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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풍경이야기

옛 길따라 역사따라 [벡제의 한 부여 부소산성 고란사 낙화암]

오늘 공주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뜬금없이 고란사에 가고싶어 백제의 고도 부여로 향했다.

공주시와 부여군을 합쳐서 백제시로 만들면 훨씬 더 빨리 역사의 도시 백제의 고도로 발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각 시와 군의 고위관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잃게 될까봐 통합을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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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의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으로 불렸다.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백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에 달한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 산성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으로 쌓은 복합 산성이다.
부소산성 주변에는 다시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의 보조 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성흥산성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의 군수품 창고 터 등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낙화암과 고란사 등이 있다.

 

입장료가 성인 2,000원

매표소에 가서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고 뻥을 쳤다.

ㅋㅋㅋ

매표소의 직원 왈 "동네에 거주하신다면 신분증을 보여주세요." 하기에

"아니 동네 마실 다니면서 신분증 가지고 다니냐고~~~" 뻥을 쳤는데...ㅎㅎㅎ

직원은 알면서도 속아 주는 듯이 "그러면 그냥 들어 가세요." 한다.

 

충청도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동네에 산다니 믿음이 가겠는가? 이자리를 빌어 장난 친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사과 드립니다.

돈 2,000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같은 계룡산 자락에 살고 내가 이글을 올림으로 해서 한분이라도 더 방문 할 수 있을 것 같지않습니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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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은 사비문을 지나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 -> 수혈거주지터 -> 반월루 -> 사자루 -> 낙화암[백화정] -> 고란사 -> 서북사지 -> 충렬사 -> 구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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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럭이 잘 깔려진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삼충사를 만날 수 있다.

 

삼충사(三忠祠)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성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으로 백제말엽 의자왕(641-660)에게 충성을 바친 성충, 홍수, 계백 등 삼충신의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건립한 사당이라고 한다.

1979년부터 시작된 중서부 고도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사당을 중건하고 주변을 보수.정화하였으며 매년 10 월 백제문화제와 더불어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사당에는 배롱나무가 좌우로 자라는데 수령이 오래되어 한껏 멋을 부리고 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위의 사진속의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온 듯한 부부와 딸 그리고 프랑스 젊은이가 같이 왔는데...

아마도 프랑스인 사위인듯 해 보였다.

 

내가 4명이 함께 한 사진을 한장 찍어 드렸더니 대단히 고마워 하였다.

이동중에 사자루 근처에서 다시 만났는데...

부지런히 다녀서 벌써 고란사를 다녀 오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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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 곁에는 작은 폭포와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하얀수련도 몇포기 피어 있었는데...

네이버의 일일 등록량제한으로 올리지 못하였다.

 

삼충사를 나오면 보도블럭으로 깨끗하게 잘 정돈된 산책로[?]같은 일주 도로가 있는데 차량도 통행을 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위해 다니는 모습이 지역민에게는 아주 좋은 운동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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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루(迎日樓)는 상당히 높은 누대인데 1984년 12월 2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단다.

 

백제 때 축조된 부여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사적 5)의 동대(東臺)에 유존하던 건물지에 홍산문루(鴻山門樓)를 옮겨와 세웠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의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靑馬山城:사적 34)이 멀리 바라다 보이며, 남쪽으로는 백마강을 건너 임천면(林川面)에 있는 백제 때의 부여 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사적 4)과 구룡평야가 조망된다.

 

이 누각은 백마강 기슭에 있는 부소산(106m)의 동쪽 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공주 계룡산(鷄龍山)의 연천봉(連天峯:739m)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迎日臺)가 있었는데 계룡산의 연천봉으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官衙門)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영일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으로 구획된 2층 누각건물인데 다른 아문에 비해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구조는 1벌대로 쌓은 장대석 기단위에 높이 78㎝의 팔각주형장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2구씩의 주간포를 배치한 다포양식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정면에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부소산의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쉬움을 느낀 것은 구석 구석 문화재 주변에 위치한 매점의 모습이다.

