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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이야기[下]



내소사는 능가산을 낀 개활지에 지어진 절이라 그런지 다른 곳의 절과는 달리 건물의 배치가 넓직 넓직하게 펼처져 있어 시각이 자유롭다.

 

그런 내소사에도 여느 절이나 마찬가지로 대웅보전 뒤의 높은 곳에 삼성각[三聖閣/山神閣]이 있다.

일반적으로 절과 같이 지어져 역사의 궤를 같이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소사의 삼성각은 석축이나 건축에 사용된 목재가 현대적 가공기술을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것이 지은지 얼마 되지않는 모습이었다.

원래의 삼성각은 1941년 능파스님이 독성, 칠성 산신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원래는 조사당의 자리가 삼성각이었으나 내소사의 조사이신 해안선사와 혜산우암선사를 모시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삼성각을 새로이 지어 옮긴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내소사에는 다른 절에서도 가끔씩 보게되는 祖師堂[조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내소사는 근세에 들어 1932년 해안선사가 내소사에 자리를 잡고 절 앞에 계명학원을 설립하여 무취학 아동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혜산우암선사가 선풍을 이어 봉래선원을 신축하여 현재의 가람의 기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뜻을 기리고자 대웅보전 좌측에 祖師堂[조사당]을 두어 두분 선사의 진영을 모셔놓을 정도로 두 스님이 지니는 의미가 각별하다.

 

 

대웅보전의 우측에는 1911년 관해선사가 신축한 건물로 관심당(觀心堂)이라 불리던 벽안당[碧眼堂]이 있어 현재 회주실로 사용한다고 한다.

 

 

내소사 경내에는 강당[설선당]과 요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있다.

설선당(設禪堂)은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의 수학 정진 장소이며 인조 18년(1640)에 청영대사가 지은 것으로 앞면 6칸·옆면 3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오른쪽 1칸은 마루이고, 앞면에서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큰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요사(寮舍)는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들의 생활과 관련된 곳으로 설선당과 함께 인조 18년(1640)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 6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2층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넓이는 230㎡(69평) 규모이다.
현재 1층은 스님들의 방과 식당,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마루로 식료품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설선당에서 보면 1층인데 요사쪽으로 가면 또 어느샌가 2층이 되는 곳으로 봉래루와 함께 자연 지형을그대로 살려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설선당과 요사는 4면이 연결되어 중앙 내부에 마당과 우물이 둔 회(回)자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1986년 9월 8일 전북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앞 마당 왼쪽에는 무설당(無說堂)이 있고 오른쪽에는 설선당(說禪堂)이 있는데, 처마를 마주보고 서 있으면서도 대조적인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無說'과 '說禪'의 한자풀이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무설당은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설선당)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0년 우암 혜산스님이 그 터만이 남아 있던 곳에 현재의 무설당을 복원하여 현재는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채인 무설당 돌담위에는 아무렇게 쌓아올린 듯 하면서도 질서 정연해 보이는 돌탑들이 있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소망을 소근거리며 이야기 하는 듯 하다.

 

 

이제 돌아서 나오는 길...

봉황을 기다리는 봉래루에는 굼과 희망을 담은 소원지들이 붙어 있다.

2009년 기축년에 각자들의 비는 소망은 무었인지 들여다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관음증이 있다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다.

^^ 

 

 

소박하고 정결한 그들의 소망이 올 한해 반드시 이루어지길 나도 함께 빌어 보았다.

 

 

올해는 원하는데로 결혼 꼭 하시고~~~^^

 

 

꽃처럼 오색 찬란한 그 하나 하나의 소망에 빛으로 결과로 답되는 기축년...

소처럼 천천히 소망들 이루소서!!!

 




그들은 같이 혹은 달리 무슨 소망을 저렇게 정성스레 쓰는 것일까?

 

 

드라큘라의 이빨은 어디다 쓰려는지~~~ㅎㅎㅎ

 

 

남의 소망 훔쳐보기를 마치고 이젠 종루로 향했다.

 

 

내소사에는 보종각과 범종루 두 곳의 종루가 있다.

사천왕문과 봉래루 사이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데...

