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풍경이야기

부안 능가산 개암사와 주류성에 얽힌 백제패망의 역사[변산반도 ]



지난 1월 17일 블로그 이웃과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내소사로 향했다.
길에는 며칠전 내린 눈들이 채 녹지않아 흰빛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초행길이라 많이도 버벅대며 가는 길 23번 국도에서 우연히 만난 능가산[변산]의 개암사로 향했다.
 
 
개암사는 봉은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한파로 꽁꽁 얼어버린 개암제를 지나면 새로 세운 거창한 일주문을 통해 만나게 된다.
화려한 문양으로 꾸며진 일주문은 주변풍광과는 어울리지 않아 좀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개암사의 모습에 기대를 가지게 하기도 했다.
 
 
눈으로 덮여 채 녹지않아 하얗기만한 길은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레 발길을 옮겨야 했다.

 
잠시 후 무슨일인지 입구에는 중장비가 한창 공사를 하고 있고,
개암사쪽에는 심은지 오래지 않은 차나무들이 초록으로 빛나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개암사 [開巖寺] 
전북 부안군 상서면(上西面) 감교리(甘橋里)에 있는 명찰로 변산 4대사찰의 하나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그 역사가 깊고, 백제 부흥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본거지이기도 하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때, 우(禹)장군과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개암사는 634년(백제 무왕 35)에 묘련(妙蓮) 왕사가 개창하였고 통일신라의 문무왕때인 676년에 백제의 유민을 선무하는 뜻으로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두 대사가 이곳에 들어와서 개암사를 재건하였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등 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의 사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1414년(태종 14)에 다시 사찰을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36년(인조 14)에 계호(戒浩)대사가 대웅보전을 중건하였고 1657년(효종 8)에 삼존불상을 봉안하였으며 1783년(정조 7)과 1913년에는 대웅보전을 중수하는 등 고풍스런 절인데 지금은 그 규모가 많이 축소돼, 대웅보전, 응진전, 요사채, 그리고 역시 요사로 쓰이는 월성대 정도만 있어 한적한 편이다.
  
 
 
잠시 발길을 더 옮기니 나타나는 개암사의 대웅보전과 우금[울금]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개암사 위로는 500여 m 떨어진 곳에 마치 창을 열어 놓은 듯한 모습의 울금바위[우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세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았다고 한다.


개암사에 들어서면 전면에 울금바위를 뒤로하고 선 고색창연한 대웅보전을 만나게 된다.


 
보물 제292호 개암사 대웅보전(開岩寺 大雄寶殿)  
 
대웅전[대웅보전]은 개암사(開岩寺)의 본전(本殿)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이다.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개암사 대웅보전은 이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 건물(建物)이다.
 
자연석 허튼 층 쌓기로 쌓은 석축 위에 낮은 외벌대 기단을 두고 민흘림 원주를 세웠으며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여 축부(軸部)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의 주상포(柱上包) 외에 어간에 기둥 사이에도 배열된 다포계(多包系) 형식인데 바깥에 드러난 첨차를 연꽃과 줄기모양으로 투각(透刻)하고 주두를 하엽(荷葉) 모양으로 깎은 점은 매우 독특하다.
 
지붕은 팔작 형식이며 전후면 모두 서까래 위에 부연(浮椽)이 달린 겹처마이다.
천장은 일반적인 소란반자이나 층급이 있는 형식으로 중앙부분은 높고 바깥쪽은 약간 낮다.
대들보에 걸친 충량(衝樑) 머리의 용두와 공포 제공의 끝에 장식된 용두와 봉황은 매우 정교하며 화려하다.
 
내부에는 전후면 평주(平柱)에 통간으로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대공을 올려 종보(宗樑)를 받쳤으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대들보 밑에 세운 고주(高柱)에 의지하여 후불벽(後佛壁)을 꾸몄고 그 앞에 수미단(須彌壇)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봉안하였다.
수미단 상부에는 복잡한 다포계 공포와 운룡(雲龍)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을 더하였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4분합, 좌우의 협간은 3분합의 꽃살문을 달았으며 측면의 전 협간에는 세살 출입문을 달았는데 근래에 다시 만든 것들이다.

내소사 대웅전(來蘇寺 大雄殿)이나 위봉사 보광명전(威鳳寺 普光明殿)과 마찬가지로 외관은 장중하고 비례는 안정되어 있지만, 수법과 내부공간은 화려한 장식에 치우쳤다.
여기서 백제계의 안정감과 다포 중기의 장중함과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을 동시에 추측할 수 있다.