물론 장사가 잘 되지 않으니 재투자를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부여군에서라도 나서서 매점의 규격을 표준화하고 깔끔하게 정돈을 해서 손님을 맞이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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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백제시대의 군창지[軍倉址]라고 하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지정되었단다.

 

백제 때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곳으로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사적 5) 동쪽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 1915년 이곳 땅속에서 쌀·보리·콩 등의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약 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사비성 함락과 함께 멸망할 때의 비극적 역사를 말해준다.

군창이 있던 곳은 지금도 더러 발굴되고 있는데, 이 군창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건물의 기저를 이루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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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amjinfire.co.kr 의 그림 인용>

 

부소산성 수혈주거지 유구는 1980년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3개소의 움집터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모습으로 A.D.4~5세기경의 백제 병영의 집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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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터 사이로 난 길은 세월을 이고 지나온 고목들이 즐비하여 데이트 코스로는 안성마춤일 것 같다.

이길을 조금만 다라가면 반월루가 나오는데...

숲속이라 그런지 모기들이 극성이다.

날씨는 덥고 땀은 삐질 삐질~~~ 모기는 극성이고... 하지만 백제의 못다한 한을 직접 몸으로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같은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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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모양으로 백마강(白馬江)이 끼고 도는 부소산(扶蘇山) 南쪽 마루에 있는 반월루(半月樓)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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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시가지 파노라마 사진이다.

좀 더 크고 자세한 파노라마 사진을 보려면http://blog.naver.com/mhdc/150034982341 포스트를 보면 된다.

오른쪽에 부소산을 휘감고 도는 백마강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사자루가 나온다.

사자루(泗자樓)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단다.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이다.

원래 1824년(순조24)에 세운 임천면(林川面)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비루로 바꾸었다.

사비루의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며 당시에는 사자루라 현판하여 사자루와 사비루는 병용되서 쓰이고 있다.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이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보물196)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네이버의 사진 20매의 업로드 제한에 걸려 올리지 못하는데... 네이버에서 개선을 해 주기 바란다.

사자루로 가려면 삼거리에서 오른쪽 오르막길로 가야하는데 마침 그곳 방범초소에 모기들과 싸우며 경찰마크의 노란 등을 설치하는 경찰들과 만났다. 

내가 "이번에 경찰의 마크가 바뀌었나 보죠? 새로달게..." 했더니 아니란다.

경찰 마크의 날개 동물이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뀐지는 오래 되었는데 떨어져서 새로 고쳐다는 것이라고 했다.

혼잣말처럼 "난 또 이번에 경찰 마크가 미키마우스로 바뀌는 줄 알았네~~~"라고 했더니

ㅎㅎㅎ 경찰 아자씨 멋적은 웃음을 날린다.

 

사자루를 다녀와 삼거리 쯤에 위치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었다.

그곳 매점은 다른 곳과 달리 부지런하고 깔끔한 아주머니가 잠시도 쉬지 않고 야외 테이블과 의자를 닦고 또 닦는 모습에 자리에 앉은 것이다.

요즘은 비수기라 장사가 않된단다.

 

혹시 부소산성에 들리신다면 이 매점을 이용해 보시라 깔끔한 아주머니의 친절한 접대를 받게 될 것이다.

 

사자루를 나와 약간 내리막길을 걸어 낙화암으로 향했다.

저기 프랑스에서 온듯하다고 한 노부부와 젊은 한쌍 도합 4명이 눈인사를 하며 고란사방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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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은 의자왕20년(서기660년), 백제의 700년 사적이 무너지던 날, 왕을 모시던 궁녀들이 그 몸을 지켜 여기 천인절벽의 바위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백마강에 원혼을 묻었다는 망국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이며, 낙화암 꼭대기에 세워진 이 육각형의 백화정은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도 하는데 글쎄...

낙화암 밑을 흐르는 백마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육각형의 백화정은 1929년, 당시 이곳 군수의 발의로 건립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풍류 공간이었던 것 같다.

