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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충남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 '충남역사박물관 인문학 포럼'

 

 

 

 

 

 

 

 

 

 

 

 

 

 

 

 

충남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팀 초등학교 교사 30명과 함께 한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대행 김정섭) 충남역사박물관(관장 오석민)은 지난 5월11일 부터 시작된 1박 2일간 충청남도교육연수원과 함께 초.중.고 교사들의 ' 2013 역사ㆍ문화ㆍ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와 함께하는 총 6회의 행사 중 두번째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라는 제하의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이 5월 25일 충남도내 초등학교 교사 30명과 함께하게 되어 계룡도령도 다녀왔습니다. 

 

지난 번 '문화 창의체험 제 1기'에 이어 이번은 '문학 창의체험 1기'이고 지난번과는 다소 다른 일정이라 새로운 느낌과 기대로 설레는 탐방이 되었습니다. 

 

 

이날 열린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 2차 행사는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로 충남역사박물관을 관람한 후 10시경 출발하여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추사고택 일원의 기념관과 추사묘역, 추사고택, 화순옹주 정려, 김흥경묘역, 추사의 상징과 같은 백송을 아우르고 추사의 글이 각인되어 있는 화암사를 거쳐 아산 외암민속마을에서 추사의 처향인 건재고택을 포함한 유적 답사를 하고 오후 5시 30분부터 '2013년 기호유학 인문마당' '우리 삶의 자존감을 말한다' 첫번째마당 풍류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우리 음악의 매력'이 펼쳐지는 교수댁에서 강연과 공연을 즐기고 늦은 시간 서산 김기현 가옥[계암고택]에 도착해 간단하게 준비된 야식을 즐기고 방을 배정 받아 설레는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이튿날 계암고택의 종부이신 이효원여사님이 직접 개발한 퓨전 한식을 같이 만들고 차려서 든든한 아침을 즐긴 후 뜨거운 태양 아래 더위를 이겨가며 김기현 종손과 함께 정순왕후 생가와 단구대와 용유대를 보고 추사의 암각 취석을 본 후 추사가 비문을 쓴 상산황씨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를 거치며 답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탐방에서 충남역사박물관을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예산 추사 기념관에서부터 잘 생긴 소설가에 초등학교 교사인 표윤명선생님의 안내와 해설로 추사 김정희에 한발 더 다가선 일행들은 조선후기 한반도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추사를 알아가면서 초등학교 선생님들 다운 밝은 표정으로 시종일관 감동과 경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날 유난히 더웠던 날씨였지만 열의가 가득한 선생님들은 뙤약볕 아래 추사 김정희의 묘소를 참배하고 소나무 그늘에 앉아 왕자 못과 묘소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는 김정희 선생의 고택(金正喜先生古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서두르기만 하다 제대로 된 고증없이 잘못 복원된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하며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상황과 여러 현실을 이야기 할 때에는 가슴이 아파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천안의 모 사진 동호회에서 출사를 나왔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의 회원이 많은 사람이 보는 데도 여성분이 마루에 신발을 신은 채 올라가 사진을 담고 한 남성분은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틈에서 마루에 발을 걸쳐 서기에 계룡도령이 지적을 하니 미안해 하기는 커녕 눈을 부라리며 대들 듯이 하여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목소리 큰 계룡도령이 목청을 돋우는 일이 생겨 같이 답사를 한 일행인 선생님들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남이 보든 말든, 스스로가 알아서 조심하고 지켜야지 얼마나 훌륭한 작품으로 사진을 담을지는 몰라도 바로서지 못한 인성에서 나오는 사진이 바른 사진이 될리 없다고 계룡도령은 생각합니다.

 

 

이곳은 흔히 추사고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김정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건립한 주택으로 김한신은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는데,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이에 옹주 또한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곡기를 끊고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추사고택 뒷산 묘역에는 두 내외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99칸 집이었다고 하나, 현재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가 남아있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만들어진 전형적인 중부지방 반가의 모습으로 실제 쓰임새에 맞게 문과 창을 낸 실용적인 구조의 건물입니다.

