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풍경이야기

전북 완주 위봉산 위봉산성 둘러보기

2009년 1월 31일

1월의 마지막 날...

급작스런 블로그 이웃의 방문으로 부랴 부랴 몇 블로그 이웃들이 모여 전북 완주로 향했다.

굳이 장소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차안에서 천년 고찰 송광사로 의견이 모아졌다.

 

특이한 절 형태의 송광사를 둘러 보고 위봉사와 대야 저수지를 거처 블로그 이웃이 추천하는 민물매운탕 집으로 가기위해

송광사에서 위봉산을 넘기로 했다.

 

송광사에서 위봉산으로 3Km쯤 가면 원래 외성이라 불렸다는 오성마을이 나오고

이 마을을 지나 산길을 돌고 돌아 한참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거의 폐허 같은 흔적만 남아있는 위봉산성의 서문이 나타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 높거나 웅장한 맛은 없지만 그 역사성이나 유래를 살펴 보면 지금 다 스러진 모습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봉산성 

 

이 산성은 1675년 근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숙종대에 이르러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으면서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영정와 조경묘의 시조 위패, 그리고 왕조실록을 피난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유사시 봉안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 영정과 시조 위패를 이곳에 피난시킨 일이 있다.

1808(순조 8)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남고산성을 수축하면서 이 산성도 수축한 바 있다.

당초 이 성은 너비 3m, 높이 4~5m의 성곽이 35리에 이르고 서·동·북에 3개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축조되었었다.

또 동문 옆에는 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높이 3m, 너비 3m의 반월형 석문만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위봉사가 남아 있고 북방 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어 전주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산성은 1675년부터 근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라고 한다.

국토방위의 목적보다는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영정이나 유물을 피난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결국 동학농민혁명때 태종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시켰고 산성축조의 목적은 달성하였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봉산성에 대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전주동방 40리에 있는 데 석축으로 둘레는 5천97파(把)이고 여첩(女堞)은 2천438이요 성안에는 45대의 우물이 있으며 물웅덩이는 9개소, 소금산은 1개소가 있다. 숙종 원년(1675)에 쌓았다." 라고 쓰여 있다.


숙종대에 이곳에 산성을 새로 쌓은 것은 전주에서 가까운 곳에 험한 지형을 골라 새로이 성을 쌓아 유사시에 태조영정을 피난 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위봉산성의 주된 목적이어서 산성 내에 행궁을 세웠는데 「완산지」에 행궁은 영정이안소(影幀移安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위봉산성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갑오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을 전주 부성을 방어하는 책임을 저 버리고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위판을 피난시킨다는 핑계로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겨놓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위봉산성은 처음에는 연산군에 속했으나 1704년(숙종29년) 8월에는 김제군으로 속했다.

그 후 9개 고을이 여기에 속하여 각기 군기고(軍器庫)·군향고(軍餉庫)를 두게 하였다.

성안에는 위봉사가 있는 데 행궁을 승도들이 수직한다 한 것처럼 평소의 수비를 위하여 산성안에 사찰을 짓는 예가 많았던 것 같다.

위봉사도 산성과 행궁을 지키기 위해 동시에 건물을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비구니들이 있는 것을 보면 위봉사의 역사를 자세히 보아야 이해 할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초의 성 규모는 길이 16Km 높이 4∼5m 폭 3m 의 석축이었고 3개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극히 일부의 성벽과 동서북문 문위에 있었다는 3칸의 문주는 자취를 감췄지만

그 중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높이 3m 폭 3m의 홍예석문을 유지한채 전각도 없이 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 홍예석문이 지방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는 점이다.

1974년 9월 24일 전북기념물 제 17호로 지정었고,

2006년에서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니 종합적인 관리를 기대해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흐~~~

이 석문을 사진으로 남기려다 오른쪽 다리를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해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사진이 될 것 같다.

그것은 누군가 차량진입을 막아 두려고 설치한 돌기둥곁에 차를 두고 가 버려

차를 피하며 이 반월형 홍예석문을 담으려다가

돌기둥에 오른쪽 정강이뼈를 심하게 부딪혀 아직도 그 상처가 아픈 기억과 함께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수를 하면서 군데 군데 새로이 돌을 다듬어 끼운 흔적이 보이는데 여기까지는 그나마 봐 줄만한 정도 였으나

성채 상부를 올라가서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고 있는 비석들...

관리가 되지않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지자체장의 눈에는 역사도 재선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윤리나 도덕성 보다는 경제라는 자유자본주의 논리에 서로잡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돈되는 역사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할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현장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각 성체의 보수를 하면서도 소나무의 근동과 성의 상층부 까지도 시멘트를 덕지 덕지 발라

그 역사성을 심하게 훼손한 것을 보고는

두번다시 오지 말아야 할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성벽의 모습인데 아직은 시멘트가 발리지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며

앞으로 올바른 복원을 기대하게 하는, 흔적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산성...

지자체에서는 아마 예산이 없어서 보수를 엄두도 못낼 것 같다.

다른 지역과 중복되는 특색없는 행사에는 수십억씩 쏟아 부으면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체에는 누각을 대신해[?]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그리 오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허물어진 역사의 흔적 속에서 고고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이제 밑둥을 고스란히 시멘트에게 포위당한 이 소나무는 얼마나 더 살아서 멋진 모습을 보여 줄수 있을 것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나는 길...

그저 생각없이 들렀던 위봉산성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모습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아침 조차 거른 허기진 몸을 이끌고 위봉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혹시 송광사에서 위봉사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이곳을 찾을 이를 위해서 약도와 지도를 올려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년 1월 31일 전북 완주 송광사를 거쳐 위봉사를 가는길에 위봉산성에서...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