도 일본이 와 달라 청을 해야만 보낸 통신사들인데,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그 쯤 되면 역사기록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GNP, GDP높고, 1인당 국민소득 높고, 외환보유고 많고, 인구 많고, 땅덩어리 넓다고 다 대국(大國)되고, 선진국 되는 게 아니다.
지금의 중국인들, 일본인들 그들의 머릿속에, 뼛속 깊이 박혀있는 역사적 콤플렉스! 그 것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게 만든다.
특히,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나간 게 오래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마치 원래부터, 고대부터 한국보다 앞선 나라였다고 왜곡, 조작해댄 것이다.
그 들의 희망사항 일뿐.

 

고려나 조선은 원, 청나라에게 항복은 했지만,―그것도 치욕이라면 치욕이지만―나라는 계속 유지를 했다.
하지만 중국은? 금(金)이고, 송(宋)이고, 명(明)이고 통째로 왕조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대조영처럼 고구려를 이어받는 나라를 세운 것도 아니고, 그러니 누가 더 콤플렉스를 가져야 정상일까?
두 말하면 입만 아프다.원래 옛날부터 중원(中原)이니, 중화(中華)니 하는 개념은 있어도 중국이니, 중국민족 이니 하는 개념은 없었다!
어느 민족이던 중원을 차지하면 중화가 되는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개념, 중국민족이란 개념은 청 왕조가 망하고 그 후, 1917년 손문이 중화민국을 세우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의 중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요, [중화(中華)]였던 것이다!!!!!!』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등의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또한 중원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못 알아도 한참이나 잘못 알고 살아왔다!
고려가 원나라를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이성계가 대륙의 고려를 망하게 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것인지는 확실히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 중, 한반도에 처음으로 왕조를 연 것은 이성계가 세운 ‘조선’ 이다!!!!!!』 반드시 잊지 마시길!

 

● 그 후의 이야기들●
서기 669년 고구려 멸망이후, 손문이 중화민국을 세운 1917년까지의 중원의 역사는 고구려 후예들의 역사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 대조영은 후 고구려를(처음엔 후 고구려라 했다.
그리고 후에 다시 대진국 이라 했다)세우고, 당과 신라는(신라는 대륙에 있었다) 분열되고, 대륙엔 고려와 송(宋)이 세워지고,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킨다.
그 뒤, 발해의 후손들이 아골타를 중심으로 금(金 : 쇠 금자, 성(性)으로 읽을 땐 김이다.― 아골타는 성이 김씨 였다. 경주 김씨) 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망시킨다.―조상들의 복수를 시∼원하게 한 셈이다.
금나라는 중원의 북쪽 대부분을 장악하고, 남송(南宋)을(송나라가 남쪽으로 쫓겨갔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다시 몽골이 일어나 금나라를 멸하고, 남송까지 쳐 없애고, 고려는 끈질긴 저항 끝에(몽골은 고려를 6회나 공격하고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결국은 항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원(元)나라 말기 홍건족의 난이 일어나 몽골은 북쪽으로 쫓겨나 북원(北元)이 되고, 대륙에는 명나라가 세워진다.
홍건족은 중국대륙의 남쪽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들 있다.
5방색 중에 붉은색은 남쪽을 의미한다, 뭐라 해가며, 하지만 홍건족의 본거지는 대륙 남쪽이 아니고, 압록강 바로 넘어 만주지역이다!
그들 역시 발해의 후손, 금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명나라말기 난이 일어나서 나라가 어려워졌을 때, 발해의 후손, 금의 후손들이 누루하치(누루하치의 성(性)도 김씨였다.아골타와 누루하치는 같은 선조를 갖고 있는 같은 집안 사람들이다)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 후금(後金)을 세우고 중원으로 쳐 들어가 명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다.
청은 중화민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중원에 존재했고.

 

어떤가?
고구려 이후 그 후예들의 역사!지금의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오래전 자신들의 지방정권, 혹은 소수민족의 역사라 엄청난 왜곡을 해대고 있다.우리가 보기엔 ‘고구려, 발해 분명 우리 선조들의 역사인데 저 작자들이 왜 난리냐?’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다고 지들이 어쩌겠어?’ 천하태평이다. 답답하다! ‘독도는 분명 우리 땅인데 일본 지들이 뭘 어쩌겠어?’ 하듯이.

 

지금의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들, 역사관련 서적들, 전문가, 학자들의 논문들까지 세밀히 살펴가며, 한국의 학생들은 고대사를 어떻게 배우는지, 전문가, 학자들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논리는 어떠하며, 일반인들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치밀히 살펴왔다.
그런데, 우리나라 각 급 학교의 교과서, 고대사관련 서적들, 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엔 하나같이 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려등 모든 나라들을 한반도에 몰아놓고 가르치고, 그렇게들 한국인들은 인식하고 있고. 그러니 지금 중국이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왜곡, 조작을 해대는 것이다.
우리가 그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됐다.중국이 고구려를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이유는,―우리들 머릿속엔 만주벌판 생각 밖에는 없지만 중국 입장에선 그게 아니다.
만주벌판 따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고구려를 한(韓)민족의 역사로 인정을 하게 되면, 그 후의 발해나 요, 금, 명, 청까지 우리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면 중국 수천 년의 역사가 날아가 버릴 테니까, 그래서, 중국은 허무맹랑한 왜곡, 조작을 해대는 것이다.
그 속내를 자세히 들 아시기 바란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한 사람을 오래 동안 속일 수는 있다, 여러 사람을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오래 동안 속일 수는 없다」


★평양이란 지명이 보이는 지도 (✱이 지도와 아래 지도는 모두 1982년 교학사에서 발행한 인문계고등학교 사회과부도에 실려 있는 지도들이다)

 

 

위 지도는 12세기(1115∼1127년)의 지도다. 그때 까지도 평양이란 이름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