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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윤증고택을 가다.[윤중이 아님]

10월 11일 토요일

아침 계룡산에 오를까 하다가 저녁을 같이 하자시는 논산의 손소아청소년과의원 손영기원장님 말씀이 생각나서

내 블로그 이웃 오천사에게 전화를 했다.

같이 갈 약속이 되지 않으면 그냥 산에나 오를려고...

한문선생님인 오천사가 마침 놀토라서 고향집에서 들깨를 수확하고 있단다.

점심먹고 같이 바람이나 쐬자고 한다.

13시 27분 중장리 농바위앞에서 만나 같이 길을 나섰다.

오천사의 귀여운 늦둥이 용성이도 같이...

 

토요일이라 16시 30분까지 진료를 하는 관계로 그 이후에 논산에 도착해야 하므로 그 동안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산성에 관심이 많은 오천사...

논산시 노성면의 삼국시대 백제산성인 노성산성으로 가기로 하고 출발을 하였다.

노성산성및 노성산 등산로 입구에 윤증고택이 있고...

먼저 노성산성을 다녀와서 윤증고택으로 향했다.

 

건축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터라 그냥 고택이려니 생각만 하고 있었지 일부러 찾을 마음은 없었는데,

가까이 온김에 들러 보기로 하였다.

산을 다녀와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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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사의 뒷모습]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를 바라보니 고색창연한 우아함이 "역시 한옥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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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하면서도 단아한 기와 팔작지붕과 처마 그 옆으로 줄지어 놓인 항아리들

주춧돌 하나에도 당시의 권세와 위용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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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창너머에는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사방으로 열리는 문이 있어 여름에는 발만 하나 쳐두어도 되니 얼마나 시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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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흐트러짐없이 정갈한 마루뒤로 지붕이 보이고 그저 걸어둔 듯 자연스런 액자는 멋스러움을 더한다.

뭔글씨인지는 잘 모르겠다.

OOO맹인것 같은데~~~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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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무수히 많은 장독이 질서정연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무슨 의미인지 청테이프로 표시를 해 둔 것이 보이는데...

아마 매년 담그는 된장이나 고추장의 년식을 표시 한 듯 하다.

특이하게도 돌로 만들어진 솟대가 보인다.

오천사는 오리라고 하는데...

난 아무리 봐도 암닭 같았다.

예로부터 된장이나 고추장은 1년 반찬이니 부정타지 말라고 솟대를 한 모양인데

돌로 만든 것은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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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담장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지보수비용이 다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유재산으로서의 권리만 제약할 뿐 별다른 보조나 지원은 없는 듯하였다.

 

오천사가 안채인 생가를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웬 남자분이 남의집을 그렇게 함부로 들어가면 되느냐고...

맞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데...

들어 가면 쓰겠는가.

아니 아예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생가에는 종손이 거주하며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또나 개나 불쑥 불쑥 들어서면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그저 바깥에서 사랑채만 보아도 구경은 충분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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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의 비법대로 된장과 고추장을 담궈서 판매도 하시는 모양이다.

사랑채 아래 대나무 바구니 뒤로 포장용 골판지 박스들이 있는 것을 보니...

 

이 쯤에서 대한민국 건축학도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반드시 한번은 보아야 할 곳으로 알려진 윤증고택에 대하여 알아보자.

 

윤증선생고택 [尹拯先生故宅]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윤증(1629∼1724)의 목조 가옥.
지정번호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지정연도  1984년 12월 24일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시대  조선시대
분류  가옥
 

조선시대에 건축된 가옥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슴
 

가옥은 상류 양반 가정의 표본이 되는 목조단층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안채는 ‘ㄷ’자형이며,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있다.
대청 뒤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서쪽에는 정면 2칸과 측면 1칸의 안방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웃방이 있다.
남쪽에는 부엌이 넓게 꾸며졌고, 부엌 위에 다락이 있다.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대청과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그 뒤에 또 다른 방이 이어졌다.
‘ㄷ’자형의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어 ‘ㅁ’자형 구조를 갖추었으며, 대청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되었다.
지붕이 특이하게 조성되었는데, 그 형태가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다.
구조적인 면과 배치 형태, 창호의 처리 등에서 기능성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언젠가 동학농민 항쟁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오천사가 윤증고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논산을 거쳐 공주감영으로 진격할 때 윤증선생댁을 찾아 밥을 지어먹게 쌀을 달라고 했단다.

