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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기호유학의 본산 논산의 자랑 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 묘소

 

 

기호유학의 본산 논산의 자랑 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 묘소

 

 

며칠 전 기호유학의 본산이라할 논산 노성면 파평 윤문과는 대척점에 서기도 했던

沙溪 金長生[사계 김장생]의 묘역을 둘러 보았습니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선생의 묘소는

그 일원이 1984년 7월 26일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남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 고정산 자락에 위치한

광산 김씨 선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 입구에는 김국광(金國光)의 종가 및 김장생 사당(祠堂)

조금 떨어져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위치해 있습니다.

 

 

입구에 도착해 보면 우당김선생각제기사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관련 자료가 없어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ㅠ.ㅠ

 

 

종가의 대문에는 효행과 관련한 홍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종가를 돌아 산으로 접어들면 바로 나타나는 묘역에는

김장생의 7대 조모 양천 허씨, 그 아들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공안공 겸광(謙光).공휘(公輝).장생(長生).선생(善生) 등의 묘소가 함께 있습니다.

 

 

좌우로 문인석이 세워져 있는 사계 김장생의 묘소입니다.

 

김장생의 묘역에는 의외로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는 광김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묘,

사계의 묘 바로 오른편 능선에는 김선생(金善生),

그 아래는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그 아래는 김겸광(金謙光),

그 아래는 김공휘(金公輝) 등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묘소를 올려다 보면 무척이나 장엄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아래 사진의 우측 묘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금 떨어져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균관진사공의 묘인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어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알만한 분께 문의를 해 두었는데 곧 답이 오겠죠?

^^

 

 

그리고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별도로 마련된

또 다른 묘소가 있는데

누구의 묘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우연히 일가되시는 분의 블로그를 통해 알게되었는데...

의정공 김국광의 동생인 공안공 김경광의 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비는 김경광의 신도비라고 하는데

신도비가 무슨 이유로 묘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리하고 있는지

이런 이유들과 묘소의 주인 들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더 자세히 기록하여 안내표지판을 만들어 두면 좋겠습니다.

^^

 

 

사계 김장생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하는 집안이라고 한다는데 파평 윤씨는 왜 없죠?

^^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산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3대명문이라고 하면 광김의 사계 김장생,

달성 서씨의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계룡도령의 지인으로 논산미술창작실을 운영하는

​​프랑스 유학파 김선태화백도 광김 공안공파 장손 인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죠.

​^^

 

이들 가문을 명문으로 꼽는 것은

정승 판서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인데

특히 광김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안았는데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 송씨(恩津宋氏)와 광김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된 가문은 김장생, 김집이 유일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가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계 김장생의 일생을 간략히 드여다 보면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 軍資監僉正(군자감첨정)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으며,

그뒤 남양부사, 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柳成龍(유성룡)의 천거로 宗親府典簿(종친부전부)가 되어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北人(북인)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하였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 철원부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광해군 5년(1613) 永昌大君(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仁穆大妃(인목대비)의 아버지인

金悌男(김제남)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癸丑獄事(계축옥사)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해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입니다.

 

김장생은 禮學(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理氣混融說(이기혼융설)로

그의 예학론은 兩亂(양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統(통)을 바르게 하는 것'

正統(정통)에 중점이 두어졌고,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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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8일 파평윤씨와 쌍벽을 이루는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묘소를 이야기하며 계룡도령 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