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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전북 완주군 추줄산 위봉사와 효자호랑이 전설

송광사에서 위봉산성의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이

위봉산[圍鳳山또는 威鳳山 ] 또는 추줄산이라 부르는 산의 남쪽에 위치한 위봉사다.

 

위봉사는 원래 봉황이 둘러쌌다는 圍鳳寺였으나 언제 부터인가 봉황의 위엄이 서린 威鳳寺로 바꿔어 있다고 한다.

봉황이 둘러싸 안온한 절이라면 모를까,

봉황의 위엄으로 사바대중을 위압하려는 뜻으로 보여 느낌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위봉사 [威위엄 위 또는 圍둘레 위鳳寺]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所陽面) 추줄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백제 무왕 5년(604)에 서암(瑞巖)이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단지 설화로만 전해 올 뿐이다.

하지만 고려 말엽인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나옹선사가 중창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설이라고 한다.

 

1868년 조선 세조때 포련선사가 쓴 ‘위봉사극락전중수기(圍鳳寺極樂殿重修記)’에 따르면 신라 말 최용각(崔龍角)이 말을 타고 전국 산천을 유람할 때 봉산(鳳山) 산꼭대기에 올라가 장대봉에서 보니 남쪽으로 봉황 3마리가 산을 감싸고 있어 이를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위봉사(圍鳳寺)라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봉황이 에워싸다'는 뜻의 위(圍)봉사였으나 언제부터인 위엄이나 세력을 뜻하는 위(威)로 바뀌어 '봉황’의 위엄 이 있는 위봉사(威鳳寺)로 바뀌었다.

 

세상의 그 무었보다 낮추고 낮추어야 할 스님들의 수도처로는 참으로 어울리지않는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포련선사가 쓴 ‘위봉사극락전중수기(圍鳳寺極樂殿重修記)’에 따르면 당시 위봉사의 규모가 전각 28동에 암자가 10동에 달한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상당히 컷을 것으로 짐작이 되고 근세에는 한 때 52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모사(母寺)였다고도 한다.

위봉사의 전각들은 조선시대 중수한 건물들인데 현재는 보물 제69호인 보광명전과 지방 문화재 제698호인 요사와 삼성각, 그리고 백의관음보살 벽화가 남아 있다.

   
현재는 조계종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최근에 중창이 이루어지고 있어 대다수의 건물들은 모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들이다. 
 
사실 완주의 위봉사(威鳳寺)는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한적한 사찰로 대웅전 격인 보광명전만이 1900년대 초반 건물로 보물 제60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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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절 앞마당을 거쳐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일주문의 편액에 '추줄산 위봉사'로 되어 있다.

추줄산이 무슨 뜻일까 ?

이곳 저곳 뒤지다 보니 고려의 승려 혜심(慧諶:1178∼1234)이 1226년(고종 13)에 수선사(修禪寺)에 있으면서

불조(佛祖)들의 염송 등을 모아 엮어 낸 책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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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색청추줄불안

 

어느 고승의 게송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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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1.산이 높고 가파른 모양새

                     2. 험하고 가파를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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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1.험하다. 산이 높고 험한 모양

                          2.무너지다. 붕괴하다

                       3.서로 스치는 소리

                    4.모이다. 모으다

 

추줄산이라함은 산이 높고 가파르기가 그지없는 험한 산이라는 뜻 정도 되겠다.

우리나라의 다른 산에 비하면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산에 추줄산이라 명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 하나의 숙제가 남는데...

어차피 삶이 숙제풀기 아닌가...

 

아무튼 가파른 계단을 올라 추줄산위봉사의 일주문은 어디의 가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승속을 나누는 경계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한걸음씩 내딛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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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면 가람 어디서나처럼 사천왕문을 거치게 된다.

다른 점이라면 일주문과의 거리가 가빠고 또다시 몇개의 가파른 계단위에 있다는 것이다.

 

좌측에는 벚나무 우측에는 자태가 고운 소나무가 있고

벚나무쪽으로 돌아가면 해우소가 있다.

 

속세의 묵고 찌든 것들을 다 비우고 불토정국으로 들어서라는 말씀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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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사의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산중 가람이다 보니 

산의 기슭의 높낮이에 따라 축대를 쌓아 단을 높여 가며 터를 다듬어 넓은 공간을 확보한 후 

각 단에 어우러지게 일주문, 천왕문 등의 관문을 세우고 

봉황이 등장하는 절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봉황이 산다는 봉서루를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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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서루를 비켜 오른쪽을 보게 되면 범종루의 처마가 겹쳐서 보이는데 근래에 칠한 듯한 단청이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화사하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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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는 누각이, 경내에서는 바닥과 높이를 맞추어 지장전이 되도록 꾸몄는데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고 마당에서 보면 단층이 되는 봉서루의 마루아래를 지나

몇개의 계단을 또 오르면 위봉사의 본당에 도착하게 된다.

