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풍경이야기

[겨울여행] 충북 청주 상당산성 이야기

 

 

 

 

 

 

[겨울여행] 충북 청주 상당산성 이야기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지난 해의 일이 되었습니다.

^^

 

2012년 12월 23일 청주의 상당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위치한 상당산성[上黨山城]은

18만 826㎡의 면적에 대해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한으로

원래 그 자리에 백제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이는 1716년(숙종 42) 석성으로 개축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백제시대에 청주목(淸州牧)이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렸다는 것과

숙종 때 축성기록에 ‘上黨基址 改石築(상당기지 개석축)’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청주의 진산 상령산(上嶺山) 8부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등성이를 타고 구불구불이어지는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약 3∼4m에 이릅니다.



 

상당산성 성내마을에 자리한 저수지 변을 끼고 돌아 다리를 건너 오르게되는 상당산성 공남문은

이날도 많은 사람이 찾아 겨울 산행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경사진 길을 나무 계단으로 잘 지지하여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는데

매서운 골바람에 나무에 얹혀진 눈이 흩날리며 햇빛 아래 반짝이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산성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동편으로 누각이 보이는데...

이는 동장대[보화정-장대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세워 지휘에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로

동장대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19년인 1743년에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92년에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쨍하게 떠 있는 태양이지만 이날의 바람은 매섭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부분 가벼운 차람의 산행객들이었는데 청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고 합니다.



 

숙종 때의 개축 이후에도 1731년(영조 7) 남문 문루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보수를 했으며,

1802년(순조 2) 1,176개의 첩(堞)을 시설하여 산성으로서의 완벽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고

그 뒤 성벽이 퇴락하고 문루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1971년 석축 부분을 개축하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서문·동문의 누문을 모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娘臂城)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아래사진의 먼 곳으로 가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시의 남부와 북부 및 미호천평야와 증평평야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쪽은 산과 계곡으로 가로막혀 있어 산성 입지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

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으며

정문인 남문 주변에는 3개의 치성과 장대, 4곳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몸을 숨기고 적을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성첩, 여장, 치첩 등이 있다]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최근에 보수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공남문 앞에는 철쭉공원방향으로 눈썰매장이 만들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과 행복한 목소리가 성벽을 타고 메아리칩니다.

 

원래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축성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 숙종~영조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당시에 개보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 공남문과 미호문에는 성을 쌓은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 장대석을 볼 수 있습니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큰 문이 있는데 남문은 공남문 또는 공작루,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미호문입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새롭게 보수한 흔적들이 다른 색과 모양의 돌들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지금 50여가구가 관광객을 상대로 토속음식을 판매하며 생활하는 성내마을에는

다소 협소한 주차시설과 체계적이지 못한 관리형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성내마을의 건물들을 조선시대의 건물 형태로 바꾸거나 체계적으로 구획하여 개선한다면

훌륭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역사의 장으로서 그 역활을 톡톡히 해 낼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 시대 지리지에서는 상당산보다는 상령산(上嶺山) 지명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 지리지에 고상당성(古上堂城)에 대한 기록으로 "율봉역(栗峯驛) 북쪽 산에 있고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7천7백73자로 성안에 우물 열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지도서'에는 "선도산에서 뻗어 나와 상당산성을 이룬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현재의 상당산성과의 관련은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