 

추사 고택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바로 뒤에 자리한 추사영당으로 가 추념하며 추사 김정희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그럼 이번 탐방 중에 만나게 된 추사 김정희는 어떤 사람일까요?

 

실사구시를 주창한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합니다.

 

조선 후기의 명문가 노론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경험한 학자이며, 굴곡된 삶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의 일가를 이룩하였는데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김정희는 북학사상의 심화단계로서[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며 실사구시학파를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청나라의 고증학을 적극 수용하여‘실제적인 일에서 옮음을 구하고, 징험 없이 믿지 않는다[實事求是無徵不信]’는 실학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대부 출신 제자 및 중인 출신 제자들은 다함께 북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되는 시대에 교량역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181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규장각(奎章閣) 대교(待敎)를 거쳐 벼슬이 사조참판(史曹參判)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고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제(自題)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 而得之 非一時之事也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 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萊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 而交?」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 自抜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 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亦 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巳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嗚呼 西京淳厚之世 以 汲 鄭 之賢賓客興之 盛衰 如下邳構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추사고택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장된 묘가 있고 그 곁에는 화순옹주홍문이 있습니다.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입니다.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는 1732년 김한신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고하는데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고하며 지금의 열녀문은 정조가 내린 것으로,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합니다.

 

열녀문은 약 200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운 형태인데 대문은 완전히 닫혀있지 않고 약간 열려있는데 이는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홍문에 있던 재실은 지금은 불에 타 버리고 주춧돌들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는데 남은 자료가 부족해 복원이 어려운 듯 했습니다.

 

이어 만난 추사가 심었다고하는 희귀한 모습의 백송[白松], 백송은 30년 이상이 되어야 껍질이 하얗게 변한다고 하는데 아마 추사 김정희도 처음 만난 백송의 모습에 매료되어 씨앗을 가져와 심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주변에 자손들이 자라고 있기도 합니다만 기후가 맞지 않아 활발한 성장을 보이지 않아 담당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24세 때인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 3개를 가지고 와서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김정희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준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문학 창의체험 1기'일행은 용산이라 불리며 솟은 낮은 산 아래 자리한 추사고택과 화순옹주 홍문 주변을 돌아 화암사로 이어지는 약 2킬로미터 거리의 용산탐방로가 잘 다듬어져 있어 이 길을 따라 걷거나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화암사로 가면 화암사 뒷편에 둘려진 병풍바위에 새겨진 미려하면서도 힘찬 추사의 글씨를 직접 볼수있어 일행은 그리로 향했습니다.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1752년(영조 28)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는 화암사는 양반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절집으로 반가의 원찰[願刹]이었습니다.

 

 

화암사가 세워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암사의 뒤편 바위에는 각각 시를 읊을 만한 좋은 경치란 뜻의‘시경(詩境)’,과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부처를 이르는 말인 천축고선생을 통해 '천축고선생의 집' 다시 말해서 절이라는 의미를 추사 나름의 해학적으로 표시한 것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70평생에 벼루 열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정희선생 필적암각문(金正喜先生筆蹟岩刻文)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는데 추사고택에서 멀지 않은 위치인 오석산(烏石山) 중턱에 위치한 화암사(華巖寺) 뒤편 바위에 새겨진 김정희 선생의 글씨입니다.

 

 

다음으로 일정은 이번 탐방의 백미라 할 아산 외암민속마을로 향했습니다. 

 

이곳 외암민속마을에는 추사 김정희의 처향이며 모 저축은행 사건으로 경매가 진행중인 건재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이번 탐방의 백미라고 소개했느냐...