 

위봉사의 마당에 당도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세월 모를 한그루의 소나무다.

언제부터 자리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소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기품이 깊어지는 수종이다.

 

어쩌면 보물로 지정된 위봉사의 보광명전보다 더 가치가 커질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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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사 보광명전은 아미타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위봉사의 주 불전으로써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 칸의 작은 규모에 비해 기둥과 부재가 충실하여 자못 웅장해 보이며 네 귀엔 활주를 세워 활 꼴을 그린 추녀를 받쳤다.

암막새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1673년(조선 현종14년)에 중수와 번와(기와를 새로 얹음)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위봉사보광명전(威鳳寺普光明殿) 보물  제608호 1977.08.22 지정

이 건물은 조작솜씨나 목재를 다듬은 기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법당 안에는 극락을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으뜸 부처로 모셨다.
좌우의 중심기둥 사이에 칸막이벽을 세우고, 그 뒤에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상을 그렸다.
불상 왼쪽 벽에는 악기를 든 선녀를 비롯해 여러 인물을 묘사한 그림을 걸었고 바둑판무늬로 짠 천장에는 연꽃을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은 단청과 더불어 차분한 색조를 띄어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부위마다 굵직한 목재를 사용하였고 귀퉁이의 기둥도 높게 솟아 건물 외양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위봉사는 백제 무왕 5년(604)에 서암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신라말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절터에서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위봉사(圍鳳寺)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공민왕 8년(1358) 나옹화상이 절을 크게 넓혀 지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석잠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빛을 두루 비춘다는 뜻을 가진 이 건물은 아미타삼존불상을 보시고 있다.
건축 기법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며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적힌 현판은 조선 순조 28년(1828)에 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불단 위쪽으로 운룡(雲龍)과 여의주 모양의 구슬을 장식한 닫집을 만들어 놓아 불상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쪽 뒷벽에 그린 백의관음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불화와 비교적 채색이 잘 보존된 금단청은 차분하고 아늑한 법당 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우수한 옛 채색기법과 조선시대 목조 불전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은 다포계(多包系) 양식(樣式)으로 건축된 팔작집으로 굵직한 재목(材木)들을 사용하여 집이 웅장(雄壯)하게 보이며 귀솟음도 뚜렷하다.
공포(공包)는 내·외(內外) 모두 3출목(三出目)이다.
쇠서(牛舌)의 조각(彫刻) 솜씨와 내·외부(內·外部)의 연화(蓮華)를 초각(草刻)한 솜씨 그리고 귀공포(隅 包)의 간결(簡潔)한 처리수법(處理手法) 및 보(樑)의 다듬은 기법(技法) 등으로 보아 17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불단(佛壇) 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좌우보살(左右菩薩)을 안치(安置)하였고 불상 위에는 낙양각과 운룡(雲龍)으로 장식(裝飾)된 화려한 닫집(寶蓋)을 두었으며 가구(架構)는 1고주(高柱) 7량(樑)으로 대들보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별화(別畵)로 그린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나 후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린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 등은 색조(色調)가 차분하고 아늑한 금단청(錦丹靑)과 더불어 고식(古式) 채화(彩畵)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보광명전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배롱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시절이 겨울이라 붉고 화사한 꽃을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언제 또 인연이 닿으려나 만은 붉게 핀 배롱나무 꽃이 핀 모습을 상상만으로 느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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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착한 때가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

보광명전 뒷편에 위치한 위봉선원에서 수도중인 비구니스님들이 줄을 지어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각기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습들이 귀를 스치는 바람처럼 생각으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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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봉사는 조선 중엽 위봉산성이 축조됨으로 해서 산성 사찰로서의 위봉사의 역할이 커졌고,

조선 말엽까지 중수가 잇달았고 일제 때를 거쳐 광복 후까지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으나 6.25 동란으로 폐사되다시피 한 것을

1988년 '법중 스님'이 불사를 일으키고 "위봉선원"을 개소하여 지금은 전북의 대표적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가람의 구조 때문인지 보통은 선원이 대웅전의 우측부분에 위치 하는데

위봉사에는 대웅전 역활을 하는 보광명전보다 높게, 뒷편에 자리한 것이 색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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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명전의 좌측으로는 특이한 형태의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않아서 인지 오래된 굴뚝에는 능소화가 덩굴을 마음껏 벋으며 자라고 있다.