 

범종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당산목 오른쪽에 위치해있고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중건하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해 깨달음과 해탈을 염원하는 중생구제의 의미로 아침, 저녁 예불(禮佛)과 모든 불교행사 의식 등에서 이용되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이렇게 네가지 타악기는 각기 고유한 음색을 지니고 있으며 의미 또한 독특하다.

 

하늘을 나는 짐승, 물속에 사는 짐승, 땅을 걸어다니는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총칭하여 '불전사물'이라 부른다.

 


보종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당산목 왼쪽에 위치해있다. 

보물 277호인 내소사 고려동종을 보관하는 보종각이 있는데 종에 비해 종각이 지나치게 커 보인다. 
내소사 동종은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을 간직한 고려시대 대표적인 종으로 우리 나라 종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음통과 용머리 모습을 한 종고리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종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고려 고종 9년(1222년) 내변산의 청림사에서 주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기로 봐서 범종처럼 밖에 매달아 놓는 종이 아니라 법당내에 두고 예식에 사용하는 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대웅보전 안에는 이 종의 모사품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두고 예식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법당내에 놓여지는 종의 크기보다는 조금 더 크기가 크고 종의 외면에 조각된 문양이나 불상의 모습은 매우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종의 윗면에 새겨진 용두는 입체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청림사가 폐사되고 난 뒤 종이 없어져 찾지 못하다가 조선 철종 4년(1853) 우연히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울리지 않자 종을 울리는 스님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내소사로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소사에는 중요 유적마다 전설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외에도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영산회상' 이라는 행사에 사용하는 괘불 탱화가 있는데 1700년(숙종 26)에 가선대부 중추부 곽선흥의 시주로 조성봉안 된 영산회 괘불탱이다.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불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7존 형식의 괘불로서 세로995cm, 가로920cm로 대작이다.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ㆍ보현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에는 증청묘법다보여래ㆍ극락도사아미타여래ㆍ관음보살ㆍ대세지대보살의 4대 보살 등을 세마포에 그린 형태로 석가모니가 영산회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각 존상들은 둥근 얼굴에 원만한 체구를 지니며 뺨과 눈자위, 턱밑, 손과 발은 옅은 분홍색으로 처리해 밝아 보인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연한색을 넣어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숙종 26년(170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콧속의 털까지 묘사하는 선의 정밀함, 화려한 옷의 무늬와 채색으로 더욱 돋보이는 작품으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각 인물마다 명칭이 있어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 괘불을 걸어서 행사하는 것조차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현재는 대웅보전의 관음보살 아래 나무상자에 모셔져 있다.

사진을 담을 수는 없고... 자료를 빌어왔다.

 

 

영산회괘불탱화(靈山會掛佛幀畵)...

괘불은 법당이 좁아서 많은사람들을 수용하기 여러운 때에 야외에서 설법하기 위해 단을 펴는 것, 즉 야단법석을 행할 때 걸어 사용하는 부처님 걸개 그림을 말한다.

영산회괘불탱화에서 영산회는 바로 3백만명이 모였다고 하는 부처님의 영취산 설법 때를 의미하고,

괘불은 거는 부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보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부처님 모습을 담은 거는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보종루를 지나 사천왕문으로 가다 보면 연리지된 나무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고리처럼 생긴 이 연리지는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서 한쪽의 가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너른 벌을 지나듯 내소사를 둘러 보고 이제는 돌아 나갈 시기...

사천왕문을 나서면 석가의 세상과 속가의 세상...

 

 

눈으로 하얗게 덮인 벚나무길을 걸어 여행자는 속세의 짐들은 훌렁 벗어놓고 천천히 사하촌으로 향한다.

 

 

잠시 전나무 숲길을 걸어 도착한 곳 사하촌...

삶의 열정으로 가득한 상가 호객꾼들을 헤치고 점점 일상으로~~~

 

그렇게 부안 내소사 답사, 불,속을 넘나드는 짧은 여정의 끝이 났다.

 


끝으로 내소사를 주제로 한 시 한수 올리며 내소사의 소개를 마치려 한다.



來蘇寺

 

시인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없는 때

눈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꺾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들어 눈뭉치를 털어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앉은 장광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내소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