건물 규모에 비해 우람한 기둥을 사용하고 있어 안정감(安定感)을 주며, 공포(공包)의 외부(外部) 조각(彫刻)이 힘있게 처리되어 조선(朝鮮) 초기(初期) 수법(手法)을 나타내며, 건물 내외부(內外部)의 용두(龍頭) 및 봉황(鳳凰) 등의 조각(彫刻)과 불단(佛壇)위의 화려(華麗)한 닫집수법(寶蓋手法)은 세련미(洗煉味)를 표출(表出)하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 천정 불상 윗부분에 청룡 백호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양식은 백제시대의 유물로서 많지 않은 백제시대의 기교라고 하여 유명하다.
또한 불상 윗 부분에 정교하고 우아한 조각장식으로 된 닫집을 짜 놓은 것이나, 각 살미의 뒷 몸이 용머리로 되어 충량보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조각해 놓은 것과 천정판 단청을 연꽃무늬로 그려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것은 백제식 건축양식으로 흔치 않은 훌륭한 작품으로 백제의 안정감과 조선(朝鮮) 중기(中期) 다포의 장중함, 조선후기의 장식적인 경향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개암사에는 응진전의 부처님과 16나한의 재밌는 표정 그리고 연화문으로 장식을 한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지장보살 의 형상을 한 청림리 석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보물 제1269호인 영산회쾌불탱도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단청이 거의 다 벗겨진 상태인지 원래 칠하지않은 것인지 고색이 창연하였는데
지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처마를 받치는 기둥이 세워져 있어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처마와 포는 비록 단청은 지워졌으나 그 빈틈없는 정교함은 비길수 없이 아름답다.
더우기 장중하고 힘찬 필체로 쓰여진 편액 또한 그 가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내부
닫집의 섬세함과 어우러지는 좌우의 용조각으로 가득한
천정의 그 섬세하고 화려한 모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지경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내의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대웅보전[大雄寶殿]안에는 1657년에 개금한 삼존불상이 있다.
구전으로는 고려시대 불상이라 전하는데,
꼿꼿한 자세와 근엄하고 차분한 인상 등은 조선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불상이 어깨가 웅크러지고 앞으로 숙인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고려시대까지 좌대만 있었는데 조선시대 들어서 수미단을 만들고
위에 다시 좌대를 올리고 불상을 모시다 보니 눈 높이에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조금 더 앞으로 숙인 듯한 모습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기도 하고,
다른 해석으로는 좌복위에 앉아서 경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이 조선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모습이기 때문에
불상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어깨가 웅크러진듯한 자세가 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미단을 만든 이유는 불공을 자주 올리게 됨으로서 공양물을 올릴 단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아름다움은 건물자체와 전각의 내부장식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전각의 내부와 연결해 주는 문의 문살은 일일이 깎아서 만든 화문살로
그 정교한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하지않을 수가 없었다.

 
대웅보전의 좌측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조 산신상이 있다.
 

대웅보전의 한단 아래 우측에는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용왕입상, 관세음보살, 남순동자 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관음전 맞은편[대웅보전의 하단 좌측]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고려시대 청림리 석불좌상인 지장보살상이 모셔져있다. 
 

관음전[觀音殿]의 하단 우측에는 조선숙종 3년(1677)에 조성한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을 모셔두고 있다.

 
그리고 또 정중당이 있으나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맑고 깨끗한 무리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될터인데...
부처님의 법은 이욕존(離慾尊)이니 부처님 법을 따르는 무리는 모두 정중일 수 밖에 없지않겠는가.
 

대웅보전의 처마끝 풍경과 어우러진 울금바위 주변에 백제의 마지막 항거의 흔적인 주류성이 있는데
 그 위치가 우연히 밝혀지게되었다.

1979년 12월 3일 새벽 개암사에 도둑이 들어 불상의 내장에 있는 물건을 훔쳐갔다.
다음날 마루바닥에는 도둑이 미처 챙기지 못한 다라니경과 결기라고 쓰여있는 종이가 남아 있었는데,
이 결기에 기록된 내용이 주류성의 위치를 살피는데 대단히 귀중한 고증사료가 되었다고 한다.
   