주황색 꽃으로 가득할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움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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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들이 거처인 이 건물은 중심법당인 보광명전에서 보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요사라고 하지만 앞면 중앙은 대청마루를 둔 법당으로 <관음전>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그 좌우에 실제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를 두어 건물 평면이 <工>자형을 이룬다.
조선 고종 5년(1868)에 절 확장을 위한 큰 공사가 있었는데, 건물의 짜임새로 보아 이 요사도 그때 지은 듯하다.
조선시대 주택의 구조를 취하면서도 일부를 법당형식으로 장식하였다.
관음전과 승방, 부엌 등은 지붕의 높낮이가 서로 달라 그 기능에 따라 품격의 차이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의 사찰명 편액에는 특이하게도보통 글씨만 있는 것과 달리

가운데 '威鳳寺'라 횡서하고난과 대나무가 좌우로 그려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각기 글씨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던해강 김규진과 죽농 서동균의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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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사 요사 [威鳳寺寮舍]  전북유형문화재 제69호 1976년 4월 2일 지정

위봉사 대웅전인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보면 오른쪽에 4칸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 각각 2칸씩의 요사가 있다.

위봉사 극락전중수기(極樂殿重修記)에 의하면 조선(朝鮮) 고종(高宗) 5년(1868) 포련선사(布蓮禪師)가 60여칸의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가구(架構)의 짜임새로 보아 이 불전(佛殿)도 그때 중창(重創)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팔작지붕의 앞뒤 건물 가운데를 맞배지붕로 연결시켜 배치평면(配置平面)이 工자형(字形)을 이룬 특이(特異)한 배치를 하고 있다.
맞은편은 극락전, 대청마루가 있는 측면은 관음전과 선방(참선하는 방)으로 뒤쪽은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방의 성격과 기능에 따라 지붕 높이가 각각 다른 것은 단일채이지만 기능에 따라 위계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봉사에는 묘법연화경판(妙法蓮華經板), 동국여지승람목각판(東國輿地勝覽木刻板)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동국대학교박물관(東國大學校博物館)과 전주시립박물관(全州市立博物館)에 30여 쪽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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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명전의 우측으로는 나한전이 문을 굳게 닫고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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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의 옆 한단 아래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ㅁ자형의 건물로 종무소와 공양간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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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스님들만 계신 곳인 것을 잊고는 생각없이 종무소 옆의 열려진 문으로 불쑥 들어섰다가

비구니 스님들의 사적 공간임을 알고 당황스러워 혼이 났다.

여러분은 나같은 실례를 범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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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각은 어느 절을 가나 반드시 가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름은 범종루, 범종각, 종루, 종각 등으로 달라도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4물을 걸어놓는 누각을 말하는 것은 같다.

또한 시계가 귀할 때에는 마을의 시계구실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소음이 심하고 해서 절의 법고소리나 범송소리를 듣기가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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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진에는 담지 못하였으나 축생들의 제도를 위해 두드린다는 법고...

밤낮으로 정진하라는 의미로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어 있으라는 목어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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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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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찰이든 다를 것이야 있으랴 마는 이곳 위봉사를 돌아 나가는 길에

비구니스님들의 수행 도량이라는 것과

이렇게 보기에는 단층 같으나 입구에서 바라 보면 2층인 지장전이 특이하다면 특이 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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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지장전 가운데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사천왕문을 지나고 일주문을 나서면 사파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즈음하여 위봉사와 얽힌 전설 하나를 풀어 놓고 떠나려 한다.

 

 

위봉사와 효자호랑이에 관한 전설


옛적 주줄산이라 불리던 지금의 전북 진안군에 있는 운장산(雲長山) 기슭에 효심이 지극한 김만수(金萬壽)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십고개를 넘어선 그는 환갑이 지난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두 자녀를 거느리고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낮이면 땀흘려 일하고 밤이면 호롱불을 밝혀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아가는 말그대로 주경야독하는 어엿한 선비이기도 했다.
그런 김서방에게도 커다란 고민이 한가지 있었는데 연로한 어머니께서 유난히도 고기를 좋아해 밥상에 고기반찬이 오르지 않으면 수저 들 생각을 않으시는 것이었다.
늙으면 오히려 어린애가 된다고 고기반찬이 없으면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김서방은 반찬 투정을 하는 어머니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형편이 가난해 항상 어머니 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해 불효를 한다며 자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위봉사(威鳳寺)에 도력이 높으신 스님 한 분이 오셨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퍼졌다.

이를 듣고 김서방은 “그래, 그 분과 상의를 하면 어쩌면 좋은 방법을 일러 주실거야”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고 바로 다음날 아침 김서방은 새벽밥을 먹고 위봉사를 향해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수십리 고개길을 단숨에 달려 절에 당도한 김서방은 스님을 찾아 뵙고 자초지종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와 주십사 간청을 하였다.


