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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전북 완주군 천년 사찰 송광사로의 역사를 향한 발걸음... [2]


송광사의 지장전을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그저 평활한 곳에 자리한 사찰이라 일주문에서 부터 좌우 사방을 살펴 보아도 그저 평지다. 

 

대웅전 역시 평지에 기단을 몇 올려 쌓고 지은 것이라 그렇게 우람한 느낌은 없는 것 같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松廣寺大雄殿)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된 송광사의 대웅전은 국내 최대 크기의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목패, 천장에는 주악비천도11폭이 조성되어 있으며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초창에는 2층이었으나 1857년도에 1층으로 되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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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단청과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그저 무심히 흔들리며 댕강거리는 풍경은 고즈넉한 산사에서만 느끼는 여유로움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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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각 지역 사찰 마다 보물이나 문화재 한 두점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송광사는 고인돌 부터 시작해서 사찰 전역이 보물이거나 문화재 등 유물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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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이다.

화려한 단청에 깔끔하게 잘 정리된 주변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님세계에 든 이들의 마음처럼 정갈한 느낌이다.

그리고 보통은 대웅전의 좌우 문이 다 열리는 것인데 송광사에는 왼쪽은 잠궈두고 오른쪽으로만 출입을 하게 하였다.

송광사에서 자랑하는 대웅전의 내부를 촬영을 할까 하고 대웅전의 오른쪽 문을 여는데 마침 들어가려던 신도인지 종무원인지 모를 여성이 차갑게 내뱉는 한마디에 아연 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신도든 신도가 아니든 열린 공간이 대웅전일터...

들어 오지 말란다.

그리고 대웅전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단다.

ㅎ~~~

참 인심한번 고약한 절의 행사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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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대웅전 정면 문앞은 사람들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지 사람의 자취가 별로 없다.

어디에 쓰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생이 창연한 돌거북의 등에는 단 같은 것이 올려져 있다.

막새기와로 테두리를 한 작은 연못[?]들도 몇 있는데 겨울이라 연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대웅전의 크기에 비해 좀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웅전 좌측으로는 거창한 불사로 미륵불을 세우고 주변을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단장을 했는데...

이몸과는 취향이 맞지도 않지만 작은 연못과도 어울리지 않아 사진에 담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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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가람의 구조가 특이해서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그래서 대웅전에서 보면 일주문의 동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주문에 문짝을 달아 놓은 것이 어쩌면 대웅전의 동정을 감추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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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처마 밑으로 아자형종각과 극락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리 보기가 좋지않은 감시카메라가 쌩뚱맞은 흰색으로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 있다.

건물의 색상과 잘 어우러지는 모양이나 색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잠시 공허로운 생각이 머물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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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의 대웅전 앞에는 아[亞]자형 또는 십자형이라 불리는 범종루인 종각이 있다.

범종루는 다른 말로 종각, 범종각, 종루라고도 하는데,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4물을 걸어놓는 누각을 말한다.

 

아[亞]자형 종각   

亞자형 평면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짜 올린 2층건물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건물인데 비하여 여기서는 보궁에 즐겨쓰는 특수한 평면형식 즉, 亞자형을 택하고 있다.

위층은 마루바닥에 계자각난간을 두르고 계단 있는 쪽만 개방하였으며, 아래층은 흙바닥이며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종·북·목어·운판을 걸어서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다.

칸 사이는 모두 똑같이 8.15자(2.5m)로 소규모인데, 내외 3출목 포작을 주두 및 보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지붕을 받게 하였다.

 

건물 크기에 비하여 공포대가 크고 화려해 보이는 반면,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하여 세부는 섬약해 보인다.

겹처마 밑의 서까래와 부연 또한 다른 건물에 비해 가는고 섬세하다.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 곡선은 이 건물이 누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2층 내부의 천정은 네 귀에서 짜 올라간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내부 천정 가구는 대들보 없이 창방이 대신 대들보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이며, 내부 기둥 4개에는 용을 그려 장엄하고 창방의 계풍에도 수목화초를 그리고 있다.