우리가 쉬이 만나기 어려운 명 강의와 공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류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임동창씨가 말하는 '우리 음악의 매력'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직무대행 김정섭] 충남역사박물관[관장 오석민]에서 주관한 '2013년 기호유학 인문마당' 그 첫번째 마당이 충청남도와 아산시의 주최로 외암민속마을 보존회의 후원으로 충남 아산시 외암민속마을 교수댁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날 진행은 <노는 사람, 임동창>이라는 책을 쓰고, 괴짜 피아니스트, 천재 음악가라는 별칭을 가진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특별강연인 '우리 음악의 매력'을 시작으로

 

 

우리의 국악을 세계로 널리 알리는 '노름마치' 연주단과 "흥야라밴드"의 공연으로 끝을 맺었는데 교수댁 마당을 가득 메운 350여명의 관객들은 우리의 전통 음악과 이를 보전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으로 세계를 아우르는 '노름마치'의 열정적인 무대를 경험하였고,

 

 

가정의 달 5월에 맞는 퍼포먼스성 공연을 펼친 '흥야라밴드'에 무한 감동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1기'일행은 서산 계암고택[김기현 가옥]에 도착을 했습니다.

 

 

김기현 종손 부인이신 이효원종부님이 마련한 떡과 수박으로 출출함을 달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이른 아침 종가음식이라기 보다는 이효원종부님이 개발한 여러 음식들을 함께 만들고 상차림 하면서 많은 대화도 나누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몰랐던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푸짐하게 잘 차려진 제대로 된 음식을 배불리 나눠 먹고 직접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친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1기'일행은 김기현가옥을 나섰습니다.

 

 

서산 김기현 가옥(瑞山金基顯家屋)은 중요민속자료 제199호로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5번지에 효종이 김홍욱(金弘郁, 1602∼1654)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순왕후 생가와 붙어 있는데 계암고택은 평야지역에 낮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북동향 기와집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행랑채의 좌측 끝에 1칸 바깥 대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으며, 안채 뒤뜰에 3칸 초당(草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김기현선생님의 안내로 이웃한 정순왕후 생가를 방문해 후손인 김기흥 전서산시장[민선1.2기] 사모님의 분재 등 으로 가득한 안뜰과 화단을 감탄 속에 구경하며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로 새로운 역사를 맞이 합니다.

 

매번 들릴 때마다 달라지고 많아지는 화분과 식물들 특히 '스산 야생화 보전 연구회(회장 이건화)'가 준비한 야생화 전시회가 19일~21일 까지 이곳 정순왕후 생가에서 열렸다고 하는데 아직 다 데려가지 않은 야생화 화분들이 있어 가뜩이나 풍성한 마당이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정순왕후생가[貞順王后生家]는 예조참의를 지낸 김홍욱(金弘郁:1602~1654)이 노부[김적]를 극진히 모시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이 아버지 김적(金積)에게 하사한 것으로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音岩面) 유계리에 위치해 있으며 김홍욱의 4대손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대에 이르러 정순왕후(1745~1805)가 그의 맏딸로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침부터 따가워지고 있는 햇빛을 맞으며 다음 장소로 움직인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1기'일행은 단구대를 만나고 이어 용유대에 올랐습니다.

 

김기현 가옥이 위치한 한다리마을은 경주 김씨 서산파의 집성촌으로 추사 김정희가 여기 한다리 김문의 후손이며 또한 이곳에는 한림학사 용계 김지남 선생이 죽장망해로 자주 산책을 하며 시를 읊던 단구대가 있고 마치 용이 낳은 알처럼 생긴 둥근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용유단도 있습니다.

 

작은 개울이 합쳐지는 합수부에서 조금 윗쪽에 자리한 용유대는 성암지로부터 4.3km, 용비지로부터 8.3km지점 유계리 앞을 도도히 흐르는 도당천의 한가운데 알처럼 거대한 둥근바위가 모여있는 풍경인데 말 그대로 용이 노닐던 곳이라고 이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날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1기'일행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용유대는 단구자 김적(1564~1646)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껴 "평릉도찰방"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낸곳으로 큰바위에 "단구김선생유상고허적"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벼루로 이용하였다는 네모진 자국도 있다고만 알려져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였는데 함께한 표윤명 선생님의 안내로 "단구김선생유상고허적"이라는 글귀를 찾게 되고 이어서 바로 말로만 듣던 천연바위에 만들어진 벼루를 찾아 냈는데 아래의 사각형 홈은 물을 저장하는 곳이고 그 아래 조금 더 큰 사각형의 모양으로 인공적으로 가공된 모습이 바로 먹을 갈던 벼루로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학 창의체험 1기'과 함게한 일행이 대단한 발견을 한 것입니다.

