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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청유교문화원이 들어서야 할 기호유학의 중심 종학당

 

 

충청유교문화원이 들어서야 할 기호유학의 중심 종학당

 

 

 

여러분 종학당을 아십니까?

 

종학당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평윤씨의 문중서당으로

글자 그대로 일가(宗)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學) 집(堂)입니다.

 

 

종학당을 들어서려면 뜬금없이 만나게되는 홍살문...

사당도 아니고...

 

뭐 큰 뜻에 비하면 애교로 봐 줄 수도 있겠지만 좀 아닌 듯 합니다.

ㅠ.ㅠ

아무튼 지금 충청남도 논산시는 두 집안이라고할까요?
두 지역이라고 할까요?

충청유교문화연구원 위치 선정문제로 시끌벅적합니다.​

굿모닝 논산 기사 참고

http://www.gninews.com/news/view.php?idx=17370

 

기사 내용 중

"조선성리학을 예학으로 재정립 했다는 역사적 평가와 함께

기호학의 종장으로 존숭받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대를 잇는 문도들은" 이라고 쓰며

마치 충청유교나 기호유학이 광산 김문의 전유물인양 소개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봅니다.

사계 김장생의 경우 유학의 한 지류인 예학을 정리한 분은 맞지만

율곡 이이를 이은 기호유학의 종장은 아니죠.​

그리고 기호유학의 중심이던 소론의 영수 백의정승 명재 윤증선생은 그럼 뭐죠?​

기사란 것이 편파적이면 않되죠.​

   ​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안을 내 진행시켜 예산까지 따 온 노성면의 파평윤문과

지난 지방선거에서 갑자기 발목을 잡으며

진행조차 못하게 막고있는 연산면의 광산김문

그래서 현재 받아 둔 예산도 집행을 못해 감액이 되는 등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과 지자체로 넘거가고 있는데

사실 지자체에서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것인지

뚜렷한 의사표명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것 같기도 합니다.

지자체장은 손을 놓고

입지선정위원회가 등 떠밀려 출범되었으니

이번 달 안으로 ​결말은 날 것 같기도한데...

지나치게 지역적 갈등을 조장하고

두 문중의 희생을 강요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보여

앞으로 지역사회의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뭐 사실 계룡도령이야 지역과는 상관없는 입장이긴 하지만...

^^​

 

 

어쨌든 종학당을 소개하자면...

인조 후반기에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일종의 집안 학교로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곳에서 중인들까지 교육을 했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까지 포용하던 파평 윤씨 노종윤문 집안의

학문 창달에의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종학당의 창립 연대는

최근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경 童土 尹舜擧(1956-1688)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으며

16세기 중반 니산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노종윤문이

불과 2-3세대 만에 일약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유학사에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양대 산맥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호학파는 율곡(栗谷)학파가 그 중심 축을 이루고 있는데

율곡 이이(李珥) 이후 기호유학의 흐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으로부터 시작된 우계학파라 하겠습니다.

 

우계학파는 조광조의 문인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과

성수종(成守琮)으로부터 시작돼

성혼으로 이어지는데

성혼의 부친이 성수침이고 숙부가 성수종이랍니다.

 

성혼의 문인으로는

윤황, 황신, 이항복, 김상용, 이정구, 신흠, 이귀, 정엽, 조헌, 안방준, 김덕령 등이 있으며

특히 팔송 윤황(八松 尹煌)은 성혼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사위이자 제자로서 우계학을 계승하는데

이후 우계학은 파평 윤문(坡平尹門)으로 계승돼

가학적인 전통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계학은 윤황으로부터 시작돼

나량좌로 학통이 이어지며

조선 후기 들어서 조선 정치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론파(小論派)라는 정파적 성격을 갖게 되며

당시 중심에는 조선 최고의 사림이라 불리는

명재 윤증(尹拯)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매 방학 때마다 파평윤씨 집안의 학생들을 불러

조상의 얼을 되살려 자신 스스로 긍지를 가지도록 예절교육을 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보인당이라는 곳이랍니다.

 

그리고 흔히 종학당하면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바로 정수루라 하겠습니다.

 

 

정수루는 정면 중앙에 현판 ‘淨水樓’가,

오른쪽과 왼쪽에는 ‘香遠益淸’‘吾家白鹿’이 각각 걸려 있으며

종학당과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서재 마루와 누각이 연결되어 있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지금 나름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정수루가

한 때 이 지역 청년들의 밤 놀이문화 공간이되어

아래 사진의 왼쪽 절반 정도가 불에 타 버렸었답니다.

 

 

실수로 불이 붙은 것인데

다행히 서둘러 진화를 해 그나마 절반이 남아있게되었다가

다시 보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데

그 과정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많은 것을 잃어 버렸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새로 만든 것이 눈에 뚜렸이 보이죠?

 

 

아래의 사진은 원래 정수루의 원래 대들보의 모습인데

뭔가를 칠했다가 벗겨낸 흔적이 남아있죠?

 

 

이곳 정수루의 대들보에 장원급제한 사람들 몇몇이 시를 적어 놓았는데

작업을 하던 인부가 낙서로 생각하고

멋을 부린답시고 어울리지 않는 단청을 그 위에 입혀 버렸었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단청을 벗겨내면서

그 한시들도 다 같이 지워져 버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답니다.

ㅠ.ㅠ

 

 

당시 문화재를 대하는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씁쓸한 이야기지요.

ㅠ.ㅠ

 

 

종학당이 초급/중급 수준이라면

백록당은 고등/대학 수준의 학문을 배우던 곳이지요.

서고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 심화 학습을 하였다는데...

 

이곳 정수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조상들의 묘소는 공부를 하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듯 합니다.

^^

 

 

파평윤씨 노종윤문의 사립학교인 종학당은

할아버지인 팔송 윤황선생은 문정[文正]과

아버지인 노서 윤선거선생은 문경[文敬]

그리고 본인 명재윤증선생은 문성[文成],

그렇게 내리 3대가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영광스러운 가문으로

충청유교문화를 빛낸 인물들입니다.

그 선조들이 학문을 숭상하고 예를 바로하기 위해

이곳에 종학당을 짓고 오랜세월 문중을 가르쳤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충청유교문화원이 종학당 아래 지어진다면

좋은 경관과 함께 주변의 문화유적들이 어우러져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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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9일 논산시의 이해할 수 없는 행정으로 꼬여버린 종학당을 이야기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