하지만 윤증선생께서는 신하된 도리로 반역의 무리에게는 한톨의 쌀도 줄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단다.

화가 난 농민군들이 학자로서 명성이 드높았던 윤증선생께는 해를 입히지 못하고 집대문[?]과 몇군데에 불을 질러 놓고 갔다고 한다.

 

홈페이지 [http://www.yunjeung.com]에 가면 더 자세한 내용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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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불에 탄 들보가 보인다.

불타버린 남대문처럼 당시에도 쓸만한 자재들은 살리고 나머지는 새로이 만들어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안채 대문위에 그을린 나무가 있어 좀전에 오천사를 나무라시던 남자분께 물으니 동학농민군이 불을 질러 수리한 흔적이 맞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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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자를 여쭙진 않았는데 윤증선생의 종손으로 종가를 지키고 계신 분인 것 같다.

대단한 조상님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어떻게 해야 조상님들보다 나은 모습이 되어 사회와 역사에 이름이 남을까?

파평윤문으로서 ...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경원대 건축학과 학생들이 방문하여 예를 갖추고 실례를 범하게 됨을 청하는 데...

ㅎㅎㅎ

한 두명이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번 허락을 해야 하는 입장은 얼마나 불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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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대학교수인지와 여러가지 의논을 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자리를 떳다.

그럼 윤증선생은 어떤 분이었을까?

한번 정도 알고는 넘어 가자.

 

윤증 [尹拯, 1629~1714] 

조선 숙종 때의 학자(1629~1711).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차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남인에 대한 입장이 달라 서인이 둘로 나뉜 후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 등이 있다.  


본관  파평
호  명재·유봉, 시호 문성
별칭  자 자인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명재유고》
 

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윤휴(尹鑴)·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그가 스승인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辛酉擬書)에 의하면 스승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하여 배사론으로 지목받았고,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와 이에 근거한 존화대의(尊華大義) 및 숭명벌청(崇明伐淸)의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박,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을 이루었다.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 비문 찬술 시비와 더불어 신유의서의 작성으로 노소당인 간의 격렬하게 전개된 회니시비는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도 더욱 격렬하여 노소당인들이 대립되었던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을 맺지 못하고 경종·영조·정조 대에 해당되는 18세기 노소당론으로 넘겨졌다.

그는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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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면 윤중/윤증 으로 다양하게[?]표현되어 있다.

역사속 인물이요.

파평윤씨 가문의 훌륭한 조상인데...

함자라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윤중이 아니고 윤증[尹拯]이다.

잘못은 고치고 올바른 정보를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관람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남의 집을 구경하였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숙여 인사를 해야 옳음인데...

시멘트 바닥에서 살다가 와서 그런지 이곳 저곳 풀이 자라있는 모습이 익숙치 않아서 인지

윤증고택을 지저분 하다는 둥 헐 뜯는 글을 올리는 모자란 인간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원래 시골에서는 풀이 자란다고 무조건 깍는 것이 아니다.

 

다 깍는 시기와 때가 있는 것이다.

나 같으면 그런 글 올릴 시간에 자원봉사라도 하겠다.

자진해서 풀을 뽑거나 쓰레기라도 줍고 도랑이나 하수구도 좀 치고~~~

 

요즘은 인간들이 왜그렇게 염치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쩝~~~

 

 

[2008년 10월 11일 논산시 노성면 윤증고택을 다녀와서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