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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북 제천 박달재에 새겨진 박달과 금봉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여기는 꼭 가보자 충북제천여행]

충북 제천 박달재에 새겨진 박달과 금봉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계룡도령이 그 언젠가 별 다른 생각없이 지나쳤던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

박달재를 다녀 왔습니다.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하고,

이 금봉이란 처자와 사랑을 하다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하는 곳입니다.

 

그 동안 여러차례 제천으로 치아 보철을 위해 다녔고, 다니고 있지만

단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인데

이번에는 직접 차를 가지고 가기도 했고,

치과 진료를 마치고 충주에서 6시에 약속이 있어

시간을 보낼 필요도 있고 해서 가는 길에 보아 둔 곳이라 잠시 들렀습니다.

 

제천시 봉양읍에서 충주로 가다 보면 우측에 박달재로 가는 길이 나타나고

이 길 입구에 커다란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의 일주문인지는 당췌 알수가 없더군요.

 

 

또 박달재는 등짐, 봇짐 장수들이 넘나들던 장삿길로도 큰 몫을 했던 곳이기도 한데 그래서인가요?

 

 

제천 박달재란 표지석 뒤에는 운수보국[運輸報國]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화물차량들이 동서를 잇는 역활을 하며 이 길을 다녔던 것을 이야기하는 듯 한데

보국이라는 일본식 표현의 글에 조금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했습니다.​

 

 

박달재는 38번국도가 제천시와 충주시를 연결하고 있으며,

1970년 도로확장 및 포장이 이루어진 박달재는,

박달재 터널은 박달재를 통과하는 차량의 교통 안전성과 소요 시간 단축을 위하여 건설되었는데

상행선은 1996년 12월에 하행선은 2000년 12월에 각각 준공되면서​

수많은 차량이 다니며 물류 운송의 대동맥의 역활을 하던

국도 38호선 도로의 이용가치를 상실되었으나,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유지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박달재를 거쳐갔고

얼마 전까지도 38번 국도가 이곳을 지났으며

이제는 재 아래로 길다란 터널이 뚫려,

박달재는 고개로서의 구실을 잃고

그저 추억 속의,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박달재와 관련하여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오는데...

 

조선 중엽. 경상도 선비 박달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

소백산맥을 넘고 제천에서 충주로 넘어가며 마침 날이 저물어

재 아래 마을에서 방을 얻어 하루 묵게 되었는데

그 집 딸 금봉과 눈이 맞아 며칠을 더 머물게 되고

그리하여 박달과 금봉의 정은 더욱 더 두터워졌고,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겠노라 굳게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났는데

하루, 이틀.... 금봉이는 목을 빼고 기다리지만

과거 날짜가 지난 지도 이미 오래되었건만

한번 간 박달은 돌아오기는커녕 소식도 없었으니

안타까운 금봉은 박달이 넘어간 재만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급기야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금봉의 장사가 끝나고 사흘이 지난 후,

과거에 낙방하여 금봉을 볼 면목이 없어서 차마 오지 못했던 박달이

한껏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을에 도착해서는

금봉이 죽어 장사까지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정신을 잃어

금봉의 이름만 부르며 고갯길을 헤매기 며칠,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다

꿈에 그리던 금봉이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고개 위에서 간신히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사라지고 박달의 몸은 허공을 가르며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그후 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슬픈 얘기가 얽힌 그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천과 충주 사이,

중원의 동과 서를 잇는 박달재에 얽힌

‘전설 따라 삼천리’에 소개된 이야기랍니다.

 

 

그리고 박달재를 박달산, 박달령, 박달현(朴達峴), 박달치(朴達峙)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유행가 가사 덕분에 더 유명해지고 ‘천등산 박달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박달재는 차령산맥 줄기인 구학산(971m)과 시랑산(691m) 사이

폭 내려앉은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504m)로

제천시 봉양면 원백리와 백운면 평동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노래가사에 나오는 천등산은 계곡을 흐르는 원서천을 사이에 두고

충주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러한 천등산의 경우 인근의 지등산, 인등산과 함께

천(天), 지(地), 인(人)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천시 국도변의 박달재휴게소 입구에는

박달과 금봉의 동상과

그 곁에 노래 가사를 적어 넣은 박달재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48년에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가 발표되어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는데

박달재의 유명세는 이 노래 덕분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금봉과 박달을 소재로 만들어진 조각공원이 있는데

어디의 지자체에든 있는 조각공원이라 식상하긴 하지만

박달재의 전설을 알고 접근해 스토리를 이해하며 본다면

그나마 봐줄만은 한 것 같습니다.

 

[조각 공원의 조성에 대한 이야기이지 조각작품의 작품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길...]

 

 

 

 

 

이 조각공원의 한켠에 물레방아도 돌고...

기념풍인지 조각품인지 뭔가를 판매하는 곳이 있던데 패쑤...

 

 

그리고 또 하나...

1217년(고종 4년) 7월 김취려(金就礪)가 거란병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거란병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운 전승지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로잡은 거란 병사들을 한곳에 모아 장사를 하며 살게 하였는데

지금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의 글안장터라는 지명이 거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이후 1258년에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충주지역의 별초군이 박달재에 복병을 두어 적을 막아내기도 했다니

천혜의 요새이기도 한 듯합니다.  

 

 

박달재 정상부근에는 김취려 장군을 기리는 곳인지

기념품을 파는 것인지 알 수없는 곳이 한 곳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ㅎㅎㅎ

 

 

금봉의 애타는 기다림일까요?

 

높이 솟은 솟대 너머로 10월 7일의 하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 박달재 주위에는

한벽루(寒碧樓), 덕주사마애불상(德周寺磨崖佛像)이 있고,

그밖에 지방문화재인 금남루(錦南樓), 팔영루(八詠樓), 자양영당(紫陽影堂)과

청풍향교(淸風鄕校) 등이 있고, 충청도지방에 대한 별칭인 ‘호서(湖西)’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명한 의림지(義林池)가 있습니다.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경은사가 자리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산에는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 육송 등의 상록수가 울창하며,

도로가 구비돌아 9곡(曲)의 유서 깊은 박달재는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38번국도가 제천시와 충주시를 연결하고 있어 물동량이나 차량의 통행이 빈번해

1970년 도로확장 및 포장이 이루어졌으나

아래에 새로이 뚫린 터널로 인해 박달재 도로의 이용가치를 상실하게되었지만

현재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유지,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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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7일 다녀 온 울고넘는 박달재를 소개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