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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이야기[上]



 

능가산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대(大)소래사와 소(小)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은 모든 일이 다 소생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는 혜구두타스님의 원력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내소사는 여느 가람과 같이 절 손님을 상대하는 사하촌이 길 좌우로 손님을 끌기위해 각종 간판과 차림표를 내건 채 잘 정돈되어 있다.

 


시간별로 주차비를 받는 내소사 주차장에서 잠시 걸어 일주문 앞,

오른쪽 커다란 당산나무가 길을 열어 내소사로 들게 하는데 할머니 당산나무라고 한다.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하는 문화재 관람료 2,000원을 내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이 담긴 일주문에서 길은 왼쪽으로 약간 꺽여저 있어 몇 걸음만 움직이면 이내 조용한 전나무 숲길이라 속세와는 완전히 단절된 느낌을 주는데 어느덧 일주문은 사라지고 없다.

 

 

내소사는 일주문에서부터 사천왕문에 닿기까지 다른 곳과 달리 그리 길지 않은 평지같이 편안한길에 비스듬히 휘어지며 높이 솟은 전나무 숲길이 있어 이색적인 운치가 더 한다.

 

 


잠시 전나무숲길을 걷다보면 내소사내 암자 중 하나인 지장암 가는 길의 갈기가 있고

 


탐방로[등산로]인 관음봉 삼거리 가는 길과 직소폭포로 향하는 길의 갈기도 만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미래처럼 절을 숨겨둔 이 길은 전나무 향기 속에 세속을 털어내고 맑은 붓다의 세계로의 진입을 준비하는 길이다.

 

전나무 길을 지나면 좌측으로 부도탑군이 잘 정돈되어 있고 넓게 펼쳐진 벌사이로 벚나무 길이 나온다.

 

 

지금은 겨울이라 잎을 모두 떨구었지만 봄이되면 구름처럼 필 벚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않을 듯하다.

 

 

곧이어 나지막한 계단 몇개를 오르면 천왕문이라 써있는 사천왕문을 만나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에서는 제일 먼저 만나는 천왕문은 여느 곳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형태에 맞배지붕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좌우에는 천왕을 2구씩 안치하고 가운데에는 출입통로가 있으며 천왕상들의 툭 불거져나온 부릅뜬 눈, 치켜올려진 검은 눈썹, 크게 벌린 입과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 등 두려움을 주려는 얼굴과 갑옷에 큰 칼을 높이 들고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은 어쩌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천왕문을 지나면 내소사의 전경이 넓게 펼쳐진다.

내소사는 널찍한 터에 몇 개의 전각이 여유롭게 자리잡고 있어 바라보자면 시각이 시원해진다.

전체 가람 공간이 평야지대라서인지 평탄하게 이루어진 내소사는 어린아이는 물론 거동이 불편한 팔순 노인까지도 쉽게 몇 개의 계단만 오르면 어디든 닿을 수 있도록 편안하게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시각을 가로막지 않으려는 듯 돌담도 나지막하다.

더구나 경내에는 1000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과 엄청난 크기의 보리수나무 등이 있는데 그 고목의 숨결을 보여주듯 단청이 사라진 무채색의 목조건물들은 자연그대로의 느낌으로 포근하고 따사로운 기운으로 방문객들을 맞아준다.

 

넓고 편안한 경내를 들여다 보면 대웅보전과 봉래각을 일직선으로 이어주는 정면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다.

일주문입구에 있는 할머니 당산목과 쌍을 이루는 할아버지 당산목이란다. 

 

 

이 나무는 수령이 1000년가량 된 느티나무로 1982년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위로 자란부분은 이미 다 스러지고 없어 처음 와본 내소사이고 겨울이라 살아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근근이 새로운 가지들이 벋어 나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여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해마다 정월보름이면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올리고 마을 축제처럼 어울린다고 하는데 절 마당에 당산목을 모시고 제를 지내는 행사는 이곳 내소사에만 있다.

 

이것은 칠성각, 산신당을 절에 모신 것처럼 당산제 역시 민간신앙을 그 지방의 정서를 절에서 수용한 것이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 속에 불교의 생존 차원에서 개인적 제사도 지내주고 애초 접목된 민간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절 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봉래루는
대웅보전 바로 앞에 있으며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게되는 건물이다.

위쪽은 강당으로 사용되었을 듯 한 누각이 되고, 아래쪽은 대웅보전으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아래쪽은 사람 하나 통과할 높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를 높이기 전에는 키큰 사람이라면 머리가 닿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래루는 가능한 인공미를 억제한 듯 투박하다.