이 건물에 걸려 있는 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1769년 (영조 45)에 중수되기도 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쳐 지은 시기인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완주송광사종루」라는 이름의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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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의 사물은 예불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범종은 특별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법고는 축생을 제도한다.

목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기와 같이 항상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운판은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송광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둘 있다.

하나는 매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내려져 있는데 둘다 사용하는 방법이 다를 뿐 사용하는 것 같은데 어느 것이 문화재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 범종을 보관하려면 같은 모습으로 모사하여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두 범종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곳을 보면 그 용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8호)

1716년에 만들어진 범종은 전통 한국식을 따르고 있으며, 본래의 소속 사원이 적혀있고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조선시대 범종연구와 前시대의 범종연구에 빠져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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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생들의 제도를 위해 두드린다는 법고

요즘같이 인간 같지 않은 종자 쥐새끼나 살인마, 후안무치한 권력자들이 많이 창궐할 때는 더욱 더 열심히 두드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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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로 하여금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어 밤낮으로 정진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우리도 눈을 바로 뜨고 항상 바르게 깨어서 이 쥐새끼 정부의 행태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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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의 기단부는 자연석을 놓고 거기에 맞추어 기둥들을 깎아 세웠는데 기둥의 모양이 각진 것과 둥근것 등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공을 들여 다듬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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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뒷편으로는 관음전과 공양간이 자리하고 있다.

송광사관음전은 2층 건물로서 1층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2층은 관음전으로 사용되었으나 2003년에 1층을 없애고 2층만을 옮겨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며 그 뒤에 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 후불탱화를 봉안한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 관세음자재라고도 번역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관세음보살이 되고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등장한다.

관음탱화 역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모셔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관음과 십일면관음, 천수천안관음 등을 들 수 있다.

성관음은 온몸을 백의로 덮고 있거나 대체로 천의를 입고 있다.

또한 천의를 입은 위에 투명한 사라를 머리에만 덮기도 하고 전신에 너울처럼 덮은 경우도 있으며 보관을 쓰고 있다.

 

십일면관음 보관에는 11면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는데, 전후좌우 10면의 얼굴은 보살의 수행단계인 10지를 상징하고 맨위의 얼굴은 부처님의 상호로서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나타낸다.

우리 나라에서 조성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대표적인 모습은 석굴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여러 가지 인간의 재앙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구제의 의지를 담고 있는 관음상이 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 할 수 있다.

천수천안관세음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천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것은 세간을 살피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눈과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수천안을 형상화 할 때는 정상적인 두 손 이외의 손들을 마치 광배처럼 등 뒤에 원형으로 안배하고 각각의 손바닥 위에 눈을 그려 천안을 표현한다.

관음탱화의 구도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관음상들이 측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조선시대의 수월관음도는 거의가 정면관을 취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앙에 화불이 장엄되고 수많은 구슬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는데, 그 장식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거기서부터 영락장식이 다시 천의를 따라 발 아래까지 늘어져 있어 장식적인 의도가 두드러진 화풍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가슴에서부터 대좌까지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천의의 복잡한 흐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날 너무 급작스레 길을 나서는 통에 아침을 거른 나는 허기가 지는 통에 볼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하고 절의 공양간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공양시간이외에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나름 규율을 잘 지키는 절 같다는 느낌은 받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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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관음전 맞은편 약간 높은 자리 수목 사이에  세심정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진 중 더러는 탁해지는 마음을 닦는 곳인듯 사방이 트인 말 그대로 정자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나무로 둘려진 것이 선방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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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짚어 가다 보니 자꾸 글이 길어진다.

 

이제는 삼성각과 나한전의 소개만 남은 것 같다.

다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2009년 1월 31일 전북 완주 송광사를 다녀와서...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