^^

 

 

 

이어 농로를 따라 걸어 추사의 암각이 있는 취석을 보고 당시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추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자리를 떳습니다.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정말로 무진장 더웠던 오전이었습니다.

 

계룡도령이 땀으로 샤워를 했다는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ㅠ.ㅠ

 

 

다음으로 이어진 일정은 이번 탐방의 마지막인 상산 황씨의 묘역이 있는 서산의 개심사입니다.

 

 

이곳 개심사는 한다리 김씨의 원찰[願刹]로 일명 한다리 김문이라는 명문가가 탄생하게된 연유를 알게되는데 추사의 11대 조모인 상산 황씨는 경주 김씨인 김연의 계모로 고향이 서산 대교리[한다리]였기 때문에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단구자 김적, 학주 김홍욱, 정순왕후, 또 다른 줄기로 추사 가문인 김흥경, 월성위 김한신,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이 상산 황씨의 비문을 쓴 사람이 바로 추사 김정희인데 너도나도 탁본을 떠가는 바람에 비가 온통 먹칠 투성이라더니 근래에 새로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친절하게 비석문의 해설까지 담아 세운 비석도 같이 있습니다.

 

 

이번 2013 기호유학 인문학 포럼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에 충청남도교육연수원 '문화 창의체험 1기'에 이어 '문학 창의체험 1기'로 참여한 충남도 초등학교 교사 30명은 "더운 날씨와 빡빡한 일정에 몸은 힘들었지만 한류의 원조 추사의 흔적을 찾아 다니며 보다 폭넓고 깊이있게 알게 되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전통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조상들의 지혜를 읽어 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며 "이번 연수를 통해 체득한 실질적인 긍지를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개심사를 돌아보며 마친 이번 추사 김정희를 찾아 떠난 탐사여행은 충남도청이 주최하고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주관한 것으로 지난해 큰 성원과 관심 속에 치뤄진 2012년 ‘기호유교문화 인문학포럼’에 대한 후속 방안으로 충남에 산재한 기호유학 관련 역사문화자원의 현장에서 강의와 토론, 음악회 및 답사가 병행되는 고품질 인문학 프로그램을 개최하여 해당 시군과 연합 행사로 확산시킴과 동시에, 다양한 계층을 타켓으로 삼아 기호유교 문화자원의 잠재력을 각인 충남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있고, 향후 충청유교문화권 개발사업에 있어서의 추진 동력 확보를 위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하는 행사입니다.

 

충남역사박물관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하는 강연과 국악 공연이 어우러지는 야외 강연인 '기호유학 인문마당'이 총 5회, 답사와 종가문화체험 그리고 작은 공연이 있는 종가 탐방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 명가 탐방'이 총 6회, 특정 문중 및 학예사 대상의 고문서·유물 강의 '기호유교문화 아카데미'가 총 10회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 과정 중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 명가 탐방'의 경우 충청남도교육연수원과 함께 초.중.고 교사들의 ' 2013 역사ㆍ문화ㆍ문학 창의체험 직무연수'와 함께하게되어 더 큰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사의 수업 능력 및 창의적 체험활동 지도 능력 함양하고 직무연수 강화로 학교 현장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 체제 구축하기위한 방편으로 참여 중심의 체험식 연수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개인 역량 강화를 통해 창의적 체험 활동 지도 역량 강화로 학교에 대한 교육가족의 만족도를 제고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이번 연수에 함께하게된 유쾌발랄했던 모든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

 

 

[2013년 5월 25일 '2013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충남명가 탐방’을 다녀 온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