주춧돌 역시 주위에 있는 막돌을 가져다 가공하지 않고 쓴 것 같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자세히 보면 높낮이가 다른 초석에 맞춰 기둥 길이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주춧돌 표면에 맞춰 기둥 끝을 깎았기에 이가 꼭 맞는데 초석을 보면 중간부분에 옛 지표면과 맞닿은 자국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이러한 건축기법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온 듯 불국사 석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독특한 건축 기법으로 그랭이 기법이라고 한단다.

 

 

원래 봉래루의 높이는 현재보다 50cm 정도 더 낮았다고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받을 때 양반들이 하마하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높이기 전에는 봉래루의 마루면이 대웅보전 앞 마당면과 거의 일치했다고 하니 그 당시의 모습을 대략 짐작케 한다.

 

근래에 들어 봉래루 아래로 사람들이 편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일부러 1층 기둥을 높이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가람 전체의 수평적 공간감이 어색해지는 결과를 가져와 적지 않은 비난을 받고 있다.

 

 

내소사는 흔히 말하는 산이름인 변산을 말할 때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인 '능가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불교에서 능가[릉가]라는 말은 도달하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변산 내소사'가 아닌 '능가산 내소사'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봉래루를 왜 능가루라고 안하고 봉래루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봉래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봉래루 자체를 인간세상과 구분되는 신선의 세계로 생각하려 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단지 변산의 옛 지명인 '봉래산'에서 생각해낸 명칭은 아닐까 생각한다.

   

봉래루를 지나 석축을 딛고 올라서면 웅장한 대웅보전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앞, 설선당을 우측에 두고 아담한 크기의 3층석탑이 무설당쪽으로 약간 비켜서 있다.

 

 

이 탑은 축조시기는 고려시대이나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3.46mm 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탑의이 올려져 있으며, 맨 아래의 받침대는 하나의 돌을 이용한 것이다.

몸체도 층마다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각 면마다 기둥을 새겼다.

몸체와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와 높이가 급격하게 줄었으며, 지붕들의 경사도 심한편으로 날렵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가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탑으로, 1986년 9월 8일 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삼층석탑을 지나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기단위에 올라선 대웅보전을 만나게 된다.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된 절을 여러번의 중창 끝에 현재의 대웅보전을 인조 11년(1633) 청민(靑旻)이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으로
못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든 그 의장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중기의 대표작이다

 


대웅보전은 내소사의 본전으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가리키는 삼존불과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을 가리키는 삼세불과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을 가리키는 삼신불을 함께 모시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경우를 '대웅보전'이라 한다.

 

대웅보전은 높게 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으로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되어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정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이제는 세월의 흔적으로 나무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나 오히려 고풍스러움이 더 묻어난다.

 


내소사의 대웅보전을 보노라면 당시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추억으로만 있는 어린시절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하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탈색되어 버린 단청은 세속의 이익과 명리를 털어버려 제진법아시멸도(除盡法我是滅度-법도 나도 다해 버린)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보살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하면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말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정면창호는 2짝-4짝-2짝의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꽃살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의 문이 다른 곳과 다르게 바깥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열리는 것이 특이하다.

보통 문을 밖으로 열게 하고 밖에 문고리를 단다.

 

이 문은 밖으로 닫는 구조인데 문고리가 없고, 밖에서는 문을 잠글 연유가 없으니 한마디로 열려있는 구조다.

문고리는 천장에 달려 있는데, 문을 열면 천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한다.

그 옛날 목수의 열린 구조에 대한 인식과 불상이 지긋이 내려 보는 시선이 재미나다.

 

 

문살은 정교하게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또한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 목수의 솜씨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대웅보전의 건축에서 보여지는 곳곳의 조각한 솜씨가 특히 뛰어난데 화문살에서는 불성의 깨우치는 단계를 꽃봉오리와 활짱 핀 꽃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고 한다.

 

부처님 공양 중 가장 으뜸이 등(燈) 공양이고 둘째가 꽃 공양이라 했는데 하나하나 조각하면서 기도하였을 장인의 깊은 불심을 느껴본다.

 

 

이미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군데 군데 떨어져 나간 곳도 있고 문살나무의 결도 무늬로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자연히 닳아 이루어진 것이라 감촉이 손끝을 통해 가슴까지 따뜻하게 나무의 온기가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대웅보전의 색이 없이도 화사한 꽃살문의 아름다움에 자꾸 눈이 간다.

 

단청이 사라지며 점차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나무의 결각은 마치 겹겹히 쌓였던 번뇌의 업장을 털어내고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웃던 노스님의 이마에 굵게 새겨진 주름같기도 하다.

 

최근 중요 문화재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함부로 단청을 할 수 없도록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이곳 내소사의 대웅보전도 웅장하면서도 세밀한 대웅보전의 처음 맑은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단청을 올려 화려했을 색채는 어쩌면 다시 볼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소사는 오레된 가람인 만큼 민간 전설을 여러 개 품고 있다.

