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풍경이야기

조선시대 문신 충인공 절재 김종서 장군 묘[세종시 장군면]

 

 

조선시대 문신 충인공 절재 김종서 장군 묘[세종시 장군면]

 

 

여러분 아래의 사진은 언제 어디를 담은 사진일까요???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아 어수선하기까지한 이 묘소는 1958년 경 문신 김종서 장군의 묘소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행정수도 세종특별자치시의 서쪽 공주시 가는 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세종 때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가 되어 여진족들의 궁경침입을 격퇴하고 6진(六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단종을 지키려다 수양대군의 칼바람에 두 아들과 함께 세상을 달리한 절재 김종서(1383∼1453) 장군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충청남도 공주시 관할이었던 장기면(長岐面)의 금암리, 당암리,  대교리, 도계리, 송무리, 봉안리, 산학리, 은용리, 제천리, 평기리, 하봉리와 의당면(儀堂面) 송정리, 송학리, 용암리, 용현리, 태산리가 합쳐져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으로 행정구역이 조정되었고. 세종시에 편입되지 않은 장기면 석장리, 동현리, 송선리는 공주시 월송동에 편입되었는데 장군면으로 행정명이 바뀌게 된 것은 공주시 장기면에 속해 있던 장군면 금암리의 주산이 봉우리가 장엄하여 장군의 기상이 있다하여 '장군산(將軍山)'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세종시 명칭의 유래인 조선 세종 재위기에 6진을 개척하였고, 조선 단종 때의 섭정승이었던 김종서 장군(將軍)의 출생지[김종서 유허지]가 묘소에서 직선 거리로 약 5.5킬로미터 떨어져있는 의당면 월곡리이고 또한 그의 묘가 옛 장기면 대교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통합 대상인 의당면과 장기면 주민 간의 화합을 지향하고자 장군면(將軍面)으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룡도령은 개인적으로는 김종서라는 인물을 장군으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의 한사람인데 그 이유로 보자면 김종서가 생의 일부를 장군으로 보내긴 했지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더 많은 세월을 문관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종서 때문에 장군면으로 했다는 것은 조금 모순된 시각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현 장군면사무소에서 대교천을 건너자마자 좌회전 후 개천을 따라 400m 진행한 다음 우회전하여, 시멘트로 포장된 시골길을 따라 약 2㎞쯤 들어가면 어수선한 분위기의 묘한 장소에 이르게 되는데 김종서 장군묘소의 입구와 함께 두꺼비 받침을 하고 세워진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신도비는 특이하게도 두꺼비의 등에 올려져 있는데 "마을 입구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지네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반적인 신도비의 받침돌인 거북이가 아니라 지네와 상극인 닭과 두꺼비 중에서 두꺼비의 형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재미있죠?

^^

 

 

그런데...

이 뭐죠???

마치 신도비 주변으로 컨터이너부터 비료에...

묘소 관리사라고 하는 곳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는 등 도저히 신성한 묘소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ㅠ.ㅠ

 

 

아무리 시대가 변해 역사가 가치를 잃는다해도 이는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혹시 이글을 세종특별자치시 관계자가 본다면 깨끗하게 정리를 해 찾는이들의 눈쌀이 찌푸려지지 않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충인공 절재 김종서 장군[?] 묘소로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

한 눈에 보기에도 위태롭기 짝이없습니다.

ㅠ.ㅠ

 

하지만 이글을 쓰는 때가 1달 가량 지난 시기이니 그동안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소통이 잘 되는 세종특별자치시 행정이니 말입니다.

^^

 

사실 이날 문화재를 관리하는 주민들의 의식이나 관계기관의 모습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이 상했는데...

1958년의 묘소에 비한다면이야 더할 나위없이 발전한 모습이 되겠지요?

 

 

홍살문을 지나 묘지로 향하다 만나게 되는 정려비각인데 김종서 장군과 그의 아들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영조 22년(1746년)에 세운 ‘충신정려(忠臣旌閭)’의 현판이 있습니다.

 

정려각에 걸린 정려에는 ‘효자통정대부병조참의김승규지문’이라 쓰여 있는데 김승규는 김종서의 아들로 수양의 수하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할 때 이를 막으려다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려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안내판에는 김종서의 조부인 김태영, 부 김수의 묘가 이웃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충청도가 산지인지 몰라도 우리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청석으로 꾸며진 길을 따라 올라가야 묘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올라가면 좌측으로 굽어 드러나는 김종서장군의 묘소의 모습입니다. 

 

 

1958년의 모습과는 달리 후손들이 설치한 것으로 보여지는 많은 묘석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 하나...

제일 우측에 자리한 높이 94㎝ 호패형의 묘갈은 복관 2년 후인 1736년(영조 12)에 공주판관 이익진과 지방 유생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비의 앞면에는 ‘조선좌의정절제김선생종서지묘(朝鮮左議政節齋金先生宗瑞之墓)’라고 2행으로 종서되어 있고, 뒷면에는 건립 사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아는 묘갈 좌측에 자리한 오석에 옥계를 올린 비는 제일 위 사진에서 보듯 1958년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3년에 세워진 것이랍니다.

^^

 

 

1963년에 세워진 비에는 김종서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과거를 현재에서 해석해 적은 것이라 다소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977년 1월 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7월 1일부로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면서 지정이 해제되었으나,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시도기념물 제2호 김종서 장군 묘(金宗瑞 將軍 墓)로 지정되어 있는데 후손들에 의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석물이 놓여있는 김종서장군의 묘...

계룡도령의 눈에는 참살당한 김종서 장군의 충직함이 잘 드러나는 1958년 이전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나친 화려함이 오히려 김종서 장군의 생을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석물들을 보며 느꼈습니다.

ㅠ.ㅠ

 

 

잘 관리되어 있는 묘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느끼는 것은 묘소만큼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도 잘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컸습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을 당시(1453년, 향년 63세)에는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을 이곳 묘소에 묻었다고 전하는 김종서장군은 '고려사,고려사절요,'세종실록'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김종서장군 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45

 

 

김종서 유허지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의당초등학교옆

 

 

 

 

 

 

 

 

혹시 백제의 고토에 사시거나 블로그를 운영하세요?

카페에 가입해서 우리 사는 세상을 함께 행복하게만들어요~~~!!!

블로그기자단 / 체험단 / 팸투어 모집 정보 제공

http://cafe.naver.com/bjpba

 

 

 

 

[2015년 1월 17일 다녀 온 김종서장군 묘소를 이야기하며 계룡도령 춘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