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의 <항소이유서>를 읽으며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인간 유시민’의 팬이자, 정치적 지지자로 지내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4.27 재보선 결과를 보면서 당신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 몇 자 적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축에 드는 분에게 막상 편지를 쓰려니 계면쩍어지는군요. 이십 몇 년 전, 당신의 <항소이유서>를 읽던 그 심정으로 돌아가 이 글을 적습니다.

 

야권 연대나 야당 통합을 통한 '여야 1대1 구도 형성'이 정치판의 주요 이슈로 곧 부상하겠지요. 그 과정에서 '야권단일화 무망론'이 대두된다면, 이번 선거는 당신에게 최대의 역사적 과오로 기록될 것 입니다.

 

 
 
지난 2009년 10월9일 오후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운동장에서 열린 노무현재단 출범기념 콘서트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하모니카 연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치 1987년 대선 직전 분열로 군사정권연장을 초래한 김대중과 김영삼처럼 말입니다. 그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직을 획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중대한 과오가 면책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말 조리있게 잘하지, 글 잘 부리지, 갸르스름하니 총명해보이는 외모에 학벌 출중하지, 게다가 서민적이기까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명백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거론합니다. 역대 주요 선거 때마다 출신지별 인구분포가 중요하게 기능했고,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우리의 고질적-후진적 선거풍토에서 당신은, 다수파인 ‘영남’ 출신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신이 지역감정의 덕을 보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전-현직 정치인 중 노무현 전 대통령 빼고 당신 만한 조건을 갖춘 이가 어디 또 있습디까?

 

당신에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 곁을 지키는 확고부동 지지층이 10%'나' 있습니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적습니다. 지금 박근혜씨가 보이고 있는 지지율에 비해서도 한참 모자랍니다. 그러나 양김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했으니 비교할 바가 못될 것이고, 지지강도나 충성도를 고려하면, ‘박근혜 40%’라는 숫자 상의 무게에 지레 압도당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앞으로 또 숫자가 어떤 춤을 추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닙니까?

 

당신의 그 많은 매력포인트를 감안할 때, 그 열성적 팬이 왜 10% 밖에 안되는 지가, 저는 궁금합니다. 못돼도 30%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그 10%를 주춧돌 삼아 계속 '주연배우'가 되기를 고집한다면 당신은 결정적 국면에서 대업을 그르치는 데 결과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게 저의 우려입니다. 그게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입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정치적 격동기마다 당신은 탁월한 순발력과 분석력, 토론능력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의제를 설정했으며, 욕 먹어가면서도 일선에서 몸 사리지 않고 돌파해왔습니다. 당신의 활약은 통쾌했습니다. 존경합니다.

 

"옳은 말을 싸가지 없게 하는 사람"이라는, 어느 정치인의 당신에 대한 유명한 인물평이 있습니다. 그게 정확한 것 인지는 모르지만, 그 인물평 역시 그닥 ‘싸가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한 그 촌평이 여전히 유효하게 통용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주연배우'로 나선 작년 6.2 지방선거에서나, 무대감독으로 선거전을 총 지휘한 이번 4.27 재보선에서 당신은 당신보다 덩치가 50배는 큰 민주당을 상대로 후보단일화를 연거푸 획득해냈습니다. 협상과정의 당신은 ‘기 막히게’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두 선거에서 당신은 석패 했습니다. 두 번의 단일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트위터나 정치담론 공간에서 회자되고 있으니 당신도 이미 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용하지요.
"노무현은 지는 길을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나, 유시민은 이길 수 있는 길만 찾다가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게 노무현과 ‘노무현 경호실장’의 차이다"
동의 하시나요?

 

다른 곳도 아니고 노무현의 정치적 고향이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가 잠들어 있는 곳이니 적어도 10%포인트 차이 정도로는 이겼어야 말이 되는 건데 말이지요.
더구나 전통적 야당 열세 지역인 분당이나 강원에서도 이겼는데, 야권단일화 까지 이룬 노무현의 고향에서 지다니...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봐야할 대목이 김해와 분당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기구한 것은 이 대목입니다. 박연차에게서 돈 받은 게 문제가 돼 치르게 된 이번 선거에서 역시 박연차와의 석연찮은 관계 때문에 총리직을 코 앞에서 놓친 사람에게 지다니...이제는 한나라당 사람이 된 엄기영 전 앵커의 트레이드 마크인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라는 멘트는 이럴 때 써야 하는게 아닌지요. 아이러니입니다.

 

그 모든 책임을 당신 혼자서 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책의 맨 앞렬에 당신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일후보 자리를 뺏긴 민주당이 ‘처삼촌 벌초 하듯’ 선거전에 슬렁슬렁 임했다는 류의 볼멘 소리는 잠시 접어둡시다. 진 쪽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단일화 승자의 책무이자 정치력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제 당신이 뭔가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스타 플레이어’에 집착하지 말고 '페이스 메이커' 역할에 대해 고민하시기를 간절히 충고합니다. 당신이 버려지는 것은 어머어마한 손실입니다. 당신 같은 양질의 정치적 자원을 잃는다는 것은 여-야, 보수-개혁-진보 구분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당신의 열혈팬 10%와, 그들의 향후 역할에 따라 ‘플러스 알파’가 최소 몇%는 될 잠재적 지지세력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사표(死票)로 썩히지 않을 방안을 찾아서 제시하십시오. 그 방안을 당신의 10%에게 ‘겸손’하게 제시하고, 토론 끝에 승인받기 바랍니다.

 

당신은 당신의 지지층 10%를 이끌고, 합리적-개혁적 정권창출을 위해 종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연배우 자리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당신이 주연배우 예비리스트에서 마저 배제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좋으나 싫으나 이미 당신은 그 리스트 앞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먼저 나서서 주연배우 오디션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라고는 말라는 겁니다.

 

이번에 우리는 당신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무리수를 뒀고, 향후 그 악수가 재연되지 않을 방도는 또 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십시오.
당신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아끼고 존경하는 민주개혁진영 전체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부디,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봄꽃 들이 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이 봄이 화사한 봄 일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봄 일 것입니다. 모쪼록 심신의 건강,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2011.4.28.
당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