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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살인마 전두환일당이 일으킨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 기억합시다. 오늘이 12월12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하나회 소속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의 날입니다.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12,12 사태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장성 및 핵심 영관 장교'들은 동년 12월 12일 공수부대와 사단급 부대들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한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자택으로 습격, 연행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정승화 사령관의 연행을 사후 승인받았습니다. 이후,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3월 제 12대 대통령에 오르는 친일빨갱이군사쿠데타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이은 야만의 역사가 되풀이 된 것입니다.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 더보기
[친일청산]박정희 동상 설치 반대하는 사람들 모임 카페개설과 성명 이유서 제발 박정희 동상 독일에 공공장소건 사적 장소건 서지 않도록 이처럼 독일에서 뜨겁게 일어나는 반대여론을 여러분이 많이 많이 알려 주세요. 사실 이 문제의 진원은 이곳 독일이 아니라 국내 아니겠습니까? 박정희 동상 설치 반대하는 사람들 모임에서는 박정희 동상 설치하려는 "추진위원회"에서 마련한 공청회에 가서 다음 성명서를 배포했습니다. 공청회에서도 반대의견을 넉넉히 피력하고 이어 지난 주말 일단 144명 1차 서명자 명단을 집계하여 발표했습니다. 들불처럼 번지게 될 반대 서명 바람에 나무님들도 관심가져 주세요. 아 왜 하필 독일에 세운댑니까? 독일 그렇게 만만한가요? 그럼 성명서 보시구요. 오늘부터 다움에 카페도 개설하였으니 놀러오셔서 가입도 하시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 주세요. 단 차나 커피는 직접 들고 .. 더보기
재독 교포는 왜 박정희 동상 건립을 반대하나?[재독동포사회 '박정희 동상건립 추진위원회' 공청회] 재독 교포는 왜 박정희 동상 건립을 반대하나? 독일=이은희 재독 '풍경' 발행인 ㅣ 입력 2011-06-25 11:26:55 / 수정 2011-06-25 11:58:31 재독 교포들이 박정희 동상 건립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재독동포사회에서 지난 5월 2일 결성된 ‘박정희 동상 건립 추진원회’는 지난 23일 에센 광부기념회관에서 공청회를 했다. 박정희 동상 건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재독동포 수십 명이 공청회에 참석해 반대 이유를 밝혔다. 21세기에 느닷없이 돌아온 박정희 망령에 맞서 ‘박정희 동상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뜬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에도 수십 명이 참석하여 전체참석자 중 절반을 넘었다. 고창원 글뤽아우프 회장은 “박정희란 이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눈에 불을 .. 더보기
잊었는가? 그 폭압정권 연장이 한나라당임을!!! [6월항쟁 미공개 사진] ‘이한열 죽음’ 오늘이 그날... 잊으셨나요? 그래서 폭압적이던 그 정권의 연장인 한나라당이 집권을 하게 두셨나요? 반드시 괴멸시켜야 할 정당이 한나라당입니다. 다시는 잊지 맙시다!!! 1987.6.9 짓밟히고 쓰러져도 하나가 되던 날 [한겨레] 이정우 기자 김태형 기자 [6월항쟁 미공개 사진] ‘이한열 죽음’ 그날 무슨일이… 로이터 사진기자 정태원씨가 기증 당시 이한열 죽음 전세계에 알려 » 아! 이한열 1987년 6월9일 오후 4시30분께 연세대 정문 주변에서 경찰의 총류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씨를 동료 학생들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 정태원(72)씨 1987년 1월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씨를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뒤, 전두환 군사정권이 4월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하자 민주화 요구.. 더보기
5.16을 맞아 생각하는 박정희시절의 고도성장? 박정희의 경제 실정에 대한 이야기 박정희 정권이 외환위기를 네 차례나 초래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첫째 위기는 1963년에 발생했다. 금융기관 동결, 정치자금 조성이 빚은 증권파동, 화폐증발 및 물가폭발과 그에 따른 화폐개혁 등이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발생시켰다. 미국의 긴급 지원을 받았음에도 위기가 지속되자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하여 외환을 구걸하였다. 둘째 위기는 1968년에 발생했다. 물가상승률이 매년 20% 전후에 이르자 국제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국제수지 적자가 커졌고, 결국 외환보유고가 고갈 직전에 이르러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셋째 위기는 1971년에 발생했다.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 누적되자 차관을 들여와 소위 차관기업을 147개나 설립했는데, 과도한 정치자금의 조성이 대기업을 포함하여 60% .. 더보기
박근혜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의 스위스 비밀 계좌와 이후락 부정축재 박정희 정권 시절 10년간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10월31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임자인 김형욱 중정부장과 함께 박 대통령 심복을 자임하며 온갖 공작정치로 유신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은 이후락씨는 한국 현대사를 암흑으로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권력 전면에 등장한 이후락씨는 그 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하자 39세의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6년간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1970년 6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아 다시 3년 동안 악명 높은 정치 공작을 벌여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더보기
70년대 유신시대 군사독제로 회기한 것인가? 중단하라 무력도발? 변하지 않는 이데올르기 전쟁 1970년대 유신과 박정희 군사독재의 폭정속에 보낸세월 세월이 정지한 듯 멈춰버린 공간을 보게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맹목적인 교육열 무었을 배우고 어떤 것을 알아야할지는 정부가 정하고 그저 아는 것이 힘이라는 한마디에 목을 매고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교련 선생들의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무자비한 구타가 횡횡하던 시절 그때 배운사람들이 지금 이 거짓말이나 하고 대국민 사기질이나 하는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민족을 자긍심을 가지고 사랑하라고 가르친 '국민교육헌장'은 대학교 입시와 상관이 없어서 외우기만 했지 배우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 국민을 기망하고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는 기술만 배운 모양입니다. 오직 자신과.. 더보기
엽기적인 한국우파[?]들의 실체 정말이다.우리는 무서운 현실속에 살고 있다.한나라당은 도데체 어느나라 당인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