1965년궁녀사(宮女祠)라는 사당이 별도로 부소산내에 세워져 백제여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워져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에 제향을 올려 추념하고 있다.


겹처마 육모 기와지붕인 백화정의 건축 세부는 장소가 갖는 역사성과는 달리 소박하고 평범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회한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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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낙화암[落花岩] 벼랑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단다.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며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곳 벼랑의 높이란 것이 아무리 세월이 흘러 강이 퇴적되었다고 하나 고작 30여미터 정도이고, 3000명의 궁녀가 뛰어내 자결을 하기에는 너무 낮은 듯하다.

그리고 낙화암 주변은 험한 바위로 이루어져 삼천궁녀가 빠져 못숨을 끊으려면 1열로 줄을 서야 하는데...ㅋㅋㅋ

그 줄이 아마도 부소산성입구까지 이어졌어야 할 것 같다.

승리한 자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니 과장이 있겠지만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않음은 어쩔 수가 없다.

더구나 아래 선착장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틀어대는 음악이 "백마강~~~// 삼천궁녀~~~// ~~~ " 애잔하게 반복적으로 들리는 데 역사적 회한 보다는 바르지 못한 역사에 휘둘린 의자왕의 억울함이 더 가슴에 메아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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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정

보는 그대로 정자다.

1929년대는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여 압제를 할 당시다.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지었다니 아마도 백마강을 바라보며 술잔깨나 기울였을 것 같다.

일본세도가 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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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에서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나는 곳

왼쪽은 고란사로

오른쪽은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유람선은 1인당 승선비용이 3,500원인데.....

7명의 정원이 차야 움직인다고 한다.

만약 정원이 차기전에 출발하려면 나머지 인원의 승선비용까지 추렴을 해서 내야 한다고 하던데 난 그냥 걷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왼쪽의 고란사로 향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었다고 한다.

 

 

고란사(皐蘭寺)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단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데 그 이름의 유래가 절 후면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皐蘭草)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고 고란정 옆에 아래의 그림처럼 어항[?]속에서 자라는 고란초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고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은산(恩山) 숭각사(崇角寺)를 옮겨온 것으로 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량(大樑) 밑에서 고란사(皐蘭寺)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정조 21년(1797)에도 고쳐 지은 사실이 있는 건물이다.

또 그 이전으로 올라가는 상량문도 있었다고 하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이 대웅전 좌측에 요사채가 있고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불전건물인데 좌측 2칸을 요사로 사용하고 나머지 우측으로 5칸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중앙 부분에 긴 불단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절에는 들리지 않고 절 뒤편의 고란정으로 향했다.

 

고란초를 보기 위함이다.

부여에는 이곳 저곳에 가끔씩 바위틈에 핀 고란초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고란초의 유래가 된 고란사에서는 박제된 역사만이 있을 뿐이다.
유리관 속에서 미이라 처럼 살아 있는 고란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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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이 결국은 고란사의 고란초를 씨를 말리고,

역사의 승리자는 승리자의 논리를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의자왕을 타락한 왕으로 묘사해

억울한 누명을 씌워 역사속으로 던져 버렸다.

 

내 한마디의 말이 의자왕의 억울함을 씻어 줄 수는 없겠지만 통한의 패망국역사는

뜨거운 태양아래서도 서늘한 한기로 다가왔다.

 

고란사를 나와 가파른 계단길로 오르다 눈이 확 뜨이는 아이를 만났다.

야생의 좀비비추무리...

이미 열매를 맺어 버려 제대로 꽃이 핀 모습은 담지 못했지만

그 존재의 가치만으로도 하루 흘린 땀의 댓가는 충분했다.

빛이 부족해서 보조광을 이용해 모습을 담았는데

업로드 제한에 걸려 사진은 다른 포스트에 올려야 겠다.

 

꿈꾸는 백마강

정금화와 독일4인조 아카펠라 (Ladies Talk 그룹)

 

 

[2008년 9월 3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에서  계룡도령 춘월]