주류성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백제광복군이 저항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과 태자가 당에 투항하였으나 나당연합군에 대한 백제광복군의 저항은 660∼663년에 걸쳐 완강히 펼쳐진다. 
수도 부여가 함락된 직후에도 남잠성, 진현성, 임존성 등을 중심으로 한 백제군은 건재 해 있었는데 좌평정무는 병정을 모집하여 두시원악을 거점으로 나당군을 치고 사비남쪽 고개를 택하여 항거했으며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개선하면서 소탕전을 벌일때 백제군의 거점은 20여 성이나 됐다. 
이듬해 661년 1월 일본에 머물던 왕자 풍을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을 중심으로 구심점을 찾게되어 비교적 산발적이던 저항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백제왕의 이름으로 항전을 시작했다. 
광복군은 부여를 완전 포위하고 연합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으며 신라가 상당 규모의 원군을 보내 반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패퇴하였다.

백제 겸달풍의 군장으로 있던 흑치상지가 부여 함락 당시 패전병력 3만여를 재편성하여 300여 성을 수복하고 복신과 연결하여 661년 2월에는 백제의 서북부가 모두 백제왕군의 세력권내에 들게 되었다.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검교대방 주자사 유인궤가 3월에 도착한 후 백제군은 백강에서 맞아 싸웠으나 1만여의 전사자만 낸 채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도움으로 백제군은 내사지성 등 대전 방면의 모든 성을 점령하여 공주, 부여 방면으로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버렸다. 
그러나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본국에 원병을 청하여 662년 7월 당고종은 우위아장군 손인사를 웅진도행 군총관으로 삼아 7천의 군사를 보내 지원하게 했으며, 유인궤는 원병이 도착하기 전 신라군과 함께 대전방면으로 출동하여 유성을 비롯한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도한 9월에 나당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문무왕과 김유신 그리고 손인사, 유인운 등은 육로를, 유인궤, 부여융 등은 수로를 택해 공격을 해와 첫 결전은 백강에서 벌어졌다.
강 언덕에는 백제군이 앞바다에는 일본 수군 수백척이 포진하였으나 네 번의 싸움 끝에 백제/일본 연합군은 패하고 말았다.
주류성은 곧 함락되고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흑치상지 또한 당에 항복하였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는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대웅전이 있는 절이기도 하지만
불끈 솟은 울금바위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다
단아한 산사의 풍치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특히 시문에 능했던 기생 매창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는 개암사는,
산문 밖 일주문에서 절로 오르는 길이 아름다워 가을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변한의 왕궁터였다는 곳답게 풍수도 제법 좋아 보인다.
 
또 옛날 변한의 유민들이 우진암이라 불렀던 개암사 뒤의 울금바위도 볼 만하다.

울금바위는,
그 높이는 각 40m 30m정도의 크기인데 서로 연결되어 혹처럼 불거져 있어
바위의 우람한 위용은 호남평야 어느 곳에서나 얼른 눈에 들어오는 변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개암사 뒷편 산길을 따라 30여 분쯤 걸어 올라가면 닿게 되는 울금바위에는 모두 세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아래 조그만 웅덩이에는 물이 괴어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하여 오면서 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하는데,
그곳에 서면 산아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좋다.
이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한 울금산성(지방기념물 제20호)도 있는데,
백제의 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로 유명해 들러보면 좋을 만한 곳이다.

그리고 감교리의 개암사 입구 근처에는 김유신장군의 사당인 보령원이 우람하게 서 있는데,
백제 부흥운동을 한 이 지역 개암사의 입구에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장군의 사당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사당 뒤가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만든 개암저수지인데
푸르다 못해 암녹색으로 물결을 이룬다고 하나 겨울에다 가뭄까지 겹쳐 거의 바닥을 드러낸채 얼어 있으나,
이 골을 감도는 바람은 옛날이나 다름없이, 돌고 돈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라앉아 귓가에 옛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누군가 장난스레 만든 눈사람도...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도...
우리의 추억을 되살릴 뿐, 
이미 흘러버린 세월을 어쩌지는 못한다.
 

패망의 설움을 그대로 간직한 주류성과 그 백제의 유민을 위무하기위해 중창된 개암사의 역사는
그저 스치는 바람소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역사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변산 개암사라 하지않고 능가산[楞伽山] 개암사라고 한다. 
능가[릉가]라는 말은 도달하기 어렵다라는 뜻이니
진리의 본 모습에 도달하는 것이 어쩌면
거대한 바위를 열어 젖히는 것만치 힘든 일임을 나타내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