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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백의정승 명재윤증선생의 영정을 모신 유봉영당

 

 

백의정승 명재윤증선생의 영정을 모신 유봉영당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182번지에는

1985년 12월 31일 충남문화재자료 제280호로 지정된,

백의정승 명재윤증선생의 영정을 모신

유봉영당[酉峯影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재윤증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인데 왜 유봉영당이냐구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증선생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명재[明齋]와 유봉[酉峯]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었는데

그 호 중의 하나인 유봉을 따서 이름한 것이랍니다.

 

호는 별명과도 같은 것이라

시기나 상황에 따라 달리 불리기도 하고

새로이 짓기도 하는데...

널리 알려진 호 명재와는 달리

유봉이라는 호로 불린 연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
지난 23일 명재윤증선생의 종손인 윤완식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유봉[酉峯]이 명재 윤증선생이 마지막가지 사시던 동네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아래의 링크된 자료는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7741&cid=40942&categoryId=33084

​ 

그리고 사후에 국가[또는 왕]로​ 부터 받는 것이 시호인데

시호를 내려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겠죠?
^^​

 

 

당초 명재윤증선생이 40세가 되던 때

지금의 병사리에 낙향하여 아래에 있는 사진의 자리에 강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하기위해 강학했었는데

강당은 1940년경에 헐려 현재 주초석만 남아 있다는 자료가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 ]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있는데,

정확한 것인지 명재윤증선생의 종손에 문의하였더니

잘못된 정보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 글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래 사진의 우측 작은 언덕에 노천 강당이 있었다는 정도이지

경승당을 제외한 강당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아래의 링크된 자료는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http://no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nonsan&dataType=01&contents_id=GC02000972

 

이렇게 인터넷이나 도서에 올려진 숱한 자료들이 ​잘못된 것들인데

이를 수정하려면 너무도 힘들답니다.

 

 

윤증선생이 1717년 돌아가시고,

1744년 문하에 있던 유생들이

당 시대의 건축 양식을 따라 영당과 경승제를 건립하였고,

명재윤증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하고 있습니다.

 

유봉 영당 건립 후 여러 차례 중수가 거듭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최근의 기록에 의하면 8세손인 우덕 윤덕병[尹德炳]이

거금을 희사하여 경승재와 영당을 중수한 후

3차에 걸친 주변 정리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현재는 영당과 경승재, 관리사 성모당, 그리고 아래채가 남아 있습니다.

 

 

먼저 아래채를 통해 들어서면

처음 만나게 되는 건물이 바로 성모당[誠慕堂]인데

이곳 마루 위에 보면

2005년 3월 13일자의 우덕윤덕병공덕부양문이 붙어 있으며

가장 최근에 중수한 기록이랍니다.

 

 

성모당의 현판은 팔송 윤황선생의 직계 후손이며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한

서예가 노정 윤두식선생의 작품입니다.

 

 

이곳 경승재는

가운데 마루를 포함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축물로

얕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

한 눈에 노성벌을 내려가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경승재라고 쓴 현판인데...

누구의 글씨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역시 마루 위의 천정과 붙는 부분에

단군세기4312년[서기1979년]에 중수하였다는 내용의 영당중수기가 걸려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글의 말미에 쓰여진 광복35년 기미9월15일이라 쓰인 부분입니다.

 

아직도 채 마무리되지 못한 독립이지만

광복의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찬찬히 다 읽어 보면 중수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겠지만

우선 눈에 드러나는 부분만 보면

아마도 당시에 기단을 대리석으로 까는 등의 중수가 있었던 듯 합니다.

 

 

경승재의 주변의 바닥을 돌로 완전하게 덮어 놓은 것이

여간 편리해 보이지 않습니다.

^^

 

 

그리고 경승재의 한 쪽 벽면에는

그 시절 사용하던 여러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는데

잔디깎기는 그렇다 쳐도

벼, 보리, 팥, 콩, 밀 등 곡물의 쭉정이와 겨나 먼지 등을 가려내는

농기구인 풍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봉영당은 경승재 뒤로 오르면 관리사 성모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당의 안으로 들어가면

진본이 아닌 사본 초상화가 좌, 우로 두폭 걸려있답니다.

 ​

진본은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

 

 

백의정승 명재윤증선생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글들과 일화가 전해지니

이곳에서 피력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 유교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분 중에 한 분이랍니다.

​ 

그리고 이곳 유봉영당에는 아주 특별한 향나무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영당의 앞 입구 쪽에 자리한 향나무인데

특이하게도 6~7미터 정도의 위치에서 두갈레로 나뉘어 자랐으며

안 쪽 보다는 바깥 쪽의 가지가 더 크게 자라 지지대를 설치 해 놓고 있습니다.

 

만약 명재선생이 생전에 심었다면 최소 300년은 된 향나무일터

역사성이나 희귀성으로 볼 때 보존이나 관리에 신경을 써주어야 할 듯한데

안타깝게도 아무런 소개나 관리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이곳 유봉영당이 있는 병사리가

유교문화체험 농촌체험 희망마을로 선정되었다고하니

앞으로가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예[禮]와 악[樂]을 중시하던 충청의 기호유학!!!

대한민국에 하루빨리 기본이 바로 잡히고,

상대를 예로 대하는 인문학을 통한

정신사조 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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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8일 다녀 온 명재선생의 영정을 모신 유봉영당을 이야기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