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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옛 길따라 역사따라 [동학농민군의 한 우금치/우금티전적지]

동학 [東學]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어린 헌종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18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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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비]

 

우금치전투 [牛金峙戰鬪] 
 

미륵세상을 꿈꾼 동학 남접의 수장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에 항거하기 위하여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정하고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이루었다.

전봉준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오다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孫秉熙)의 북접군과 합류하였고 일시에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하였다.

한편 신정희(申正熙), 이두황(李斗璜), 허진(許璡)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정부군은 200여 명의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공주로 향하였다.


10월 23일 이인(利仁), 효포(孝浦)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협공하기로 정하였다.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하여 정부군을 우금치로 몰자 조선, 일본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좌, 우측에서 협공으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공주의 남동쪽으로 후퇴하면서도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결국 제2차 공주접전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전봉준은 계속된 조선, 일본 연합군의 협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였고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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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全琫準, 1855~1895]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이며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였다. 
별칭은 초명, 명숙이 었고 별명은 녹두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생지는 전북 태인으로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전봉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당시 국가가 약속한 내용

<폐정개혁 12조>

1.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정한다.

3.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채용에는 지발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하지만 지켜진 약속은 하나도 없었다.

작금의 현실처럼 단지 립써비스에 지나지않는 것들이었다.


 

어린시절 듣고 따라 부르던 100년을 이어 온 구전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는 전봉준을 밭은 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또 다른 설로는 팔왕설이 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의 동요라고도 볼 수도 있다.

 
어린시절 별다른 동요가 없을 때 입에서 입으로 참 흔히 부르던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 웬지 가슴 한곳이 멍해지던 느낌이 지금도 그대로이다.

 

"새야 새야" 원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휘여 휘여 휘여 휘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윗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논엔 메나락 심어
울 오래비 장가갈 때 찰떡치고 메떡 친다
네가 왜 다 까먹느냐 네가 왜 다 까먹느냐

휘여 휘여 휘여 휘여 휘여 휘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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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주도 위령비와는 달리 동학농민군들의 의지와 뜻을 기리는 추모시비...

공주의 역사,문학인들이 그 숭고한 뜻을 기려 세웠다고 한다.

위령비나 추모시비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아 낡아 허름해진 모습은 지금의 서민들의 처지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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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1973년 독재자 박정희가 세운 위령비의 비문에는 동학 당시 부패한 관과 같은 박정희가

동학 농민의 넋을 기리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는 생각에서 박정희의 이름을 파 버렸다 한다.

 

내 블로그 이웃청수난댕이[ http://blog.naver.com/jhk5004k ]의오천사아우의

전봉준이 점심을 해 먹었었다는 장소와 농민군들의 집결지, 이동로까지의 찬찬한 설명은

나중에 공주 민속학자가 되어도 되겠다는 나의 말이 칭찬이 되었으면 좋겠다.

 

실패한 혁명!!!

동학군의 슬픈 기록은 지금 이시대 가진 자들의 횡포와 서학의 무분별한 발호 착취를 보며

시대는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행태에 새삼 동학을 떠 올려 본다.

 

 

[2008년 9월 6일 공주시 금학동 우금티 전적비 현장에서  계룡도령 춘월]

 

[찾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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