대웅전을 새로이 지을 때 목수와 포를 감춰 버린 사미승의 이야기, 그리고 100일 동안 문을 닫아걸고 벽화를  그렸다는 한 마리의 금빛 새 이야기, 보종각에 있는 동종에 관한 전설 등이 그것이다.

 

법화경절본 사본 7권에 얽힌 이야기

현재 전주시립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간 법화경절본 사본 7권에 얽힌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여인의 애틋한 사연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법화경의 원래 명칭은 묘법연화경으로,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그런데 이 책은 사랑하는 남편「유근」과 사별한 이씨 부인이 그의 양인의 명복을 추원하기 위하여 1자1배(一字一拜)의 지극한 정성으로 묘법연화경 내용을 흰 종이에 먹으로 옮겨 쓴 것으로, 모두 7권으로 되어 있다.

그녀가 드디어 마지막 글자를 쓰고 책의 필사본을 마무리 하였을 때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각권의 길이 36.2㎝, 폭 14㎝ 권당 52면으로서 상·하 변획선이나 절면누선(折面累線)이 없이 반면에 6행씩 필사해 간 것인데 행당 자수는 17∼19자로 일정치 않다.

표지는 감지에 금니(金泥)를 사용하여 당초문대의 구획내에 세로로 4개의 연화문을 그리고 중앙에 태선(太線)의 방구간(方區間)에 「妙法蓮花經券弟一」등으로 책명을 금서하고 간지에는 금니(金泥)로 연화문을 그리는 등 일반 경본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필사한 연대(태종 15년, 1415년, 永藥乙未)가 명확하므로 사경류의 연대식별에 중요자료가 되고 있고, 고려를 벗어나 조선초로 내려 왔다 하더라도 이렇게 완전하게 보존된 것으로는 국내 일품이다.

서체는 고려 말기의 유려화사(流麗華奢)한 맛이 적고 후중건실(厚重健實)한 서풍으로 시종일관 하였는데 자체는 멀리 당대 이래의 사경의 맛을 은은히 간직하고 있어 신심어린 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공포와 벽화에 얽힌 이야기

대웅보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쪽 천장의 공포 한곳에 목침 한 개가 비어있다.

그리고 동쪽 단청에도 유독 한 곳에는 단청 칠이 없어 부자연스러운 곳이 보인다.

전설로 전해지는 두 가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대웅보전의 공포에 얽힌 전설

 

창민선사가 내소사를 중건 할 때, 대웅보전 재건을 맡을 목수를 불렀는데, 그 목수는 묵묵히 나무만 다듬었다.

말 한마디 안하고 나무만 깎고 있으니 장난기가 발동한 한 사미승이 목수가 깎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감추어 버렸다.

나무를 다 깎았다고 생각한 목수는 나무토막의 수를 헤아렸고 하나가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다,

목수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해 창민선사에게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하며 떠나려 하였다.

이에 창민선사가 그 부족한 한 토막은 이절과 인연이 안 되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꾸고 계속 절을 지어달라고 사정했다.

이때 사미승이 감춰둔 나무 조각을 내어 놓지만 목수는 부정탄 나무라하며 그 나무토막을 빼고 한 조각이 부족한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도 법당의 안의 오른쪽 윗부분 공포 내5출목의 목침 한 개가 비어있다.

그 옆에도 빈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청의 유무를 가지고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없었던 곳은 단청이 칠해져 있을 것이고, 지은 다음에 나중에 없어진 부분은 단청도 없을 것이 아닌가.

 

대웅보전의 벽화에 얽힌 관음조 전설

 

법당이 세워진 후 전각에 단청을 하고 벽화를 그릴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벽화를 그릴 터이니 벽화를 그리는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 다 되어도 화공이 나오지 않고 기척이 없자 호기심이 많은 이 절의 선우스님이 살짝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화공은 없고 오색영롱한 금빛의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들어오는 스님을 보더니만 단청 한 곳을 마무리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전 동쪽 도리는 바닥만 채색되고 덧 그림이 빠져있다고 전한다.

 

날아간 그 관음조는 능가산 중턱에 앉았고, 그 때부터 노스님이 나타나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 스님을 관음조의 화신이라고 불렀으며 그 이후에도 그 암자에 스님들이 살았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암자는 폐쇄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어느날 그 암자 터를 복원하여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여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관음기도도량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목수는 호랑이가 현화(現化)한 대호선사(大虎禪師)이고, 벽화를 그린 관음조는 관세음보살의 현화라고 전한다.

 

물론 전설이니 확인하는 지성보다는 전설은 전설로 믿어 주는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운 것이아닐까?

 

 

 

부안 변산반도 능가산 내소사의 이야기는 내용이 많아 우선 여기까지만 올리고 나머지는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