김서방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스님이 지필묵을 가져와 두루마리에 글을 써 주시며 “내 그대의 효성에 감복해 비법을 알려 줄 터이니 이 두루마리에 쓰인 주문을 읽으면 호랑이로 둔갑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비법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 김서방은 스님께 허리가 꺾이도록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김서방은 식구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들기를 기다려 부엌으로 들어가 스님이 준 두루마리를 보며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문 읽기가 끝나자 김서방은 순간 커다란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호랑이로 둔갑한 김서방은 집을 뛰쳐나가 산속에서 커다란 산돼지 한 마리를 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마당에 놓여있는 산돼지를 발견한 아내가 깜짝 놀라 잠들어 있는 김서방을 깨웠다.
김서방은 시치미를 뚝 떼고 우연히 산에 갔다가 놓아둔 덫에 걸려 있는 산돼지를 보고는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옮겨다 놓았다고 둘러대었다.


아내는 남편이 구해온 산돼지가 대견해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물론 어머니께도 며칠동안 배부르도록 고기봉양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고기가 떨어지면 김서방은 또 다시 호랑이으로 둔갑해서 산짐승을 잡아와야만 했다.

그러기를 몇차례...
며칠마다 고기가 마당에 놓여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긴 아내는 누가 새벽이면 고기를 가져다 놓는지 보려고 잠든 척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 깊어지자 남편이 조용히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무슨 두루마리를 보며 중얼 거리더니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로 변해서는 산으로 쏜살같이 달려 가는 것이 었다.

 

그 모습에 너무 놀란 아내는 처음에는 내 남편이 호랑이로 변하다니...하며 어쩔줄 몰라 하다가 불현 듯 정신을 차리고는 남편이 부엌 한켠에 숨겨 둔 두루마리를  꺼내어서는 호롱 불에 비추며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호롱 불에 너무 가까이 가는 통에 그만 두루마리에 불이 옮겨 붙어 홀랑 다 타버리고 말았다.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알 까닭이 없는 호랑이로 변한 김서방은 짐승을 잡아 가지고 돌아와 부엌을 찾았으나 불 타버린 두루마리가 아무리 찾아도 나올리 만무였다.


안타깝게 부엌의 구석 구석을 뒤지는 호랑이로 변한 남편을 보며 아내는 자신의 잘못으로 불에 타 버렸다고 이야기를 하자 말도 할 수 없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도 없게 된 김서방 호랑이는 날이 밝아오자 포기하고 눈물을 쏟으며 산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아무리 자신을 탓하고 후회를 해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김서방의 어머니도 며느리로부터 아들의 사연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식탐을 탓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없이 많은 날을 자신의 못된 식탐이 귀한 아들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보냈다며 피맺힌 넋두리를 했지만 이것 역시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고기를 탐해 벌어진 일이므로 자신의 잘못을 빌며 남은 생을 살기로 작정을 하고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가 지성으로 용서를 비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길을 나섰다.

 

마을 근처의 숲속에서 그리운 식구들을 보려고 집을 쳐다 보던 김서방 호랑이는 길을 나서는 어머니를 지켜 드리며 위봉사로 안내 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변한 호랑이 임을 알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그뒤를 따라 위봉사에 도착을 하여 그날부터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절에서 궂은 일은 다하며 지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김서방 호랑이는 때가 되면 언제나 처럼 잊지 않고 산짐승을 잡아다 놓고 사라지곤 했다.
김서방의 아내도 남편의 행동임을 알고 있어 욕심 내지 않고 이 고기를 모두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김서방네 농사를 모두 함께 지어 주었고 아내로 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을 주민들은 김서방 호랑이를 효자 호랑이라 부르며 칭송하며 두려워 하지 않고 이웃처럼 지내게 되었다.


어느 덧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이곳 저곳 정처없이 수행의 길을 다니던 도력높으신 그 때 그 스님께서 우연히 다시 위봉사로 들게 되었는데 김서방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되었다.

김서방의 효행과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감읍하신 스님이 김서방의 어머니를 불러 그 비법을 다시 두루마리에 적어 주며 잘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보여 주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되자 역시 김서방 호랑이가 또 짐승을 물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등잔불을 높이고 위봉사의 스님이 준 두루마리를 펴 김서방 호랑이 앞에 내어 놓았다.
김서방 호랑이는 그 주문을 끝까지 외우고 순간 호랑이에서 다시 사람 김서방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사람으로 되돌아 온 아들을 본 어머니는 자신의 식탐이 빚은 일이라 하며 앞으로는 절대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호랑이로 변하지 말라고 말하며 두루마리를 불살라 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네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며 잡아온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후 이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위봉사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의 끝 처럼 다들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ㅎㅎ

믿거나 말거나~~~

 

 

이번 여행을 마치며 끝으로 위봉사와 위봉산성의 지도를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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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부터 쫄쫄 굶은 나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메기매운탕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

ㅠ.ㅠ

 

함께 한 블로그 이웃들께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린다.

 

 

 

[2009년 1월 31일 전북 완주 송광사와 위봉산성을 거쳐 위봉사를 다녀와서...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